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미국의 목사', '복음주의 대부'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의 장례식이 3월 2일(현지 시각) 그의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엄수됐다. 99세 일기로 2월 21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몬트리트 자택에서 별세한 그의 시신은 빌리그레이엄도서관에 안치됐다가 2월 28일~3월 1일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명예 조문을 받은 후 다시 샬럿으로 돌아왔다.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한 전·현직 미국 대통령이 그를 조문했으며, 미국 주요 매체들은 그의 장례를 연일 보도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작은 도시 샬럿에서 1918년 태어나 한평생 복음 전도자로 살았던 그의 삶은 명암이 깊다.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목사'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2억 명에게 직접 설교했으며, 위성·라디오 방송으로 메시지를 들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22억 명이 넘는다고 전해진다. 복음주의 부흥을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지만, 미국 보수 우파와의 긴밀한 관계로 정교 유착 비판을 받았으며, 복음을 단순화해 개신교를 지나친 성장주의로 나아가게 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1939년 남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43년 휘튼대학교를 졸업한 후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대 미국 기독교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분리주의·반지성주의적 태도로 고립을 자처하는 근본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보다 열린 태도로 기독교를 알리겠다는 신복음주의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신복음주의 운동은 대중화를 위한 아이콘이 필요했고 빌리 그레이엄은 맞춤한 인물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일반 시민 중 4번째로 국회의사당에서 조문을 받았다.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 홈페이지 갈무리

빌리 그레이엄은 1949년 로스앤젤레스 집회를 통해 스타 부흥사로 떠올랐다. 1950년부터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를 창설해, 이후 20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얼굴로서 전 세계에서 부흥 집회를 열었다. 한국에서는 1952년을 시작으로 꾸준히 집회를 이끌었다. 1973년 여의도 집회에는 110만 명이 몰렸다.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복음주의의 중요한 기치를 담은 로잔언약을 결의한 1974년 제1차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를 존 스토트와 함께 이끌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서 열었던 대형 집회는 한국교회 양적 성장의 도화선이 됐다. 그 과정에서 반공적 메시지를 설파하고 개인 영혼 구원에만 집중해 한국교회가 역사와 사회문제에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지난 세기, 세계 복음주의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이 크다. 빌리 그레이엄 별세를 맞아, <뉴스앤조이>는 그의 삶과 유산을 조명하는 대담을 진행했다.

드류대학교에서 미국 복음주의 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기독연구원느헤미야에서 가르치는 배덕만 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 복음주의 운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IVF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 활동 중인 이강일 소장이 대담에 참여했다.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 2월 28일 진행한 대담을 정리했다.

이강일 소장(왼쪽)과 배덕만 교수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빌리 그레이엄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목사'로 평가받는다. 그를 만들게 한 사회적‧교회사적 배경이 있을 듯하다.

배덕만 /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처럼 국내외를 다니며 집회를 통해 전도하는 것은 18세기부터 영미권에 있었던 독특한 전통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설교 능력과 매니지먼트 능력이 뛰어났고, 이것이 사회적 배경과 만나면서 빛을 봤다. '빌리 그레이엄 현상' 배경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20세기 통신 기술과 운송 수단의 혁명이다. 빌리 그레이엄이 18세기에 태어났으면 아메리카 대륙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비행기가 만들어져서 오대양 육대주를 다닐 수 있었다. 인공위성으로 방송을 중계하는 혜택도 받았다.

둘째, '미국'의 출현이다. 20세기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전 세계에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최강국이 된다. 특별히 유럽을 포함한 서구 사회가 '마셜 플랜'(Marshall Plan: 2차 대전 이후 서유럽 국가들을 향한 미국의 원조 계획 – 기자 주) 안에 들어가면서 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된다. 미국의 정치‧경제적 우월성이 빌리 그레이엄에게 무게를 실어 줬다. 각국에서 그를 함부로 대접할 수 없었다.

셋째, 미국 정치권의 관계다. 이전 전도자들과 큰 차별점은 빌리 그레이엄이 미국 대통령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미국과 미국 바깥에서 활동한 그에게 프리미엄을 줬다.

