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의미

2010년은 '개신교회'(Protestantism)가 스코틀랜드 국교로 인정되었던,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이룬 지 4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560년, 의회의 승인을 통해 본격적으로 돌입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1520년대 루터교회 설교자들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당시 유럽 교회 개혁 운동의 정점이 되었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의 개혁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스코틀랜드 의회까지도 개혁교회 신앙에 동의하도록 했고, 당시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로마 천주교회를 따를 수 없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했죠. 스코틀랜드 의회가 제정한 이 법안은 18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는데요. 이처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종교와 정치의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 개혁 운동의 새로운 궤적을 알림과 동시에 훗날 스코틀랜드와 유럽의 역사를 결정짓는 데 뚜렷한 흔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대표자, 존 녹스

대표적인 흔적으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지도자 '존 녹스'(John Knox)를 꼽을 수 있는데요. 사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존 녹스로부터 시작되었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녹스는 '정열적인 설교자'(Firebrand Preacher)나 '인정사정없는 사람'으로 묘사되곤 합니다만, 그의 삶은 이런 묘사들보다 더 생생하고 다채로웠습니다. 오랫동안 로마 천주교회의 사제와 공증인으로 일했던 그는, 개신교로 개종을 한 후에 2년 동안 프랑스 군함에 노를 젓는 노예로 팔려 가 중노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포로에서 해방된 후 녹스는 북부 잉글랜드 지역의 버윅(Berwick), 뉴카슬(Newcastle), 프랑스 지역의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거쳐 스위스에 있는 칼뱅의 제네바(Geneva)에 이르기까지 유럽 여러 지역에서 개혁교회 회중들을 이끌었죠.

이후, 존 녹스는 망명 생활을 마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1559년이었죠. 그런데 존 녹스는 이미 스코틀랜드에서 교회 개혁을 위한 '종교 집회'(Lords of the Congregation)가 열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교회 개혁을 위해 이 모임에 직접 참여하게 된 녹스는 어떤 일에든 성실하게 노력하는 근성과 예언자적 설교, 뛰어난 외교력 바탕으로 개혁 운동을 이끌어 나갔는데요. 그의 지도력과 교회 개혁을 위한 열정은 당시 교회를 담당하던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상인들과 일반인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물론, 이전까지 스코틀랜드 교회가 믿었던 로마 천주교회 교리와 교회 조직들과 완전히 단절하게 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교에 있는 존 녹스 동상.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피를 흘리지 않았던 개혁 운동

녹스가 한창 교회 개혁을 부르짖던 그때, 종교개혁 운동으로 유럽 각 지역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주요 도시들은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다른 유럽 지역과 사뭇 달랐습니다. 유럽 대륙에서는 종교개혁 운동으로 심각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아무런 다툼이나 전쟁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특징 이외에도, 대표적인 특징이 세 가지가 있는데요. 다음의 세 가지 특징들은 참다운 종교개혁 운동으로서 빛과 같았다고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럽 내 스코틀랜드 위치와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프랑스 왕세자였던 '프란시스'(Crown Prince Francis)는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Mary, Queen of Scots)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프랑스와 혼인 관계를 맺은 스코틀랜드는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외교에서도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 (현재까지도 그렇지만) 스코틀랜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헨리 8세가 로마 천주교회에 등을 지고 난 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던 잉글랜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교(로마 천주교)와 신교(개신교)의 갈등이 매우 첨예했는데요. 당시 국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앞서 나갔던 스코틀랜드는 구교 중심에 있던 프랑스와 신교의 잉글랜드 중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당시 스코틀랜드가 프랑스를 선택했다면, 지금처럼 잉글랜드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는 않았을 텐데요.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세속적인 영향력보다는 교회의 개혁에 손을 들어 잉글랜드와 연합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기간에 신교를 채택하여 개신교회가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는데요.

