'죽지 않고 퇴근하기,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입니다.'

[뉴스앤조이-여운송 기자] 중대재해기업처벌법(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본청 앞 단식 농성장 바닥에 붙어 있는 문구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이사장(김용균재단), 2016년 숨진 고 이한빛 PD 아버지 이용관 이사장(한빛미디어인권센터), 올해 6월 11일 기업처벌법을 발의한 정의당 강은미 원내대표가 천막 안에서 21일째(12월 31일 기준) 단식 농성을 이어 가는 중이다.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윤을 추구하며 노동자 안전을 무시하는 기업의 탐욕, 이들을 관리·감독해야 할 행정 당국의 방관,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이 3박자를 이루며 만들어 낸 불명예다. '산재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올해도 수많은 노동자(법안 발의 후 615명)가 출근한 그 길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도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노동자가 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오늘도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노동자가 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한국에서 산업재해는 갑자기 등장한 이슈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잇따라 발생한 산재 관련 사건으로 올해 초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에 개정됐지만 역부족이었다. 택배기사를 비롯해 특수 고용 노동자들이 죽음을 맞았고, 이천 물류 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산업재해가 이어졌다. 기업처벌법 제정을 통해 안전 의무를 다하지 않은 기업·공무원을 처벌하는 등 구조적·근본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여당은 임시국회 회기가 종료하는 1월 8일까지 기업처벌법을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다.

대한성공회(성공회) 이경호 의장주교와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천제욱 의장)은 국회 농성장을 방문해 지지·연대를 표했다. 정의평화사제단 총무 민김종훈 사제, 교무원장 최준기 사제, 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 공동대표 송경용 사제가 함께했다. 이들은 "2021년 국회 첫 소식이 이곳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다"며 유가족을 위로했다.

대한성공회 이경호 의장주교가 31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단식 농성을 이어 가는 산재 피해자 유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대한성공회 이경호 의장주교가 31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단식 농성을 이어 가는 산재 피해자 유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이경호 주교는 유가족에게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고,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나눈 사람들도 중심이 아닌 가장 변방에 있던 이들이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기업처벌법이 속히 제정되는 기쁜 소식이 들려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회장이기도 한 이 주교는 "아드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의 귀한 생명이 존엄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교회협도 함께 힘을 모으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주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해방자 모세를 통해 구원해 주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힘겹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품어 주셨다. 힘겨운 싸움을 이어 가는 이들에게 힘을 주시고, 모든 국민이 힘과 뜻을 모아 이 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함께해 달라"고 기도했다.

송경용 사제(걷는교회)는 그리스도인은 이 법을 단순한 노동 의제로 보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문제는 경제 논리, 물신 논리로 환원할 수 없는 생명과 인간 존엄에 관한 문제다. 우리 사회 산업 현장에서 수많은 사망 사고가 일어나는데도 이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처리하는 방식은 여전히 비인간적·반생명적"이라며 "인간은 부품이나 소모품이 아니다. 하느님 형상으로 지어진 존엄한 존재다. 기독교인들은 기업처벌법을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한 아주 중요한 법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송 사제는 기업처벌법 정부안을 비판하기도 했다. 정부는 12월 28일 △50인 이상 100인 미만 사업장에 2년, 100인 이상 사업장에 1년 유예기간을 두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5배 이내로 제한하는 안을 내놓았다. 사고 증거 인멸·훼손 시 인과관계를 추정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은 아예 빠졌다. 법안 취지를 살리지 못한 '누더기 법안'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는 "이 문제를 노사 관계 프레임에 가둬선 안 된다. 법안 취지를 완전히 몰각하고 있고 내용에서도 너무 부족한 안이다. 오죽하면 '중대재해기업보호법'이라는 말이 나오겠나. 모두의 생명과 존엄을 존중하는 기본 정신과 시민적 요구를 법안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21일째 단식 농성 중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과 이용관 한빛미디어인권센터 이사장. 뉴스앤조이 여운송
21일째 단식 농성 중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과 이용관 한빛미디어인권센터 이사장. 뉴스앤조이 여운송

김미숙 이사장은 "귀한 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하다. 연말과 새해를 여기서 맞게 되어 비통한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격려해 주시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국회가 어서 법안을 만들어 국민에게 큰 선물 하나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도 좋지만, 종교계가 다양한 사회 현안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런 활동에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국회는 1월 5일 기업처벌법 법안 심사를 재개한다. 강은미 원내대표는 "중요한 시기 마지막에 움직이는 게 정치권에 큰 압박이다"고 말했다. 민김종훈 사제는 "이날에 맞춰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기자회견을 열고 '후퇴 없는 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송경용 사제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단순한 노동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명과 존엄의 문제"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송경용 사제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단순한 노동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명과 존엄의 문제"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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