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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미래 위한 '번영의(?) 신학'
[서평] 미로슬라프 볼프 <인간의 번영 >(IVP)
  • 김진혁 (jinhyok.kim@ttgu.ac.kr)
  • 승인 2017.05.31 18:57

2017년 5월 23일 아침, 늘 그렇듯이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새 대통령에 대한 높은 관심, 전직 대통령 서거 8주년 기념식,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의 첫 공판 등 두터운 헤드라인층을 뚫고 큰 충격을 던지는 소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 시각으로 새벽 6시 반쯤 영국 맨체스터에서 무슬림 청년이 일으킨 자살 폭탄 테러에 관한 뉴스였다.

사고 후 1~2시간 만에 지구 곳곳으로 사상자와 테러 용의자에 대한 소식뿐 아니라, 테러 원인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이 전달되고 있었다. 한국 포털 사이트에서는 거의 실시간으로 영국 현지 뉴스가 번역되었고, 수많은 댓글도 급속도로 올라왔다. 물론 사상자를 위한 기도와 걱정이 주를 이루었지만, 유럽의 다문화주의 정책이 실패했다는 비판조의 글도 많았다. 우리나라가 테러로부터 안전하려면 현재의 이민정책을 빨리 조정해야 하고, 특별히 무슬림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맨체스터 테러 사건은 현대인이 경험하는 지구화의 여러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다문화·다종교 사회로의 급격한 전환, 빈부 격차와 소외에서 비롯된 증오심의 증대, 교통 통신 기술의 발달에서 비롯한 전통적 시공간 개념의 붕괴, 다양한 소식을 전달하고 의견을 공유하며 형성되는 공동체 의식 등….

복잡하고 불안정한 상황으로 머리가 혼미한 상황에서 그 전날부터 읽기 시작한 책에 손을 뻗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 책은 바로 맨체스터 테러 일주일 전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Flourishing)이다. 그날따라 책 뒤표지의 한 문장을 자근자근 씹으며 어떻게든 희망의 단물을 더 빨아먹고 싶었다.

"더 나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는 종교가 꼭 필요하다."

<인간의 번영 - 지구화 시대, 진정한 번영을 위한 종교의 역할을 묻다> /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 양혜원 옮김 / IVP 펴냄 / 340쪽 / 1만 7,000원. 사진 출처 IVP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예일신앙과문화연구소(The Yale Center for Faith and Culture) 소장으로 있는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1956년 출생)는 신학적 통찰을 가지고 폭력과 화해, 일과 영성, 다종교 사회 등의 현실 문제를 풀어 가는 데 지대한 관심과 탁월한 업적을 보여 왔다. 그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예일 대학교에서 가을 학기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사회학자 필립 고스키 등과 함께 '신앙과 지구화' 세미나를 진행했다. 그는 거기서 발전시킨 지구화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국제 세미나와 강의, 토론 등을 통해 갈고닦아 2016년 초 이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볼프는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족에게 복 주신다는 단순화된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인류와 자연이 함께 충만해지고 참 좋은 삶을 살아가는 '번영의 신학'(theology of flourishing)을 추구한다.

시험하는 자가 이르되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해 줄까

우리는 흔히 '번영'을 물질적 개념으로 생각하곤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탄이 던진 첫 도전도 돌을 빵으로 바꿔 보라는 것이었다(마 4:3). 인간이라면 누구나 걸려 넘어질 법한 그 오랜 시험은 지구화 시대에 더욱 매력적이고 치명적인 모습으로 인류를 유혹하고 있다. 물론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경제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면서 더욱 많은 사람이 가난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장 주도의 지구화 때문에 빈부 격차는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져 버렸고, 나라 간 경제 불균형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볼프는 세계화의 가능성과 폐단 모두를 직시해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실재를 균형 있게 볼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물론 실제 삶의 자리로 내려가 보면 예외는 늘 있기 마련이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지구화는 폭력보다는 평화를 선호하게 한다. 그리고 기술 개발을 통해 삶을 보다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변화시키며, 인류 공동체라는 상상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새로운 윤리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며, 개인과 공동체와 국가 간의 상호 협력을 도모한다. 지구화에서 비롯한 변화된 삶의 조건은 현대인이 일상에서 더 많은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인류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일상적 삶에 대한 '과도한' 긍정에 있다.

