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기도를 잘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기도든, 고요한 곳에서 홀로 드리는 기도든 마찬가지다. 신앙을 갖게 된 이들에게, 신앙을 주신 분과의 대화라 할 수 있는 기도란 낯선 문을 처음 여는 '첫 번째 실천'이자 끝까지 이어 가야 할 '마지막 실천'이다.

신앙생활이 반복될수록, 신학 지식이 쌓일수록 기도를 잘하는 것은 물론 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도를 드리면 드릴수록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서 그대로 드러내야 하고, 자신이 공동체에 소속된 위임을 간과하지 않아야 하며 신학적 어긋남 또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생긴다. 한편으로는 진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식적이어야 한다는 서로 상충된 생각이 머릿속에서 부딪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교회로 사역을 나갔을 때, 모임이나 만남 중에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미리 약속되지 않은, 즉흥적이고 갑작스러운 부탁을 받을 때는 더욱 그랬다. 정리되지 않은 표현과 전후 사정의 이해가 없는 모호하고 포괄적인 표현들을 나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신학자의 기도> /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 정다운 옮김 / 비아 펴냄 / 208쪽 / 1만 3000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신학자의 기도>(비아)는 나처럼 기도하기를 망설이는 이들, '멋들어진 기도'를 하지 못해 끙끙대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자극을 주는 책이다. 서문에서 그는 기도가 현재 자신과 동떨어진, 일상과 괴리한 별도의 '경건'을 드러내는 행위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기도가 우리를 창조하신 분과의 정직한 대화라면,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그분에게 나아가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면 우리 자신의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평범한 모습'이란 소소한 슬픔, 소소한 기쁨,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당혹스러움, 타인의 고통, 자연재해와 같은 난제를 대했을 때의 무력함,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야망,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아이를 향한 사랑, 친구와의 우정까지를 아우른다.

"일상을 돌이키며 드리는 기도

주님,
우리에게 평범한 일상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기쁨들을
우리는 사랑합니다.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
수업 시간, 공부하는 시간,
당신께서 주신 매 순간순간이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일상을 에워싼 비극적인 구조,
끔찍한 일들을 잊지 않게 해주소서.

우리가 베이글을 먹는 이 순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는 굶주리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함을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무력한 중에도 베이글을 즐기기 위해,
저 굶주림을 잊곤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께서 주신 것을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가르쳐 주소서.
그리하여 일상을 풍요롭게 하시는 당신의 나라를
모두가 알고 맛보게 하소서.
아멘."

이 기도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출발한다. 아침 식사의 즐거움, 공부를 하는 순간의 즐거움을 하우어워스는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을 에워싼 비극적인 구조"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도 않는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전자로 후자를 덮으려 하거나, 후자를 강조하느라 전자의 가치를 애써 감추려 한다. 때로는 둘 사이의 심연을 간단하게 해소할 묘책을 궁리하기도 하나 결국은 묘연해지고야 만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함을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일상에서 일어나는 감사·의문·비통·불안·희망이,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께 달려 있다는 단단한 신앙을 그는 정직하게 담아낸다.

2013년 세인트폴대성당에서 열린 포럼에서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스탠리 하우어워스. 사진 출처 플리커

'평범한 언어로 쓰인 기도'(원서의 제목)가 왜 '신학자의 기도'(한국어판의 제목)인가. 기도란 자신의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들 사이에서 '가차 없이', '꾸밈없이', '숨김없이' 자신의 정직한(Plainly)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신학이 이러한 모습을 현란한 이론과 관념으로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차 없이', '꾸밈없이', '숨김없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신학자의 기도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신학자가 드리는 기도는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 그리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깊이 성찰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 기도서는 오늘날 신학자가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넌지시 보여 준다. 신학자는 신앙 공동체가 자신의 '지금 모습'을 꾸밈없이 그대로 직면할 수 있도록 돕는 이, 그리고 그런 상태를 숨김없는 평범한 언어로 고백하고 기도하여 그리스도의 길에서 빗겨 나가지 않도록 말하는 이다. 이 책에 실린 기도들은 분명 지극히 평범한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언어들 이면에는 "기도의 언어는 돌을 깎는 것을 익히는 만큼이나 육체적"이라는 그의 생각, 기도가 정신에서 일어나고 완료되는 고상한 정신 활동이 아닌, 손과 발의 실천을 통하여 조합되고 축조된 언어라는 '신학적 성찰'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기도서는 스탠리 하우어워스 개인의 기도들이기도 하지만, 신자들의 언어 습관을 재형성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그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신학자로서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압축적인 텍스트들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평범한 언어로 쓰인 기도'라는 원제를 '신학자의 기도'로 재구성한 것은 적절하다.

천천히 긴 호흡으로 간격을 두며 기도서에 실린 기도들을 읽기를 권한다.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도, 기도해야 할 이유도 점점 없어져만 가는 듯한 삭막한 시대에 이 기도서는 때로는 잔잔한 위로로,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가슴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우리의 타성을 일깨운다. 그저 바라는 것들의 나열이나 '거룩'을 가장한, 마음에도 없는 말들로 치장된 멋들어진 기도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나약한 우리 모두가 함께 드릴 수 있는 기도, 가면을 벗고 진정한 나, 이 땅에서 아슬아슬하게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모든 공동체가 주님 앞에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정직한 기도를 올려 드리는 데 함께할 수 있는 단단한 기도서다. 하우어워스는 기도한다.

"우리는 기도가 어렵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많이 애써야만 합니다.
그러나 막상 하고 보면 별달리 애쓸 필요가 없어지고
자연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도란 당신께 자존심 없이 비는 일 같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당신께 비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일 테지요.
그러니 너그러우신 당신의 영이
우리에게 비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이 기도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간청을 가르쳐 주소서 

아멘. 나부터 먼저 그리할 수 있기를.

도화영 / 하나소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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