이강일 / 1920~1930년대 미국 근본주의가 외부적으로 강한 비판을 받고 내부적으로 결속하는 시기에 빌리 그레이엄의 신앙이 형성됐다. 근본주의로 만족할 수 없었던 복음주의 그룹이 근본주의에서 이탈하려는 흐름 가운데 세상에 복음을 전할 스피커가 필요했는데, 정확히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 본인 캐릭터와 사회적 환경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복음주의의 거대한 조류를 타고 선두에서 나아간 상징적 인물이다.

- 빌리 그레이엄을 흔히들 '미국의 목사'라고 표현한다. 그가 특별히 미국 대통령들에게 영향을 줬던 이유가 있다면.

이강일 / 빌리 그레이엄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주의를 응징하고 남한 기독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로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성공적으로 전도 집회를 하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복음 전파의 소명도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30대부터 편지를 써서 최고 권력자에게 충고하려는 태도를 보여 줬다. 그래서 트루먼 대통령과는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만났을 때 20분간 대화하면서 당돌하게 충고까지 했는데, 기자회견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 다 이야기해 버렸다. 이후 다시는 트루먼이 부르지 않았다.

그 후 빌리 그레이엄은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1890~1969)가 대통령감이라는 것을 알고 장군 시절 미리 접촉해서 친분을 쌓았다. 미국의 영적 흐름을 안내하고, 미국민에게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운 좋게 1년 안에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됐고, 취임 며칠 전 불러서 취임식에 쓸 성경 구절을 알려 달라고 자문을 구했다. 갑자기 일종의 국사가 된 것이다. 대담하고 재간이 좋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미국 기독교는 재흥하고 있었다. 앞장서 움직이는 복음 전도자와 함께하려는 마음이 미국 대통령에게 있었을 테니, 이해관계가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배덕만 / 정치권에 접근한 것이 개인 역량이기도 했고, 시기적으로도 맞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냉전으로 들어가던 시점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중요한 메시지가 두 개였다. 하나는 복음, 하나는 반공주의. 매카시즘 이후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은 어떻게든 반공을 축으로 세계를 재편하려고 정책을 폈다. 이에 대한 종교적 버전을 뛰어난 웅변력으로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빌리 그레이엄이었다. 정책자들에게 좋은 파트너로 보였다. 그는 인생 후반기에 에큐메니컬적으로 넓어지지만, 이 시기에는 정부와 밀월 관계였다.

- 일부 학자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전후로 빌리 그레이엄이 정치권에 대해 말을 아꼈다고 평가한다. 그 인생을 보면, 시기별로 정치 참여에 대한 입장이 달라지는 것 같은데.

배덕만 / 마크 놀(Mark Noll, 1946~)은, 빌리 그레이엄이 닉슨(Richard Nixon, 1913~1994)에게 충성했던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정치 참여에 상당히 신중해졌다고 지적한다. 한국으로 치면, 4‧19를 겪으면서 이후 상당수가 자유당 정권을 다시 생각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기본 입장이 변했다기보다, 닉슨과 함께 망신당하면서 자기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삼가게 됐다. 마크 놀은 빌리 그레이엄이 나이를 먹으면서 성숙해진 몇 가지 영역 중 하나가 정치권에 대한 태도였다고 말한다. 정치권과 친밀감을 보인다거나 반공 메시지를 집회 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이 줄었다.

이강일 / 워터게이트 사건이 1972년이고, 로잔언약이 1974년이다.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를 균형 있게 해야 한다는 로잔언약의 입장에 빌리 그레이엄이 허용적 태도를 보인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무한한 자신감이 있었고 기세가 상당했기에, 보수적 어젠다를 들고 1966년 독일 베를린 세계 전도 대회를 이끌었다. 이때는 우파적 미국식 복음 전도 방식에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전도 집회를 더 확장하려고 영국 등 전 세계 국가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1974년 로잔 대회까지 열었는데, 존 스토트가 로잔 대회에서 논의한 다양한 의견을 중재하도록 놓아두고 로잔언약 메시지가 다소 왼쪽으로 가는 것에 전향적 태도를 취했다.

- 빌리 그레이엄을 이야기할 때 1974년 로잔 대회에 대한 내용이 비중 있게 언급된다. 존 스토트와 더불어 빌리 그레이엄도 로잔언약을 이끌어 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빌리 그레이엄이 로잔언약에 얼마나 기여했으며, 이것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나.

