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종교개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다. 흔히 가톨릭 사제였던 루터가 당시 횡행하던 면죄부 매매 행태에 화가 나 종교개혁을 단행했다고 알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말도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채교회에 '95개조 논제'를 붙인 1517년을 기준으로 한다.

한국교회는 루터를 종교개혁 500주년 아이콘으로 소비하고 있지만, 사실 루터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것은 아니다. 루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루터가 처했던 독일 사회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독일에서 루터 신학을 전공했고 현재 기독교한국루터회 중앙루터교회에서 목회하는 최주훈 목사는 루터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로 질문·소통·저항을 꼽았다. 최 목사는 2월 7일 청년들의 인문학 공동체 '청년학당 웰컴로고스'가 주최한 월례 강의에서 루터의 생애와 종교개혁 정신을 소개했다.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가 루터의 생애와 종교개혁 정신에 대해 설명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면죄부' 매매 시대
질문을 던지다

최주훈 목사는, 루터가 자기가 읽은 성서와 현실이 굉장히 다르다고 인식한 데서 질문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종교개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종교 권력을 쥐고 있던 가톨릭 교리를 알아야 한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면죄부를 사고파는 행위는, 개신교 교리에는 없는 '연옥'에서 시작된 것이라 말한다. '연옥'은 6세기 가톨릭에 등장했다. 가톨릭은 중세 시대부터 연옥 교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이 아닌 중간 지대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살면서 죄를 지은 가톨릭교인은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하면 그 죄가 사해진다. 죄를 용서받은 후에는 '보속'(補贖)이라 불리는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는 죗값을 치루는 행위다. 죄의 경중에 따라 보속 행위도 결정된다. 문제는 '모르고 지은 죄'다. 모르고 지은 죄를 사제에게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서 모르고 지은 죄가 있다면 천국에 직행하기 힘들다. 지옥에 가지는 않지만 잠시 머물면서 죄가 사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곳이 '연옥'이다."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작성한 1500년대 초에는 돈을 내면 연옥에 쌓여 있는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톨릭에서는 처음부터 '면죄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사해 준다는 '대사'(大赦)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6세기 독일에서 유행한 대사는 어떤 추악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는 전대사(全大赦)다. 루터가 공격한 것은 '천국 직행 티켓'이라 불린 전대사였다.

최주훈 목사는 루터가 단순히 신학적인 측면에서 면죄부를 비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비텐베르크시 교회에서 목회하던 루터는 면죄부를 사기 위해 목숨을 거는 교인들을 목격한다. 한겨울 면죄부를 구입하기 위해 살얼음이 언 강을 건너다 빠져 죽는 교인을 보며 왜 이렇게 우매한 일에 시민들이 매달리는지 고민했다. 고민 결과를 대학 사회에서 공론화하기 위해 선보인 게 '95개조 논제'다.

소통 막힌 중세 시대 
라틴어·독일어 동시 사용
종교계와 민중 아울러

최주훈 목사는 현실을 직시한 루터가 취한 다음 단계는 '소통'이라고 말한다. '95개조 논제'를 게시하면서 루터는 대중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최 목사는 95개조 중 가장 중요하면서 핵심적인 것은 단연 1조라고 말했다. 1조는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회개하라' 명하실 때, 그 회개는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는 내용이다.

"루터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마태복음 4장 17절 내용을 그대로 1조에 썼다. 이렇게 쓴 배경은 그동안 가톨릭에서 통용되는 라틴어 성서에 이 구절이 잘못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타 성서에는 이 구절을 '보속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썼다. 죗값을 치루라는 것인데 에라스뮈스가 작성한 헬라어 성서에는 '메타노이아', 회개하라고 쓰여 있었다. 돈을 주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최주훈 목사는 루터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로 질문·소통·저항을 꼽았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최주훈 목사는 당시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학자 에라스뮈스(Erasmus)도 있었는데도 루터가 더 주목받았던 이유를 '소통'에서 찾았다. 16세기 가톨릭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라틴어였다. 성서는 물론 미사 집전도 라틴어로 해야 했다. 루터는 신학 박사면서 가톨릭 사제였지만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학자들에게는 라틴어로, 독일 민중에게는 독일어를 쓴 것이 루터의 강점이었다.

루터가 취한 소통 방법 가운데 가장 파급력이 컸던 것은 역시 성서번역이다. 루터는 1522년 '9월 성서'로 불리는 독일어 신약성서를 출판한다. 초판은 3,000부였으나 같은 해 12월 제2판이 나왔다. 이후 살아 있는 동안 10만 부 이상 인쇄했다.

최주훈 목사는, 루터의 '성서 속어화' 즉 지역 언어로 바꾸는 작업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동안 교회 전유물이었던 성서를 일반인에게 돌려줬다. 성직자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하나님 말씀을 일반 신자들도 성서 원리에 따라 질문하고 토론할 수 있게 됐다.

'소통 공동체'
종교개혁 정신 잇다

1520년 로마 가톨릭은 루터에게 파문 교서를 내린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루터를 따르는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바로 '저항하는 자들'이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루터를 따르는 놈들'이라는 뜻의 루터란(Lutheran)이다.

최주훈 목사는 이후 루터를 따르는 교회들은 사회와 소통하면서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 갔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비텐베르크시 마리아교회 목사 청빙 과정이다. 개신교 첫 청빙 목사인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은 교회 청빙위원회 심사를 거쳐 이 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이때 청빙위원회는 교회 신자, 대학 교수, 시의회 의원들로 구성됐다. 신앙적으로 모범을 보이고, 교육을 받아 지성적이며, 사회적으로 인격이 보장되는 사람을 뽑기 위해 다양한 인사들로 위원회를 꾸린 것이다.

개신교 초기 헌금 시스템을 봐도 루터가 추구하던 종교개혁은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당시 교회는 공동 금고를 마련하고 있었다. 공동 금고의 용도는 세 가지였다. 시민 중 갑작스레 위급한 일이 생긴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노인이 죽거나 은퇴 목사를 위해 사용했다. 금고를 열기 위해서는 열쇠 세 개가 있어야 한다. 각각 교회 목사, 시의회 대표, 평신도 대표가 맡았다.

최주훈 목사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교회와 교리에 국한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루터교를 국교로 채택한 북유럽 국가들을 예로 들며 이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정치 청렴도와 탄탄한 사회복지 기반은 오랜 신학적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 목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어 버린 개신교의 현재 모습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루터에 관심 있는 30여 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청년학당 웰컴로고스가 여는 '루터, 500 시공간 너머'는 2월 14일 한국YMCA전국연맹 빌딩에서 한 차례 더 열린다. 두 번째 강의는 루터가 한국교회를 보면 무엇이라 말할지,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제언을 최주훈 목사가 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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