일상에 대한 긍정이 나쁜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문제는 지구화가 선사하는 일상의 풍요로움과 쾌락이 초월을 향하는 인간의 갈망 자체를 무디게 만들 정도로 강렬하다는 데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구화로 인한 빈부 격차와 문화적 획일화 때문에, 일상을 향유하거나 발전시킬 권리와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하루하루 박탈감과 패배 의식을 몸에 새기게 되고, 이것이 응축되어서 증오와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따라서 볼프는 더 나은 지구화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떡'의 유혹에 맞설 수 있는 초월적 비전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바로 여기에서 더 나은 지구화를 위한 종교의 역할을 찾고자 한다.

"가장 큰 유혹은 일신론자들의 생각처럼 거짓 신을 섬기는 게 아니다. 풍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가장 큰 유혹은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것처럼 믿고 사는 것, 마치 그들의 삶 전체가 세상의 상품을 생산, 개선, 분배하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믿고 사는 것이다. 거짓 신을 섬기는 것, 혹은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단순한 식량 공급자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큰 유혹에 굴복한 결과다." (49쪽)

볼프는 불교, 유교, 힌두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의 세계종교는 서로 다른 역사·문화적 배경과 교리적 체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떡이 아니라 초월적 영역과 바른 관계를 통해 충실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1) 지구화가 서로 다른 문화와 지역과 민족의 이익을 아우를 수 있는 윤리적 틀 없이 계속해서 시장 중심으로 진행된다면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또한 인류의 번영이라는 더 큰 비전 없이 종교는 정치나 경제적 지구화의 들러리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 배타주의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악용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세계종교는 인류의 진정한 번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인간의 풍요로운 삶의 핵심에 신과의 관계가 놓여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명이 있다.

지구화 시대 세계 평화를 위한 비정상회담

풍요로움을 위해서 물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초월적 영역과 바른 관계를 통해 일상의 욕망을 바르게 질서 잡고 교육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삶이 가능하다. 따라서 시각을 달리하면 지구화는 세계종교가 현대사회에서 공적 역할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세계종교는 "세계적 장치가 매끄럽게 잘 돌아가도록 세계 질서를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구화를 더 인간적으로"(76쪽) 만든다. 어찌 보면 합리적이고 시의적절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 이제껏 지구화가 진행된 과정이라든지 각 종교가 진리 주장을 해 왔던 방식을 볼 때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볼프는 자신이 내어놓은 '아름다운' 제안에 설득력을 높이고자 동서고금의 수많은 종교인과 사상가를 책 속으로 불러 모은다. 그리고 각 종교가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화해와 협력을 추구할 수 있을까 하는 주제를 놓고 지혜의 향연을 벌인다. 사람이 떡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신 나사렛 예수, 일상을 적절히 사랑할 수 있도록 욕망이 바르게 질서 잡혀야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신앙의 배타성에 기초한 정치적 다원주의를 꿈꿨던 청교도 로저 윌리엄스 등은 지구화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특수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류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을지 조언해 준다. 이에 뒤질세라 플라톤은 우리의 날뛰는 욕망이 문제라고 호소하고, 존 로크는 신앙에 있어 양심의 자유를 변호하며, 임마누엘 칸트는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한 조건을 이야기하며, 카를 마르크스는 지구화 시대에 찾아올 사회경제적 변화를 예언하며, 프리드리히 니체는 종교가 어떻게 인륜적 가치를 전복시킴으로써 인간화를 방해할 수 있는지도 경고한다. 막스 베버, 찰스 테일러, 앤서니 기든스, 카를 포퍼 등은 사변적으로 흘러가기 쉬운 종교적 논의를 삶에 단단히 묶어 놓을 수 있는 현실적 언어를 제시하며 논의를 질적으로 한 단계 높인다. 붓다, 마호메트, 공자, 달라이라마 등과 같은 세계종교의 성인들은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중 중간 예기치 않던 묵직한 통찰을 던지며 대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볼프가 던진 화두를 한 번 곱씹어 보자.