이러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교회개혁을 선택한 스코틀랜드 의회의 결정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종교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1603년의 왕국 연합을 시작으로, 1640년대에 있었던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전쟁, 1707년에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의회 연합과 같은 일들을 가져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지지는 결국 스코틀랜드라는 국가에는 상당 부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표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고유 언어인 '스콧'(Scot), '갤릭'(Gaelic)과 같은 언어들은 대중에게 소외받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영어가 가장 대중적인 언어로 인식된 것이죠. (흥미롭게도 지금까지 이러한 움직임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론 실패했지만 1715~1745년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동맹을 재시도했던 '자코바이트의 난'(Jacobite Uprising)이 있었음에도 스코틀랜드 의회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 지지는 결국 수 세기에 걸쳐 지속되던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동맹을 끝내게 했습니다. 그 후부터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입지가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국제적인 영향력도 낮아졌죠.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프랑스의 파리보단 잉글랜드의 런던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는 국가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교회의 개혁을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비록 그들의 언어가 소외되고 국가의 영향력이 약해짐을 알면서도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에 한 표를 던졌던 것이죠. 이처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정치적으로, 세속적으로는 비록 어려움을 겪게 될지라도 교회 개혁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고통을 견뎌 낸 참다운 개혁 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해당되는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종교'(Religion)와 '삶'(Life), 이 두 영역에 아주 깊이 있는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교육'(Education)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갖고 있는 비전의 중심에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 속한 모든 남자와 여자에 대한 차별 없는 교육에 초점이 맞춰 있었는데, 이러한 교육으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영향력을 끼쳤죠. 사실, 하나님 말씀을 직접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현재까지도 스코틀랜드 안에 여전히 눈에 띄게 남아 있습니다.

결국,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교육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지적知的 능력 혹은 교육에 집중하는 움직임들은 스코틀랜드의 계몽운동과 문학 운동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1700년대 당시 스코틀랜드의 문맹률이 가장 낮은 지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물론,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예술을 사용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기게 됐지만 초상화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과 시편의 곡조로 만들어진 성가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철학·경제학·건축·의학·고고학·법학 등 지식 체계 전반에 걸친 발전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흔히 알려진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철학자 데이비드 흄, 이외에도 알렉산더 캠벨, 토머스 레이드, 애덤 퍼거슨, 제임스 허튼과 같은 인물이 모두 스코틀랜드인인데요. 이처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교육을 통한 사회·문화·과학·예술 등 각 요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세계와 교회 속에 더욱 폭넓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막 끝난 1572년,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교회 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어 장로교 제도를 접목하게 했습니다. 17세기경, 이러한 정치 형태에 위협이 있긴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장로교회 제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장로교회 제도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이민이 많았던 지역인, 아일랜드의 얼스터(Ulster), 미국(U.S), 캐나다(Canada), 뉴질랜드(New Zealand), 호주(Australia), 특히 스코틀랜드의 주 선교 지역으로도 잘 알려진 아시아의 대한민국(South Korea)과 아프리카의 말라위(Malawi) 등 전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장로교회 제도의 이러한 개혁 정신은 하나님의 섭리 교리에 대한 상투적인 표현을 깨뜨림으로 새로운 느낌이나 자각이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적 의지를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성취하게 하신다는 주장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에 새긴 언약 중심 사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계층적(non-hierarchical) 특징, 다시 말해 상하 계층을 나누지 않는 장로교 제도의 특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의 평등주의에 대한 이념과 민주주의를 향한 뿌리 깊은 본능은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까지 가득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이념과 사상은 평등사상과 민주주의 이념의 기초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대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의 기본 이념이 되는 사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장로 제도의 탄탄한 이념적 뒷받침을 받고 있는 칼뱅파 신학의 노동 윤리 의식은 산업혁명이 있을 무렵, 다른 여러 장로교 국가들과 그 국가에 속한 사람들에게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자랑스럽게 기념되겠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기념일 정도로 여겨질 것입니다. 또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일이 의식으로서 가치가 충분히 있음에도 많은 부분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일은 결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위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것은 스코틀랜드 지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오늘날의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같은 다른 지역들에 더 큰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합병은 어려웠을 테고,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다른 지역까지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국가형태를 갖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나 스위스의 장 칼뱅(Jean Calvin)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과 같은 민주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나라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개혁교회'(Reformed Church)에 뿌리를 둔 경우에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은, 어쩌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된 성경적인 제도라 평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단순히 스코틀랜드 지역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폭넓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본 글은 2010년 8월, <Reformed Magazine>에 실린 애버딘대학교(University of Aberdeen) 조직신학 교수 폴 니모(Prof Nimmo, Paul)의 "The reach of the Scottish Reformation"을 그와 함께 박사과정 중에 있는 오제홍 씨가 번역·각색한 것입니다.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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