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터뷰는 <뉴스앤조이> 소식지 18호에 실린 것으로, 소식지에 다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뉴스앤조이 김은석

지난 기사에서 최주훈 목사는 한국교회가 표피적으로 이해하는 종교개혁의 배경과 정신, 만인사제론에 대해 풀어냈다. 최근 장로교 안에서 논쟁이 활발해지고 있는 루터의 칭의론과 관련해서도, 루터교회 신학의 틀에 기반해 설명했다. 이번 기사에서는 농민전쟁, 두 왕국설과 관련해 대중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루터를 통해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 많은 사람이 루터를 비판하면서 농민전쟁에서 약자인 농민들이 아닌 귀족 편에 섰다고 지적합니다.

많은 사람이 비난하듯 루터가 영주 편에 섰다는 것, 힘 있는 자의 편에 섰다는 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농민전쟁과 관련한 문서가 4~5편 정도가 되는데,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선제후에게 쓴 편지에서 "귀족이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새를 보는 것과 같을 정도"라고 직접 비판합니다.

1525년 루터의 사상에 동조하여 평신도였던 농민들이 반란했을 때 루터가 철저하게 제후의 편에 섰다는 비판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러나 오해의 소지는 충분합니다. 다른 지역과 달리 당시 독일의 농민전쟁은 루터의 사상을 기초로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튀링겐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들은 루터에게 힘을 실어 달라는 요청서를 1525년 3월에 보냅니다. 그것이 '슈바벤 농민의 12개 요구서'입니다. 거기에는 당시로선 혁명적인 요구 조건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를 농민 스스로 선택하고 임명할 수 있는 권리 요구, 노예해방 요구 같은 것들입니다. 그 외에 과도한 세금과 지주의 부당함에 대한 토로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루터는 이 요구서를 즉시 받지 못했습니다. 만스펠트의 기숙학교 설립 예배 때문에 몇 주 동안 여행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이 요구서를 수령한 것은 4월 중순에서 말경으로 추정합니다. 곧바로 루터는 '평화를 위한 권고'를 씁니다. 과도한 세금과 수탈이라는 측면에선 농민 편을 들며 영주들을 압박하지만, 목회자 선임권과 노예해방에 대한 요구는 거부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이야기한 주장들임에도 말이죠. 이 지점은 루터가 중세 시대 세계관에 갇혀 있었다는 한계를 보여 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영주 편만 들었다고 오해하는 것은 4월에 쓴 '평화를 위한 권고'가 아니라 4월 말 또는 5월 초에 쓴 '폭도들에게 고함'이라는 글 때문입니다. 이 글은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영주들을 선동하여 농민 학살을 주도한 장본인이 루터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끔찍한 글입니다. 결과만 따져 보면 이 글이 나온 직후 5월 중순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루터의 이름으로 농민 6,000명이 살육됐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 사건은 루터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고, 이후로 독일에서 루터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감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내용이 아니라 정황에 대한 것입니다. 루터는 3월 작성된 슈바벤 농민의 요구서를 4월에 받고, 즉시 양비론을 펴는 '평화를 위한 권고'를 작성해서 보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쓴 다음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중에 12개의 성이 완전히 초토화된 것을 목격했고, 심지어 농민 폭도들이 루터의 눈앞에서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도륙하는 장면을 자기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자 루터는 그날 밤 곧바로 '폭도들에게 고함'이라는 끔찍한 글을 쓰게 됐죠. 게다가 인쇄업자들이 제목을 '(강도와) 폭도들에게 고함'이라고 붙여 출판하는 바람에 불에 기름 부은 꼴로 퍼지게 됩니다. 물론 인쇄업자들은 이 글이 잘 팔린 덕에 금전적 이득을 톡톡히 보게 됩니다.

농민전쟁이 완전히 진압된 7월, 루터는 당시를 회고하며 그런 참혹한 글을 썼던 이유를 신학적 이유를 대며 설명합니다. 물론 다른 판단을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쓴 글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전에 쓴 글이 사라지거나 그의 한계가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사건을 역지사지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만일 4월 말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날 저녁 어떤 글을 썼을까?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죽임당하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하고서도 과연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루터의 글을 볼 때 항상 고려해야 할 점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많은 분이 루터에 대해 일종의 '조직신학자'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펜을 들어 저항하고 위로하는 글과 편지를 쓰던 열정적인 목회자로 보는 게 맞습니다. 그러다 보니 때론 신학적으로 통일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발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역동적이고 인간적인 냄새가 납니다. 책상 위의 신학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목회자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켄하우젠 전투.

