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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덕을 찾아서
[서평] 스탠리 하우어워스 <덕과 성품>(IVP)
  • 김진혁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2.12 14:17

하나님 말씀이 인간이 되실 때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스캔들이 역사 속에 밀고 들어오는 데 두 사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첫째는 성령을 통한 잉태를 예고한 천사에게 믿음으로 반응한 마리아다(눅 1:38). 또 다른 이는 임신한 약혼녀를 맞이하며 모욕을 감수하고, 졸지에 금욕 생활을 해야 했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대학살로부터 지키고자 난민 생활마저 자처한 요셉이다.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요셉이 누군지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낀다. 인간 요셉에 관한 유일한 묘사는 그가 의로운, 즉 정의로운(dikaios) 사람이었다는 짧은 언급이다(마 1:19).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실 때 인간의 정의로움이 필요했을까. 정의롭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성육신이라는 전무후무한 생물학적·역사적·종교적 스캔들을 평범한 사내가 묵묵히 받아들이고 감당하게 했을까. 육신이 된 말씀의 몸과 지혜가 쑥쑥 자라도록(눅 2:52) 곁에서 보호하고, 양육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데 정의로움이 필요한 성품이었을까. 왜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은 눈여겨봤지만, 하나님 아들의 아버지로 선택된 요셉의 '정의로움'에는 마땅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을까.

복음서를 보면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고생만 하던 요셉의 성품을 특징짓는 '정의' 혹은 '의로움'과 같은 개념을 전통적인 신학적·철학적 용어로 덕(virtue)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1940~)는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는 데 있어 덕의 중요성과 이를 위한 교회 공동체 역할에 관한 강연과 글쓰기를 꾸준히 해 온 사람이다. 국내에 소개된 여러 작품에도 덕 윤리(virtue ethics)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짙게 스며들어 있지만, 이번에 출간된 <덕과 성품>(IVP)은 따스한 인간미와 예리한 현실 인식과 더불어 그의 사상의 정수를 맛보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덕과 성품> /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 홍종락 옮김 / IVP 펴냄 / 216쪽 / 1만 1000원. 사진 제공 IVP

60대 신학자가
갓 태어난 아기에게 편지 보낸 이유는

<덕과 성품>은 하우어워스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영국 성공회 사제인 사무엘 웰스(Samuel Wells, 1965~)의 첫아이 로리의 대부代父(godfather)가 된 후 로리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출판한 서간집이다. 2002년부터 2017년까지 하우어워스는 매해 로리의 세례 기념일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삶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덕 하나씩을 선별해 편지를 썼다. 혈연이 없는 한 아이와 이토록 친밀하고 오래 지속하는 '부자父子스러운'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시공간의 거리, 생물학적·문화적 유전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하나의 교회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대부모-대자녀 관계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구성하는 두 축인 '영구적 혈연관계'와 '단기적 계약관계' 사이의 빈 공간을 창조적 만남과 인격 성숙의 비옥한 토양으로 개간하도록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특별한 선물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웰스는 대부모-대자녀 관계의 특별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부모는 성장하는 아이, 그의 부모, 하나님과 함께 길을 가는 동반자다. 동반자(companion)는 문자적으로 '빵을 나눠 먹는 사람'을 뜻한다. (중략) 이상적인 상황은 대부모가 진정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한결같은 모습과 귀 기울임, 이해와 사랑으로 하나님을 보여 준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중보와 감사와 때로는 탄식으로 아이의 사정을 아뢴다. (중략) 이 임무는 버겁지만 단순하다. 성령의 일하심에 관여함으로써 함께한 모든 사람이 변화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 버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일은 성령이 다 하시고, 사람이 기꺼이 참여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는 단순하다." (19~22쪽)

하우어워스는 버겁고도 단순한 대부 역할을 행복한 삶을 일구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인 덕을 해마다 하나씩 설명하면서 충실히 담당한다. 그런데 이는 작가이자 학자로서도 '버겁고도 단순한' 과제다. 20세기 중반 이후 철학과 신학에 일어난 덕 윤리에 관한 풍성한 논의를 대자代子 로리에게 설명하려는 시도는 충분히 '버거워' 보인다. 하지만 반려동물과의 관계를 덕스러움을 배우는 기회로 삼는다든지, 농구와 축구와 야구에서 습관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발견하도록 이끈다든지 등의 유쾌하고 기발한 사례가 증명하듯, 이 책은 덕 윤리를 어린이마저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게' 풀어 가고 있다.

덕과 성품이 자라는 공간은 어디인가

16년 동안 세례 기념일이 되면 하우어워스는 로리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편지를 보냈다. 각각의 편지는 인간으로서 하우어워스의 성품과 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경이로운 방식으로 조화하고 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의미를 설명하는 첫 편지, 그리고 성품이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에 관해 쓴 마지막 편지 사이에 작성된 열네 통의 편지에는 자비, 진실함, 우정, 인내, 소망, 정의, 용기, 기쁨, 단순함, 한결같음, 겸손(과 유머), 절제, 너그러움, 믿음에 관한 하우어워스의 실천적 지혜가 응축되어 있다. 각 편지에 언급된 덕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는 다른 서평이나 홍보물에도 어느 정도 나와 있기에) 여기서는 신학자로서 하우어워스의 덕 윤리가 가지는 독특성에 관해 잠깐 주의를 기울여 보기로 하자.

