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는 교계 현안에 대한 20~30대 청년의 이야기를 꾸준히 담아내기 위해 '2030이 한국교회에게'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중학생 시절 참석했던 부흥회를 기억한다. 당시 청소년 부흥회를 주름잡던 유명한 목사가 대규모 부흥회를 인도했다. 커다란 강당에 빼곡히 들어선 학생들, 그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나는 '매우 은혜받았으므로' 당시 설교 내용을 똑똑히 기억한다. 강단에 선 목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우리 기독 청소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높은 지도층이 되어야 합니다! 스카이도 가고! 대기업도 가고! 임원진도 되고! 그래야 세상은 변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역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이 들어 쓰실 것입니다!"

당시 학업 성적이 부진했던 나는 '아멘'을 외쳤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하나님이 '성공'시켜 주실 거라는 믿음에 불타올랐다. 부흥회에서 돌아오자마자 '세상을 바꾸자'는 슬로건을 책상에 붙이고 공부에 전념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그때의 설교 내용이 성적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 기독교인의 역할은 끊임없이 유보했다. 대학에 합격하면, 원하는 곳에 취직하면,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리라는 '다짐'만 했다. 함께 부흥회에 참석했던 친구들과 꾸준히 서로의 정신 상태(?)를 확인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들어 쓰실' 날을 기다렸다.

"학생이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라는 무시무시한 우스갯소리를 어른들도 했지만, 우리도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사회 지도층이 되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부흥회에 참석한 많은 아이들을 감동하게 한 그 '성공'이, 결국 '출세'에 지나지 않음을 안 것은 꽤 최근의 일이다.

교회가 청소년들을 교육할 때 자주 사용했던 성공주의 담론은 한마디로 '출세하라'는 교회 밖의 외침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높은 직위에 오르고 권력을 얻으라는 요구였다. 교회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교회는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명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 세대가 예수 잘 믿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교육받은 내용이었다.

교회가 청년들에게 불어넣는 '세상을 바꾸자'는 기치는 '우리가 바꾸는 세상은 옳고 선하다'는 명제를 전제한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선하니 우리가 바꿀 세상은 선할 것이라는 믿음을 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자신을 선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우리가 바꿀 세상은 과연 선할까? 만일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부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칭하는 많은 고위 공직자가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는지 내게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이 성공 신화를 적당히 믿으며 살아가고 싶지만, 도무지 세상을 선하게 바꾸어 가는 '힘 있는' 어른들을 만날 수 없었기에 포기했다. 오히려 가진 게 몸뚱이뿐이라 몸으로 행동하고 보여 줄 수밖에 없는 이들이 사회 변화에 앞장섰다. 역사 속 성공한 어른들이 바랐던 세상이 과연 선한 세상이었을지 의문스럽다. 그들이 벽돌 한 장씩만 쌓았어도, 이만큼 불평등한 세상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일을 하는 건 아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정의가 살아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당연하며, 하나님도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고 성경에 나타내셨다. 그러나 그전에 교회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바꾸실 세상을 기대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자'는 행동 지침의 주체는 결국 '나 자신'이다. 이 외침의 위험성을 자각한 순간, 나는 하나님이 아닌 결국 스스로를 믿어 왔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다. 성공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목표가 자기최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모두가 성공해 부족함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리 평화롭지 않다. 성공과 출세는 언제까지나 소수의 몫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잘사는 사회'는 없다.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한지, 청소년으로서 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해야 하는지를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그저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가면 '적어도 나 하나쯤'은 괜찮은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수준에서 벗어난 교육 말이다.

낡아 빠진 성공주의는 자책, 회의감, 그리고 열등감을 낳았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취업 준비로 자존감을 빼앗긴 청년들이 하나둘씩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남들이 사는 만큼은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에 가지 않거나 일하지 못하는 청년은 교회에서도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나는 대학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적인 청년' 이미지를 얻었다. 그리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와 매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멀리했다. 은근히 그들의 삶을 실패로 규정짓고 연민했다. 심각한 죄였다.

<경계에서의 글쓰기>(행성B)를 쓴 문학평론가 오민석은 "성공 이데올로기는 '훌륭한 삶'을 척도로 출세를 제한함으로써,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삶의 다양한 가치들을 배제한다. 이 배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의 포괄성을 묵살함으로써, 사회적 헌신, 환대, 사랑보다 경쟁에서의 사적인 승리를 훨씬 더 숭고한 가치로 몰고 간다. 이것은 공공의 문제를 파편화하고 개별화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사적인 승리' 이외의 가치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곳인데도 대안의 삶을 제시하지 못했다. 교회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높은 분들은 경쟁 사회에서도 쉽게 살아남을 만한 인물들인 경우가 많다. 대형 교회일수록 더 그렇다.

이미 우리는 부모 찬스가 활개 치고 편법이 줄을 잇는 세상에 살고 있다. 노력한 만큼 되돌아온다는 말을 믿는 '적당히 순진한 청년들'로 남기엔 보고 들은 것이 너무 많다. 더 이상 성공주의 담론은 먹히지 않는다. 우리는 지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권력 유무와 관계없이 지금 당장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교회는 각자의 삶을 긍정하면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누구도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안전망을 구축하고 재정비하며 공동체를 교육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이들의 삶을 포용하는 곳이다. 잘나가는 소수만을 위한 교회는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취준생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나는 이제 '성공하자'는 말로 나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는다. 더는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을 이뤄 주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다. 10년 전, 나를 탄탄대로의 길로 이끌어 줄 거라고 믿었던 그때의 하나님은 없다. 대신 지금 내가 믿는 분은 '내가 바라는 성공으로 이끌어 주지 않을 수도 있는' 잔인한(?) 하나님이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에 지금의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성공 신화에 딱 들어맞는 삶이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소수의 성공에 포함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내가 바라는 자리가 꼭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능력주의와 낡은 성공 신화를 대물림하지 말자. 대신 각자의 삶을 먼저 긍정하는 공동체를 만들자. 출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교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주영은 / 돈 벌어먹고 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대한민국 평범한 취준생.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다. 평생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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