- "독일 이교도들은 국가의 권위에 관한 루터의 두 왕국설을 이용하여 나치를 기독교적으로 정당화시켜 버렸다." 칼 바르트가 한 비판이라고 하지요? 루터의 두 왕국설이 기독교에 이원론적 정교분리를 자아냈다며 칼뱅의 신정정치가 이를 극복한 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루터는 "두 왕국"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표현은 칼 바르트가 만든 것입니다. 루터는 보통 두 종류의 통치, 혹은 정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이 오른손과 왼손을 함께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종종 듣는 '정교분리'라는 말과도 다른 맥락입니다. 루터가 두 통치설을 이야기할 때의 주안점은 교회와 국가는 서로 보완관계라는 데 있습니다. 루터의 신학에서 정교분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농민전쟁에서 보인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루터는 언제나 신학적 판단에 근거해 움직이던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신학적 판단이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농민전쟁에서 보여 준 모습처럼 시대적 한계가 드러나는 때도 곧잘 보입니다. 그것을 바르트는 두 왕국설의 한계라고 비판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일단 농민전쟁과 관련한 루터의 태도를 논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은, 루터의 신학에서 두 통치설은 주변적인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루터의 두 통치설에는 여러 이론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루터는 정부와 국가, 교회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두 통치설도 이야기하지만 세 신분론이라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세 가지 삶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세 신분론은 루터가 처음 만들어 낸 게 아니라 13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시대에 존재했던 생각입니다. 루터는 그것을 좀 변형했습니다. 과거의 세 신분론이 성직자 그룹, 영주 귀족 그룹, 생산자 그룹으로 나뉘어 위계적으로 구축됐다면, 루터는 그 위계적 질서를 바닥에 평면적으로 내려놓고 다시 혈연 공동체, 사회 공동체, 영적 공동체로 나눕니다. 혈연 공동체란 부부와 가족, 국가로까지 연결되고 사회 공동체는 먹고사는 문제들, 직업과의 관계로 이어지며 영적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자리 중 우선순위는 어느 자리일까라고 질문하면 보통 한국교회에서는 교회가 우선순위라고들 얘기하겠지만, 흥미롭게도 루터는 이 세 가지에 우열을 매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가령 어떤 교회 장로님에게 주일날 회사에서 긴급한 일이 생겼다고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통은 장로가 어떻게 주일성수 안 하고 직장에 나가느냐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루터의 세 신분론 안에서는 직장에 가도 됩니다. 왜일까요? 세 삶의 자리, 세 신분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 우리를 던진 소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회 직업, 가족, 교회 셋 다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생각인 거죠. 하지만 살면서 이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옵니다. 인간이 마주하는 갈등과 선택의 상황인 거지요. 그때 용감하게 죄를 짓고 더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삶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얘깁니다.

농민전쟁에서 루터의 패착은 이 '세 삶의 자리'를 분리된 것으로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혈연 공동체와 사회 공동체, 영적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각자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농민들은 교회나 사회 공동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하고, 영주는 사회 안에 악의 세력을 막기 위해 질서를 지키며 통치하는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 루터의 시대였던 16세기와 현대 한국 사회와 교회가 마주한 역사적·교회적 정황이 비슷해 보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루터의 삶과 신학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루터는 교회를 꿈꾸며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말씀입니다. 루터는 교회를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표현하고, "말씀은 교회를 창조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복음의 피조물이며, 복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라고도 진술합니다. 그런데 중세 가톨릭은 성서가 교회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여기고 사도전승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더 크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인식을 뒤집기 위해 나온 말이 "오직 성경"입니다.