배덕만 / 에큐메니컬 운동, WCC(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위기의식과 반작용으로 빌리 그레이엄이 움직였다. 시대가 에큐메니컬적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완전 무시할 수 없었고, 복음주의권에서 책임적 반응을 보여야 하니까 로잔 대회를 연 것이다. 이 대회는 복음 전도, 사회참여라는 형태로 귀결한다. 농도와 방식 차이에서 갈등은 있었겠으나 사회참여에 빌리 그레이엄의 뜻이 아주 없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빌리 그레이엄도 초창기부터 제한적이었지만 인종 문제나 빈곤 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진보 진영에서 볼 때는 매우 유약한 발언이다. 이후 복음주의권이 계속 분화하는데, 기독교 극우 진영에서 급진적으로 정치 참여를 시작했고 복음주의 좌파 쪽에서는 에큐메니컬에 가까운 의식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빌리 그레이엄식 주류 복음주의자는 양쪽 사이에서 몸을 사리거나 제한적 행보를 했지만, 그것이 동인이 되어 자신들 입장을 사회에 적극 구현하는 운동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도 1974년이 유신 직후 긴급조치 시대였기에, 교회가 사회참여를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일어났다. 그 이후부터는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참여가 복음주의권에서 중요한 이슈가 됐다. 로잔 대회에서 결의한 로잔언약이 복음주의가 사회참여로 진행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강일 / 로잔 대회는 펠로우십 성격을 갖는다. '현재 우리 마음이 그렇다' 정도를 표현하는 것이기에 법적 구속력이 없다. 다만 처음으로 사회참여 문제에 성경적 배경에서 신뢰할 만한 복음주의권 스피커들이 동의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복음주의 세계에 사회참여 문제를 던져 놓은 것은, 후대에 사회참여에 관심 있는 기독교인의 주장에 대한 근거와 배경으로 자리한다. 이것을 기준으로 무엇을 하라는 압력은 없다. 상징적 방향성을 알려 주는 정도다.

당시는 로잔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WCC 측에서 개종을 목표로 하는 전통적 선교 중단을 의미하는 선교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제안한 것에 반대하고 전통적 해외 선교를 지키려는 의도가 컸다. 사회참여는 남미의 진보 복음주의자들이 제안한 것인데, 존 스토트가 그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합의를 이끌어 내 문서를 만든 것이다. 참가자들이 "사회참여를 결의하자"고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해외 선교를 지속할 것이다', '사회참여에도 관심 있다'는 정도로 당시 참가자들은 이해했다고 한다.

빌리 그레이엄은 재정 대부분을 본인이 부담했고, 로잔 대회에서 사회참여까지 천명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했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이를 허용했다.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

배덕만 교수는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빌리 그레이엄이 인종 문제나 빈곤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해 왔다고 언급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빌리 그레이엄은 근본주의 계열에서도 평이 갈린다. 한국교회언론회에서는 빌리 그레이엄이 별세하자 '한국의 은인'이라고 논평을 냈다. 하지만 다른 근본주의 계열에서는 그가 교황 등과 타협했다며 비난한다. 찬양 일색과 원색적 비난. 빌리 그레이엄에 대한 상반된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배덕만 /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100년을 살았다. 그의 100년이 정확하게 미국의 근대사, 20세기를 커버한다. 1920년대 나타난 근본주의 토양에서 자랐다가 밥존스대학교와 휘튼대학교 등을 거쳤다. 그가 라이징 스타로 주목받은 것은 1949년부터였다. 내전이 첨예화했고 핵전쟁 위협이 있었다. 이 시점에 그는 반공 메시지를 전한다. 1970년 이후 중국‧일본‧미국의 관계가 열리면서 데탕트 시대를 맞았고 1980년대 후반에는 동유럽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탈냉전으로 간다.

빌리 그레이엄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복음주의자'다. 신학자도, 이데올로기 신봉자도 아니었다. 1954년, 1957년 뉴욕에 집회를 열며 근본주의자들과 결별하면서 복음 전도자라고 항변했다. 베트남전쟁 때 융단폭격하는 것에 반대해 달라고 요청받았을 때도 "나는 복음 전도자이지 예언자가 아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전할 수만 있다면 다른 모든 부분은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면, 어떤 사람과도 가까워질 수 있다"고 얘기했던 사람이다. 정치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유연했다.

