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성서에서 요시야왕만큼 완벽한 칭송을 받는 인물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개혁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당시의 시대상은 스바냐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습 3:1-5). 스바냐는 요시야왕 시절에(습 1:1, 왕하 22:1-23:30) 유다에서 예언했으며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렘 1:2).

요시야왕이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왕실 엘리트와 종교 지도자들만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신앙을 타락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면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여호와는 남유다를 심판하기 위해서 일어나실 것인데 그들에 대한 처벌은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스바냐는 선포합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습 3:1-2)."

스바냐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닥칠 재난이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을 저버린 것 때문이라고 외쳤지만 정반대 주장을 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왕들과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을 계속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이 닥쳐왔다는 것입니다. 옛 중동 전역에서 섬기던 다산의 여신 아스다롯을 오랫동안 섬겼을 때에는 온 나라가 평안하고 번영했는데 이방 신들을 없앤 요시야에 의해 불행이 찾아왔다는 헛소리를 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렘 44:17)."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원전 639년부터 기원전 609년까지 유다를 통치한 요시야왕은 기원전 621년에 개혁을 단행합니다(왕하 22~23장, 대하 34~35장). 그는 즉위 18년에(왕하 22:3)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는데 이때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 22:8)."

이것을 시작으로 요시야왕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아우르는 전무후무한 개혁을 시작하게 됩니다.

종교적 상징들은 국가정책의 합법성을 획득하는 데 매우 중요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경우 왕 자신이 신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전을 건립하는 것보다 더 좋은 신에 대한 봉사는 없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아시리아에서는 왕의 형상을 성전이나 도시의 거리에 놓는 관습이 있었으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성전에 놓인 왕의 상을 신상으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이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과 비슷하게 문학적 주제로서 '고문서 발견과 성전의 수리'는 고대 근동의 다양한 문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책(Book of the Dead) 제64주문을 보면, 한 고문서의 발견과 성전 수리라는 문학적 주제가 등장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로 추정되는 덴데라 성전의 비문을 보면, 이집트 제18왕조의 위대한 왕 투스코스 3세는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염소 가죽에 기록된 고대의 문서, 소위 '덴데라의 규례'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곧이어 그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규례에 의거하여 그의 어머니를 위한 기념비를 건립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에서도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샤마쉬-아다드 1세, 느부갓네살 2세, 나보니두스 등은 고대 아카드 열왕들이 저장해 두었던 아카드의 구왕국 시대에 속한 비문들을 포함한 유물들을 발견했다고 보도합니다. 그리고 그 발견들은 주로 그 왕들이 수축하고자 했던 고대 성전 터의 초석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요시야왕은 자신의 형상과 비슷한 신상을 만들지도 않았고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요시야왕은 오로지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이방 신 숭배를 당연시하던 분위기를 일소하고자 예루살렘성전을 수리 및 정화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율법책에 따라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아울러 유다에 있는 지방 제의 중심지들을 파괴하는 것은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에서의 언약 의식에 근거한 지파 동맹의 옛 이상을 갱신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에게 복종하도록 언약을 공포합니다(왕하 23:1-3).

산당을 제거하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성전 이외에도 여호수아로부터 사무엘에 이르는 시대에 세겜과 실로 그리고 길갈 등 여러 산당에서 공식 예배를 드려 왔습니다. 왕조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왕상 3:4). 이러한 사실은 지방 산당 모두를 배교의 장소로 여기고 파괴하는 요시야 개혁의 의도를 보여 줍니다.

지방 산당에서의 숭배 행위는 유다 왕국의 산간 지방 주민들이 옛날부터 끊지 못한 배교 행위의 일부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아세라상을 들 수 있습니다. 아세라상은 열왕기하 23장 6-7절에서 보듯이 여호와의 성전에도 있었으며, 실제로 고고학 발굴로 수천 개의 아세라 신상들이 이스라엘 지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여호와 곁에서 축복을 내리는 대행자로서 그의 배우자인 아세라가 언급되어 있는 '키르벳 엘-콤'(Khirbet el-Qôm)과 기원전 8세기 중반까지 이스라엘이 거주했던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그림을 분석한 결과, 아세라와 여호와가 함께 숭배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최근의 고고학 연구들은 사사 시대, 군주 시대 말기, 그리고 포로 시대에서도 아세라 숭배가 만연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아세라 숭배는 민간 종교뿐 아니라 심지어 공식적인 여호와 숭배 집단에서도 통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성전에서도 여호와뿐만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까지도 함께 숭배될 정도로 극심한 종교적 타락이 일상화한 상태였습니다.