둘째, 사도권의 해체입니다. 루터는 당시로선 전혀 상상할 수 없던 목회자 청빙 제도를 도입합니다. 교회가 예수의 몸이라면 그 몸의 지체로 있는 자들은 모두 평등하고, 평등한 지체들은 예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합의해서 목회자를 세울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해임도 가능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언제든 해임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1523년에 최초로 개신교 목회자 청빙이 이루어집니다.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이라는 사람이 청빙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그를 청빙하면서 청빙위원회를 교회 대표, 대학교 대표, 시의회 대표 동수 삼자 구도로 구성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대표들은 목회자의 신앙을 검증하고, 대학 대표들은 지적 능력을 검증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의회 대표는 목회자의 사회적 인격을 검증합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이 모두 검증된 사람을 목회자로 청빙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지점은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신앙과 지적 능력은 교단과 대학을 통해 어느 정도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인격을 검증하는 측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상당수는 목사의 문제인데, 거의 모든 경우 '사회적 인격'이라는 지점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이 지점을 앞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의 목회자 청빙 제도 도입으로 인해 1523년 개신교 최초의 청빙 목회자가 된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셋째는 앞서 이야기한 만인사제론입니다. '교회는 말씀의 피조물이다', '교회 공동체가 목사를 청빙도 할 수 있고 해임도 할 수 있다', '모든 신자는 사제로 부름받았다'. 이것이 루터가 강조했고, 당시 교회에 충격을 주었던 개신교회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강조한 이 세 가지 생각이 500년이 흐른 현대 교회에서 너무도 퇴색했습니다. "오직 성경"이란 말은 남았지만 역사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지 않다 보니 무조건 성경 하나만 붙잡고 그것이 최고인 양 여기는 식으로 왜곡됐습니다. 교황과 사제들의 잘못된 권위를 해체하기 위해 목회자 청빙 제도를 도입했는데, 현대 교회에서 교황은 목회자 수만큼 늘어나 버렸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제가 되어 준다는 만인사제론의 본질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습니다. 500년 전 개혁의 대상이 중세 가톨릭이었다면 현재 개혁의 대상은 우리 자신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가 황제나 교황처럼 군림하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은, 500년 전 목숨 걸고 뛰쳐나온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 거리가 너무 멉니다. 엄밀히 말해 개신교회가 아닌 것이죠.

현대 개신교회가 개혁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 가지 삶의 자리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생태계, 지식 생태계, 시민사회 생태계가 그것입니다. 교회가 폐쇄적 순환 구조 속에 머물면 결국 썩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게토화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필연적으로 누구든지 함께 공존하고, 누구든지 살 힘을 제공받을 수 있는 거룩한 '성도의 사귐 공동체'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당연히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교회주의로 빠지면 위험합니다.

