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는 교계 현안에 대한 20~30대 청년의 이야기를 꾸준히 담아내기 위해 '2030이 한국교회에게'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 편집자 주

한국교회 안에서 자주 접하는 이름들이 있다. 요셉·모세·사라·한나 등 성경 속 인물에서 따온 이름은 기본이고, 찬양, 믿음, 주영·주은(각각 주님의 영광과 은혜), 하영·하은(각각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다솔(다윗과 솔로몬) 등 바리에이션이 다양하다. 이제는 관련 이름만 봐도 작명의 저의를 얼추 유추할 수 있을 정도다. 자고로 이름은 좋은 의미와 바람을 담아 짓는 것이니 이해할 수 있다. 교회에서 실제로 통용되는 언어들은 이보다 더 흥미롭다. 교회에선 '은혜 받다', '시험에 들다', '넘어지다', '충만하다', '승리하다' 같은, 일상생활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세계관에서나 쓰일 법한 낯선 표현들이 자주 오간다. 여기에는 '마음이 어렵다' 같은 창의적(?) 표현이나 '분열의 영' 등 대놓고 성경적인 표현도 포함된다.

교회 언어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우선 맥락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사용되는 '범용성'이다. 이를테면 '은혜 받았다'에서 은혜에 해당하는 대상은 단순한 심리적 감동·위로에서 그치지 않고 온갖 긍정적인 결과를 아우른다. 반대로 부정적인 작용들은 대체로 '시험에 든다' 혹은 '넘어지다'라고 표현되는데, 이는 의외로 신체적 상해를 포함하지 않는다. 여기서 넘어짐이란, 상해 자체보다는 이로 인해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 데 차질을 빚었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러한 교회 언어는 꾸준한 공급과 수요를 자랑하는 기독교 간증 에세이집을 몇 권만 떠들어 봐도 금방 찾을 수 있다. 사업의 성공·실패, 재판 결과, 건강 혹은 뜻하지 않은 질병, 여론의 찬사·질타 등 여러 '세상적' 사연들이 앞서 말한 표현으로 간단히 갈무리되는 마술(?)을 볼 수 있다.

교회 언어의 또 다른 특징은 한정적 범위에서만 사용되는 '폐쇄성'이다. 교회 언어의 발화 맥락인 간증 서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며, 관계와 상황의 변화를 극적으로 엮는다. 그러므로 믿거나 믿지 않다가 고통당한 나·우리를 명확히 설정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믿지 않은, 혹은 믿었는데도 '넘어진' 상황을 벗어나면 '회복'됐다고 표현한다. 다만 이를 '승리했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데, 승리는 더 묘한 맥락에서 쓰이기 때문이다. 넘어진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했으나, 덕분에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즉 '교훈'을 얻었다. 이게 승리다. 무엇으로부터의 승리인지 애매해 보이지만, 넘어진 후에야 악한 마음을 쫓아낼 수 있었으므로 아무튼 이것은 승리다, 아마도.

여러 '세상적' 상황을 나·우리 믿음의 여정에 대입해 표현하는 간증 서사는, 문제 상황을 설정하고 그로부터 선형적인 개선을 지향하는 자기 계발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 앞의 나·우리는 신앙 상태를 이유로 어떤 고난을 받고, 결국에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면서 무언가가 나아진다. 하다못해 마음이라도 평안해진다. 교회에서는 이렇게 '잃었다가 되찾는' 서사를 꾸준히 재생산하는데, 교회 언어의 활용은 이러한 서사를 은혜롭게 코팅해 준다. 결국 승리, 영광, 은혜 같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마침표를 찍는 간증은 새로운 자기 계발을 바라며 찬양과 '주여 삼창' 기도로 이어지곤 한다.

교회 언어는 특정 개인이나 공동체 중심의 간증 서사와 접붙여 사용된다. 간증은 예배에서 설교를 대신해 행해지는 일회성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에 내재된 교회와 세상의 대립으로까지 확장된다. 당연히 교회 언어는 '세상' 언어와 잘 통하지 않는데, 이쯤 되면 '교회 방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문제는 이원론적 간증 서사와 교회 방언이 신자들의 욕망과 만나 뒤틀리고 혼합되는 지점에서 돌연 한국교회의 '수동 공격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교회 방언을 잘 사용하면 겉으로 듣기에는 갈등·적개심이 없는 듯한 표현에 상대방을 향한 비난을 담아 보낼 수 있다. 이를테면 '마음이 어렵다'는 말은 마음을 어렵게 만든 상대방을 전제한다. 그 상대방은 자신을 '넘어뜨리는' 존재이며, 그러므로 '분열의 영'이다. 명확한 대상을 가리키지 않고 사용 형태가 추상적인 교회 방언은 '당신이 나를 괴롭힌다'는 말 대신 '분열의 영 때문에 아픔을 겪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의 양끝을 흐림으로써 둥글게 말하는 듯하면서도 방향성이 분명한 비난을 만들어 낸다.