보통 사람은 진영 논리로 봤을 때 복음주의자‧근본주의자‧자유주의자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는데, 빌리 그레이엄은 이 스펙트럼에 잡히지 않는다. 부분 부분만 놓고 좋아할 가능성은 있지만, 진영 논리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모든 진영에서 욕을 먹을 수 있다. 시기적으로도 초창기·중년기·말년기의 빌리 그레이엄 모습이 다르다. 사람들은 각주구검刻舟求劍하면서 판단할 수 있는데, 그는 세월에 따라 자기 변모를 했기 때문에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

이강일 / 그의 복음 전도 구원론은 전통 신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단순할 뿐더러 이를 변경할 만한 신학자도 아니다. 아주 깔끔하게 축약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했다. 그 메시지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괘념치 않았던 사람이었다고 본다. 그가 자기 생애를 회고하는 것을 보면, 트루먼에서 김일성까지, 반공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까지 아주 다양한 세계 권력자들과 만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부분에서는 본받을 만한 지점도 있고, 어떤 점에서는 한국 개신교에 남길 만한 교훈이 아닌가 싶다.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그 다음 단계로 둘 수 있는 태도 말이다.

- 빌리 그레이엄은 '복음주의의 대부'라고 불린다. 그가 대변했던 미국 복음주의가 차후에 어떻게 되리라고 보나.

이강일 / '미국 복음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먼저 언급할 게 있다. '미국 복음주의'라는 말에는 보수주의·복음주의·근본주의가 하나로 묶여 있다. 이 시선으로 빌리 그레이엄을 보면 조금 헷갈릴 수 있다. 빌리 그레이엄을 비롯한 1940년대 이후 복음주의자는 탈근본주의를 지향했다. 근본주의 신학은 공유했을지라도, 태도는 개방적이었던 것이다. 비근본주의에 대한 공연한 분노가 없고 개방적으로 행동하겠다는 것이 이들 초기 신복음주의자의 태도다.

오늘 우리 인식에서는 근본주의와 구분되지 않는다. 용어 사용이 난처하다. 그래서 "미국 복음주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질문하면, "미국 근본주의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들린다. 이미 그렇게 섞여 버린 것이 답답한 현실이다. 북미에서는 1960년대 당시 복음주의를 빌리 그레이엄을 기준으로 구분했다는 말이 있다. 빌리 그레이엄을 좋아하면 복음주의, 싫어하면 비복음주의. 미국 복음주의자는 빌리 그레이엄을 사랑스러운 지도자로 느끼는 듯하다.

배덕만 / 1970년대부터 미국 복음주의는 분화했다. 복음주의권 내부에서 정치 이슈, 목회 방식, 이념적 지향에 따라 균열이 상당히 다양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베트남전쟁, 1970년대 이후 기독교 우파 진영이 공화당과 배타적 관계를 맺으면서 정치권에 들어갔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근본적 성향이 강했는데, 미국 정치권 문제를 다룰 때 이념적 지향이 같으면 진보 기독교가 아닌 타 종교, 비개신교권과 연대했다. 유대교와 가톨릭 보수주의자와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신학적 근본주의보다 정치적 근본주의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도 근본주의자와 신학적으로는 대립각을 세웠는데, 현실적으로 같은 목소리를 냈다.

신앙 논리에 근거해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가 나뉘고, 자유주의와 대립하던 시대는 무너졌다. 정치적 입장, 생존 전략에 의해 새로운 합종연횡이 가능한 시대가 됐다. 예전에는 복음주의자가 신학적으로 정밀하게 복음주의를 정의하고 자기 규정하려 했는데, 1970년대에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복음주의를 하나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음주의는 정치·경제·종교 문제에 있어서 앞으로 더 빠르고 다양하게 분화할 것이다.

복음주의가 일관한 길에서 벗어나 분화하는 형태로 지류를 형성하게 하는 첫 문을 빌리 그레이엄이 열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오럴 로버츠(Oral Roberts, 1918~2009),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1930~), 한경직, 김장환, 조용기와 친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1929~1968), 심지어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하고도 친했다고 한다. 빌리 그레이엄이 진영을 다 흩뜨려 놓았다.(웃음) "우리는 다 친구야"라고 해 버리니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복음주의가 다른 쪽에 영향을 주고, 다른 쪽에서 복음주의에 영향을 주는 등 울타리가 무너졌다.