또한 교회는 지식 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도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것은 각 교회와 교파를 넘어서 누구나 함께 모이고 소통하며 배울 수 있는 장에 대한 문제입니다. 상호 배움을 통해 자기 모습을 돌아보고 발전적인 미래를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루터가 1529년에 아이와 여성들을 위해 <소교리문답>을 쓴 이후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독일에 보편 교육 방식의 학교 시스템이 시작됩니다. 루터는 더 이상 면죄부나 성물 숭배를 위해 돈을 쓰지 않게 된 영주들을 채근해 학교를 짓는 데 투자하게 합니다. 얼마 전 옥스퍼드대학에서 흥미로운 연구 논문이 하나 나왔습니다. 독일에서 여성의 대학 입학이 허용되기 시작한 해가 1908년인데, 이때 여성 입학자들의 출신지를 가톨릭 지역과 개신교(루터파) 지역으로 구분해서 살펴보니 개신교 지역 출신이 8배가 많았다고 합니다. 여성이 교육을 받으면 직업 선택의 기회가 늘고 사회 진출권이 보장됩니다. 그만큼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더 낼 수 있고 인권 문제 등에 관여할 여지가 생깁니다. 저는 루터가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루터에서 시작된 보편 교육으로 인해 사회의 수평적 소통이 원활해지고 현대 민주주의와 건전한 자본주의의 기초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원류를 따라 올라가며 루터에 대해 구시대적 신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한편 서구 자본주의 기초를 놓은 것은 칼뱅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한 지적이긴 하지만 루터가 보편 교육을 태동시킨 점, 그 교육적 성과가 서구 사회 질서에 영향을 미친 바를 베버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요즘 아카데미 형식의 모임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저는 이런 모임들을 교회가 후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교회는 시민사회 생태계의 한 부분을 책임져야 합니다. 교회는 외딴 섬이 아닙니다. 세상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민사회의 NGO 활동이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도 교회의 재정과 인력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을 적극 검토해야 합니다. 교회 재정의 1%도 좋고 2%도 좋으니 이런 일에 모든 교회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하나 더 언급하겠습니다. 종교개혁 역사에서 비판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려는 소통 노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종교개혁 신학을 논하면서 놓치는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개신교 교파 간에 행해지는 배타적인 교리 논쟁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한국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간의 관계 문제입니다. 우리는 서로 너무 모릅니다. 종교개혁 역사는 500년이 지났지만, 상대방에 대한 이해 수준은 여전히 500년 전 16세기에서 시계가 멈춰 버렸습니다. 그러니 서로 잘못된 신학 정보 아래서 관심도 없는 옛날이야기만 재탕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특히 신학자와 목사, 신부들은 더 심합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생각에 자기의 무지는 돌아보지 않고, 눈과 귀를 막고 저주의 공격만으로 500년을 살아온 게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서로를 알려고 노력하는 개방적인 생각과 통로들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분열이 아니라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최주훈 목사는 루터가 책상 위의 신학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목회자였다고 말한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독일개신교회연합(EKD)에서 학자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위한 진단과 전망'(Perspektiven für das Reformationsjubiläum 2017)이란 문서를 발표했다지요? 거기에 보면 계몽주의가 발전하여 교회 및 신앙과 긴장 관계에 서게 되었지만, 이는 적대적 대립이 아니라 생산적 갈등이 형성된 것이라고 나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계몽주의는 신본주의의 반대급부인 인본주의이자 기독교를 제거하고 타파하려고 한 사상이라는 이해가 큰 것 같습니다. 계몽주의 산물인 서구화된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이 종교개혁과 계몽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역사를 공부하면서 잘못된 태도 중 하나는 시대를 무 자르듯 단칼에 구분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절대 단절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후세 사람들이 시대의 특징을 말하기 위해 구분하는 단위일 뿐입니다.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는 연속성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시대를 구분하면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극과 극의 형태로 가르치는 것은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요약할 때 저는 이런 표현을 잘 사용합니다, 종교개혁이란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저항 및 소통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요. 어떤 시대, 어떤 교회건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종말의 때에 완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나온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 자리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구습에 저항해야 합니다. 또한 저항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비판의 초석이 되는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함께 나누는 소통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통의 결과 새로운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이 도식을 종교개혁 시대와 계몽주의 시대로 대입해 보면 연결된 공통분모가 드러납니다. 둘 다 생각하는 신앙, 즉 비판 정신이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이런 관점으로 EKD 문서를 읽어 내려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문서에서 핵심으로 삼고 있는 역사 이해는 3~5조에 잘 드러납니다.

03 종교개혁은 서방 교회의 해체를 촉진시켜 주도적인 교파들 간의 모순을 드러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통성을 형성시켜, 종교와 문화의 다양화 및 다원화라는 특징을 가진 유럽 사회를 이루게 하였다.