교회 방언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교회의 수동 공격성은 '넘어뜨리는 당신'을 향한 비난을 넘어, 최종적으로 '결백한 나'라는 두터운 방어막을 만드는 데 전념한다. 흔히 중산층·백인·남성 기득권층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태도가 한국교회에도 만연한데, 이는 대형 교회를 위시한 기독교가 기득권의 위치에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교회는 대체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는 리더십은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은 곧 또 다른 교회 방언인 '정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정죄는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행위라 들었으므로, 결국 문제 제기 자체가 기피 대상이 된다. 한국교회는 심도 깊은 윤리적 고찰과 반성이 필요한 여러 사안들도 '마음의 중심', '죄 사함', '판단', '심판' 따위의 교회 방언으로 에둘러 감싸 하나님께 일임한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동떨어져, '죄 사함을 받았으며 정죄도 하지 않는' 윤리적 에덴동산(혹은 초대교회)에 스스로 위치한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잘못했다 지적하고 싶은 대상이 생겨 버렸다! 공산주의, 좌파 빨갱이, 동성애자, 한국교회를 욕하는 어떤 '세력'들 말이다. 이제 '지적하되 지적처럼 보이지 않는' 언어 스킬을 발휘할 때가 왔다. 겉으로 '정죄하지 않음'을 표방하지만 실상은 여느 차별주의자·박해자의 폭력과 다를 바 없는 '교회 방언'은 이렇게 빚어진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사진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사진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한국교회는 '거칠게 표현하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며 손쉽게 피해자가 된다. 이 논리는 교묘하면서도 활용하기 쉽다.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고통받는 교회, '가짜 인권'의 공세에 위협받는 진짜 인권(혹은 신권), 일부 이단 때문에 억울하게 매도당하는 교회 등 이미 여러 사례를 본 바 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세상적인지(애시당초 '세상적'이라는 말이 원래 있는 말인가), 가짜 인권과 진짜 인권은 무엇이 다른지, '일부' 이단은 어디까지인지, 결정적으로 그들이 정확히 어떻게, 왜 '한국교회'를 박해하고 있다는 건지 밝히지 못한다. 본인들도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라 주장해 온 공동체와 '사탄·마귀'로 묘사된 상대 진영 모두 실체가 불분명한, 자의적으로 상상된 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보이는 이런 모호성이나 내재된 공격성을 지적하면, 이들은 잘못을 돌아보기보다는 '비난을 당해 억울하다'는 피해자성을 더욱 견고히 한다. 나쁜 말을 안 했는데 나쁜 놈으로 지적받았다는 거다. 이번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 때 한국교회가 보여 준 반응에서도 이런 면이 뚜렷이 드러난다. 종교 관련 확진자 비율이 높지 않은데도 교회가 지나친 지탄을 받는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억울함으로 가득 찬 교회 방언을 조합해 보면, 이 시국에 한국교회만큼 가여운 집단도 없다. 정부로부터 종교의자유를 제한받고, '일부' 이단 때문에 매도당하며, 실수한 것보다 크게 비난받고, '교회 포비아'에게 고통당하며, 입시생보다 더 자주 시험에 든다. 물론 '세상' 언어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고 한 글자도 안 맞는다. 안타깝게도 그러거나 말거나 교회는 앞으로도 자신을 피해자로 정체화할 것 같다. 그래 왔고,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되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런 폐쇄적 간증 서사와 교회 방언을 아직까지 고수한다는 건, 그 낯섦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거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선택하겠다는 고집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한국교회는 점점 외부와 소통하기 힘든 집단이 돼 가고 있다. 어쩌면 이를 두고도 '세상의 가라지와 구별되는 알곡' 같은 또 다른 교회 방언으로 자기변호를 할지도 모르겠다. 교회가 세상과 구분돼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구별 방법이 '나는 순결하다'는 자의식을 한껏 두른 피해 주장일 뿐이라면 절망적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신들이 빚는 서사와 언어가 어떤 형태·방향으로 이뤄지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때 한국교회에 남은 결말은, 자신들만의 고난과 승리를 되뇌며 세상과 동떨어져 게토화하는 일밖에 없을 듯하다.

심정용 / 포항의 한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한국 개신교의 매운맛을 집약적으로 맛봤다.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노동한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아서 다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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