하우어워스가 볼 때, 현대 문명에서 특별히 왜곡되어 드러나는 인류 보편의 감정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스도인도 이러한 부정적 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두려움이 빚어낸 폭력의 세태에 동참해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든 고통 없이 살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단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피하는 데 연연하는 바람에 [나치 시대에] 유대인 같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으니 더욱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지."(47~48쪽) 고통을 낯설어하는 교회는 불안과 조급함 때문에 폭력, 경쟁, 전쟁, 물질적 번영, 힘의 정치, 거짓과 기만 같은 파괴적 삶의 방식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용인하다 결국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고통을 거부한 대가로 익혀 버린 성숙을 거부하는 유아기적 강박, 눈앞의 현실에 집착하다 상실한 윤리적 균형감은 덕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올바른 성품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파괴하고 만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 덕분에 죽음에서 자유로워진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태어났고, 이 목적은 흥미롭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하게"(211쪽) 해 준다. 각종 욕망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창조를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던 인간에게 익숙하지만 낯설어진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 교회다. 시대를 거스르며 덕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외롭거나 지치지 않게 친구를 발견하는 곳도 교회다. 하우어워스의 벗 웰스는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요약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온전한 이야기 일체의 일부임을 발견하는 것이고, 성경은 이 이야기들의 분명한 개요를 제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야기들을 무엇보다 예배라는 시간과 장소에서 배운다. 이 이야기들은 예배 안에서 화해와 음식 나눔 같은 실천으로 바뀌고, 이런 실천들을 거치며 상상력이 형성된다." (38쪽)

여러 저서나 강연에서 하우어워스는 교회의 정치적·윤리적 사명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외치곤 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 세례를 통해 개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고, "진리에 민감한 백성의 일원"(45쪽)으로 만들어지며,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지향점과 자세, 목표가 주어진다. 교회는 세상에서 뭔가 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라고 하나님이 부르신 공동체가 아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가 새 창조의 공동체로서 자신의 모습과 사명에 충실한 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그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그리스도인의 덕이 일구어지게 된다.

인류 역사를 완전히 탈바꿈하게 한 그 '놀라운 새로움'은 일상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별 볼 일 없이 평범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교회가 들려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우주의 이야기, 그리스도가 주인공 되신 역사 속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판단과 결정, 그리스도를 매개로 형성된 '너와 나'의 우정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덕은 익숙한 일상에서 '작지만 큰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류에게 선사하시고, 가르치시고, 형성해 가는 소중한 선물이다.

덕과 성품,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사렛에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 잉태를 알렸던 것을 기념하는 수태고지교회(Church of Annunciation)가 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이후 계속된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불화가 끝나도록, 가녀린 몸속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였던 갈릴리 소녀의 믿음을 상징하듯 아름답고 큰 교회다. 바로 그 옆에 사람들이 정체를 잘 알아채지 못하는 소박한 교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자, 정의로웠던 사람 요셉을 기념하는 성요셉교회(The Church of St. Joseph)다. 그 교회는 하나님나라 사역을 하도록 어린 예수가 충만히 자랄 수 있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지켜 주고, 교육했던 정의로운 아버지 요셉을 기념해 양육의 교회(The Church of the Nutrition)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리아의 순종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통로였다면, 요셉의 덕은 불확실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육신이 된 말씀이 보호받고 자라나고 성장할 수 있게 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말씀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필요했듯,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믿음'만이 아니라 여러 '덕'도 함께 요구된다.1) 만약 믿음으로 단번에 의로워지는 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전부라면, 덕과 성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부차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더 극단적인 이들의 엄청난 주장에 따르면, 덕과 성품을 강조하다 자칫 중세 가톨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하우어워스가 이야기하듯,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절대 제대로 완성하지 못할 지속적인 과정"(44쪽)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따르면, 인생이라는 불확실하고 긴 여정의 목표는 연약하고 미성숙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엡 4:13, 벧후 1: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옭아매는 죽음의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흔들릴망정 멈추거나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순례의 길을 가도록 과 성품을 기르는 일을 품고 있다.

빛나는 삶의 지혜, 마음을 녹이듯 부드러운 수사학,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오랜 공감과 인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이 높게 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하우어워스가 대부로서 인자하고 친절한 어투로 글을 쓴다 하여, 그 언어의 아름다움에 속아 행간에 매복한 전사 하우어워스를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여러 해를 걸쳐 쓰인 편지 묶음의 숨은 가치를 재발견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믿기는 하되 성숙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칭의와 성화를 함께 강조하자는 수사학적 선동, 거룩과 행복을 나누려는 얄팍한 구호에 내재한 가식을 폭로한다. 성품의 변화 없이 행함만 추구하다 신앙의 이름으로 특정 정치·도덕적 어젠다를 강요하는 폭력에 제동을 건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열정에 얼큰히 취해서는 오히려 세속적 가치를 열심히 좇아가는 오늘날 교회를 비판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덕과 성품>은 근래 필자가 접한 가장 도발적이고 위험한 책 중 하나다.

김진혁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조교수

1) 하우어워스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믿음도 핵심 덕 중 하나로 이해한다. 단, 그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초자연적 덕(혹은 신학적 덕)으로, 정의와 절제와 용기와 지혜를 자연적 덕(혹은 사추덕)으로 나누는 중세적 구분법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덕과 성품>의 105~106쪽과 197쪽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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