04 이러한 다양화는 종교적 대립에 폭력으로 반응하는 세상에서 (절대적인 변수는 아니지만) 다른 요소들과 더불어 현재까지 그 후예가 존재하는 교파들 사이에 종교전쟁 및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05 동시에 다원화를 향한 이러한 발전 속에 유럽은 분리되고 적대시된 교파들 간의 평화와 공존을 보장하기 위하여, 그리고 배타적으로 진리 주장을 하는 경우에도 관용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에 근거하도록 규정들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조약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조약은 '분리를 통한 평화'라는 구상을 통하여, 오랫동안 해결할 수 없었던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첫 발걸음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이루어진 계속된 발전은 교파와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사회의 평화를 위한 결정적인 조건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종교개혁은 서방 교회의 해체를 가져왔으며 다양한 교파로 나뉘게 했고(3조), 이 다양성은 교파 간 모순을 드러나게 해서 종교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는데(4조),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동시에 다양한 교파가 공존하기 위한 근거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5조). 그 예로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조약을 들고 있습니다. 그 조약 이래 서방교회는 다양성 위에서 배타성을 뛰어 넘는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이런 다양성 안에서 공존하는 법은 교회의 담을 넘어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고, 종교, 문화, 사회의 모든 분야에 이 정신이 스며들게 되었다는 식으로 EKD 문서는 해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관점은 한국 교회에도 아주 유용합니다. 배타적 진리를 주장하면서 교파 간 갈등을 유발하는 단계를 넘어서야 함을 지적합니다. 각자 특수성을 수용하며 다양성을 포괄해야만 함께 공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에는 독일 할레에서 신학자 80여 명이 94개 논제를 발표했다지요(이 문서는 지난해 <기독교사상> 10월 호에도 소개되었다)? 일부를 직접 번역하시기도 했는데 그중 초반부에 "이 시대 우리의 대적자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거기서 자유를 얻기 위해 태생한 다양한 교파와 운동들이 아니다. 우리의 대적자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적 구조이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기만의 의를 추구하며,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구조를 지지하는 것은 종교개혁자가 외친 '믿음을 통한 칭의' 정신에 위배된다. 개혁자가 외친 칭의는 오직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연대'(Solidarität)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선언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일 할레에서 발표된 94개 논제는 루터 칭의론에 대한 현대적 적용이라고 할 만합니다. 거기 붙은 부제는 '종교개혁의 급진화-성서적 근거와 세계의 위기'입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 선언이 아닙니다. 루터의 칭의론은 관계에 방점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과 개인, 개인과 이웃(공동체), 개인과 양심이라는 세 가지 관계입니다. 이것이 루터의 칭의론이 관심을 두는 기능입니다. 94개조 논제에서 칭의론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연대"라고 언급한 것은 이런 맥락에 충실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루터교회에서는 칭의론은 단어나 개념 교리로 강조하는 게 아니라 기능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현실의 맥락에서 재해석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6세기 당시 루터의 칭의론이 과녁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던 교회였습니다. 중세 말 교회는 하나님의 자리에 전통과 사제의 권위, 성물 숭배 같은 것을 올려놓았습니다. 루터는 그런 상황에서 칭의론을 전개합니다. 왜곡된 교회의 모습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고 저항한 것이죠. 종교 세계로 대변되는 중세 사회에선 그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1517년 면죄부를 반박하는 95개조 논제가 튀어나온 것이고, 교권주의의 최고봉이었던 교황을 탄핵하려고 시도했던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이란 글이 나왔고,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 같은 글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21세기로 눈을 돌리면, 여러 시급한 일도 있겠지만 그중에서 맘몬 숭배의 세계, 제국주의적 세계와 체계들은 신학자들이 경종을 울려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2014년 94개조 논제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루터의 칭의론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해 나갑니다. 여기에는 해방신학적 색깔이 분명합니다. 분배의 문제, 사회정의의 문제, 제국주의의 문제 같은 것들을 고전적인 교리 언어가 아닌 현대적 언어로 풀어놓습니다. 여기엔 '시대의 아들'이라는 한계가 분명했던 루터의 신학도 비판의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2014년 독일 할레에서 신학자 80여 명이 이 선언문에 동참한 후 이듬해인 2015년 1월 1일에 새롭게 서명한 영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신학자들이 100명 이상입니다. 이 문서에 동참하는 신학자들과 이 논제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논의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올해 5월 베를린에서 '교회의 날'(Kirchentag) 행사가 성대히 열리는데, 저는 그중에서도 전 세계 청년들이 이 문서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주목합니다. 이를 통해 종교개혁 정신이 가지고 있는 현실 비판 의식을 고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서를 만들게 된 배경이나 협력, 그리고 소통과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대목에 상당히 동의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이곳저곳에서 겉치레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충분히 경종이 되는 사례라고 할 만합니다. 우리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눌 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마지막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인 2017년,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루터를 이해하고 공부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요즘 좋은 책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겐 한스-마르틴 바르트의 <마르틴 루터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과 베른하르트 로제의 <마틴 루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을 위해선 쉽게 읽을 수 있는 <누구나 다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홍성사)와 헤르만 셀더하위스의 <루터, 루터를 말하다>(세움북스), 그리고 루터의 전반적인 교회 교리가 무엇인지 1차 자료를 읽기 원하시는 분들께는 곧 출간될 저의 책 <루터의 대교리문답>(복있는 사람)을 추천합니다.(끝)

* 이 인터뷰 기사 내용의 상당 부분은 앞서 언급한 청어람ARMC 강좌에 빚을 졌다. 강좌 영상은 추후 청어람ARMC 홈페이지에서 조건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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