"평화로운 세계가 되도록 돕는 지구화의 과정은,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서로 다른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국가들의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게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로 가까이 있게 되면 자신의 종교적·인종적, 그 외 다른 문화적 차이들이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종교가 깃발처럼 별다른 의미 없이 정체성만 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좋은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종교는 또한 그들의 사회적 비전에도 차이를 가져온다." (236쪽)

다양한 사상가들과 이론들이 한정된 지면에 압축적으로 소개되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 즐겁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볼프가 전개하고자 하는 논지에 대한 집중력을 어느 정도 약화할 위험도 있다. 하지만, 볼프는 지구화 시대에 진정한 번영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이 책을 썼음을 잊지 말자. 이 같은 실천적 목표를 이루려면 다양한 관점에 자신을 노출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신뢰와 희망을 품고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필수다.

글을 맺으며:
지구화 시대, 참된 번영 가능하게 하려면

볼프의 책은 출간될 때마다 논쟁을 일으키곤 한다. 조직신학자로서 그는 '학문성'이라는 안전지대에 머무를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신학이 더 좋은 삶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라기에 주저함 없이 모험을 감수한다. <인간의 번영>도 세계적 신학자의 천의무봉(天衣無縫)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읽다 보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선 그가 사용하는 '세계종교'라는 개념부터 각 종교의 특수성을 너무 약화한 감이 없지 않다. 평화의 비전을 들어야 할 근본주의자들이 그의 부드러운 주장에 얼마나 설득될지 의문이다. 각각의 세계종교가 가진 구조적 불합리함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하고 비판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가 '인간화된' 지구화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을지도 의심이 간다.

그렇지만 볼프 자신도 밝혔듯이 오늘날에는 "전문 지식보다는 종합적이고 통합적이며 행동 지침이 될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매우 전문화된 사회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가 바로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이다"(28쪽). 물론 볼프의 아마추어리즘은 '진짜' 아마추어들이 이해하기에 쉽지 않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의도된 아마추어리즘은 우리의 계속된 고민과 노력과 실천으로 채워 나가야 할 창조적 여백을 열어 놓고 있다.

글을 맺으며 다시 맨체스터 테러 현장으로 가 보자. 아비규환 같던 당시 상황에서 힘을 다해 부상자들을 도운 노숙자가 시선을 끌었다. 인터뷰를 통해 본 그의 솔직한 모습은 슬픔과 분노로 얼룩졌던 많은 사람의 마음에 희망의 빛을 밝혀 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숙자이기 때문에 내가 인간의 마음이 없었거나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인간이라면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가서 도와야 한다는 본능이 있습니다.…만약 제가 그 [상처 입고 울부짖는]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도망쳤다면, 저는 제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2) 그는 지구화 시대에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처해 있다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규정할 수도 있는 나약하고 소외된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비극적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의 숭고함과 타자를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인간의 번영>을 읽고 서평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이 인터뷰를 접하지 않았다면 지구화 시대에 더욱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이야기하는 볼프에게 필자는 설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번영'은 신학자들이 책상에서 만들어 낸 개념이 아니며, 엘리트 활동가들의 협력을 통해 성취해 낼 수 있는 전략적 목표도 아니다. 이것은 세계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꿈이며,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는 작지만 소중한 인류애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더욱 풍성히 자라나는 우리의 꿈이기도 하다.

김진혁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각주

1) 볼프는 특정 지역이나 공동체 혹은 민족과 결부된 일차적, 토착의 혹은 지역 종교와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불교, 유교, 힌두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등을 이차적 혹은 세계종교라 부른다. 미로슬라프 볼프, 『인간의 번영』 양혜원 옮김 (서울: IVP, 2017), 29.

2) 당시 부상자를 도왔던 노숙자 스티브(Steve)와의 인터뷰는 다음 비디오 영상에서 녹취 번역한 것이다. https://www.theguardian.com/uk-news/video/2017/may/23/homeless-man-tells-how-he-helped-victims-of-manchester-attack-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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