여러 지방 산당 가운데서도 특별히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곳은 벧엘 산당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왕하 23:15)."

벧엘은 남유다보다 더 부강했던 북이스라엘의 주요 도시로서 우상숭배의 본산이요 국가적인 통일을 저해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벧엘의 파괴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여호와 신앙의 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요시야왕은 아시리아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몰락이 여호와의 심판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그 중심에 벧엘 산당이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벧엘의 사법 기능을 예루살렘으로 이전시키는 동시에 모세 그리고 다윗의 신앙과 재결합하여 효과적으로 성전과 성서를 위한 규범을 설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여러 제의 장소에서 행해지던 여호와 신앙을 예루살렘으로 집중시켰습니다. 지리적인 구조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양상은 비중앙화가 자연스러웠고 모든 삶이 지방에 분산된 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중앙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방 신 숭배의 근거가 되었고 벧엘을 국가 성소로 개발한 정책은 결국 북왕국의 정치적인 분리를 확정 짓게 했습니다. 따라서 벧엘을 비롯한 여러 지역 성소들을 파괴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일 년에 몇 차례라도 예루살렘에 올라오게 하고, 멸망한 북이스라엘을 자연스럽게 남유다가 흡수하도록 했습니다.

성전의 돈을 개혁하다

요시야왕의 관리들은 성전에서 돈을 찾아 성전 감독자의 손에 맡깁니다.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왕하 22:9)."

열왕기하 23장 4-7절에서는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각종 이방 신상들과 남창의 집을 파괴하는 개혁이 단행됩니다. 남창의 집에서 소비되는 돈과 이방 신상에게 바쳐지는 재물 등은 종교적인 타락일 뿐만 아니라 재정을 분산시키고 백성들의 경제적 삶을 황폐화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전의 종교적인 모습만 묘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전의 경제적 기능도 숨어 있습니다.

성전의 세속적인 기능 가운데 중요한 기능은 경제적 기능입니다. 고대 근동에 있어서 성전은 그 나라 중심 도시에 세워졌으며, 또한 왕궁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도시의중앙에 은행이 세워져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성전의 재산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의 열쇠는 제사장이 보관·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앗시리아 시대의 한 서신에 따르면 제사장이 신전의 창고 열쇠를 관리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은 경제-재정적인 분야에 관여하는 국가 관리의 역할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전이 경제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신전을 중심으로 한 부정과 부패, 그리고 도둑질이 끊이지 않는 사회적 역기능도 있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전 봉사자인 제사장들도 돈의 유혹에 항상 노출되었습니다. 고대 근동에 신전과 관계된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데, 바벨론 시파르(Sippar) 지역에 있는 에바바르(Ebabbar) 신전 관리 가운데 교도소장이라는 직책이 등장한다는 것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전 문전에 헌금 궤를 놓아두고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왕하 12:9, 대하 34:9)이 관리하는데 이들은 단순한 수위나 경비원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부제사장 다음으로 중요한 일을 맡았을 것입니다. 특히 요시야 때는 이들은 전국적으로 예물을 수납하는 직무를 수행했습니다(대하 34:9).

성전을 개혁하는 것과 예루살렘 예배로의 중앙화는 지방으로 분산되는 십일조 재정을 중앙정부에 집중하여 요시야가 남유다 왕국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는 큰 규모의 재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시야의 개혁은 아시리아를 비롯한 외세를 배척하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 집중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정치·경제 분야를 포함하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갱신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유튜브 채널 '에르고니아' 바로 가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Pw8sxRrpaJba1RXI97GwSA
박태순 /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http://ergonia.org)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참고 문헌

1) 정중호,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재정 운영에 관한 연구," 『구약논단』, 8집 (2001): 53-77.
2) 신정균, "요시야의 성전 수축: 요시야의 개혁과 관련한 역사적 접근," 『구약논단』, 5집 (1998): 51-78.
3) David Biale, "젖가슴의 신: 엘 셔터이에 관한 연구," 강성열 역, 『신학이해』, 16집 (1998): 470-474.
4) John Gray, 『열왕기하』, 『국제성서주석』, 김진호, 최형묵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9)
5) Rainer Albertz, 『이스라엘 종교사 Ⅰ』, 강성열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6) R. F. Harper, Assyrian and Babylonian Letters (London and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892-1914)
7) William. G. Dever, "The Silence of the Text: An Archaeological Commentary on 2 Kings 23." Scripture and Other Artifacts. Eds. Lawrence E. Stager et a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