- 빌리 그레이엄이 한국에 끼친 영향이 크다. 1952년부터 꾸준히 와서 설교했고, 1973년에는 그의 집회에 110만 명이 모이기도 했다. 빌리 그레이엄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토양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배덕만 /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반도가 나뉘고 세계 체제가 양분할 때, 남한은 미국에 편입됐다. 소련과 중국이 바로 옆에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생존하려면 미국과 절대적 동맹 관계에 있어야 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역사를 보면 두 국가는 접점이 많지 않아 연결할 끈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승만과 기독교가 중요했다. 이때 미국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연결 고리가 빌리 그레이엄이었다.

당시 빌리 그레이엄이 전한 반공적 메시지와 정치권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양국에 적절한 특사였다. 한국에 한 번 올 때마다 미국적 생각‧정신‧문화가 한국에 이식됐고, 한국 사람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며 미국은 '한반도는 확실하게 반공과 기독교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은 미국과 아주 다른 문화와 종교적·정치적 상황에 있었는데도, 빌리 그레이엄이 전한 1950~1970년대의 미국적 기독교 메시지는 한국교회 규범이 돼 버렸다. 집회에는 많이 모여야 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설교자가 있어야 한다. 그를 벤치마킹해서 복제하는 식으로 온 결과, 한국교회도 미국 기독교처럼 돈·권력·섹스에 넘어지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이 대통령 옆에서 '카운슬러'로서 현실적 이득을 얻고 정교 유착했던 모습을 따라 수많은 목사가 정치권과 긴장 관계를 갖고 감당해야 할 예언자적 사명을 저버렸다.

이강일 / 빌리 그레이엄은 근본주의보다 열린 태도를 보여 주는 신복음주의의 스피커였다. 반면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기독교 풍토는 교단별 색채가 강한 근본주의였다. 세계적 조류를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 초기 선교사들이 보여 준 19세기 복음적 역동성에 대한 기억도 없었다. 한국 기독교 문화는 경직돼 있었다. 근본주의 토양에서 신복음주의 스피커에게 이야기를 듣는 뭔가 어긋난 상황이었는데, 당대 교계 및 정권 등과 이해관계가 맞으니까 문제가 없었다.

1973년 여의도 집회 현장 사진.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 홈페이지 갈무리

- 그의 삶에서 1973년 여의도 집회는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집회에 군사정권이 이례적으로 협력했다고 들었다. 통금을 해제하고 집회를 돕는 데 군대를 보냈다고. 이 집회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배덕만 / 한국 근대사로 봐도 기독교 정교 유착의 대표적 케이스가 1973년도 일이다. 1972년에 유신 개헌이 있었다. 1973년, 1974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일체의 발언이 금지됐다. 유신에 대해 발언하면 영장 없이 체포됐으니까.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지명했고 한국 민주화가 가장 많이 강철 군화에 짓밟혔다. 언론 통제로 박정희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가려져 있을 때, 여의도광장에 100만 명 넘게 모였고, 국가가 돈과 군대를 동원해 주도적으로 집회를 도왔다.

통금이 해제되고, 특별 버스가 운영됐다. 공영방송이 중계했으며, 공병대와 육군 군악대가 집회를 도왔다. 한국이 민주화됐고 종교적 자유가 있다고 선전한 것이다. 이는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사람들 시야를 종교로 돌려 비민주적 공안 통치에 눈감게 했다. 을사늑약, 정미칠조약, 한일 강제 병합으로 가는 시점에 1907년 평양 부흥 운동, 1909년 100만 인 구령 운동이 있다. 그 자체로 나쁜 의도가 있는 운동은 아니지만, 그 시절 한국교회는 역사 문제에 철저히 침묵하고 무관심했다. 교회를 탈역사‧탈민족화했다. 1973년 집회도 그때와 판박이다. 이것이 1984년까지 이어졌다.

이강일 / 예수를 알려 준 것은 그 자체로 귀한 일이라고 본다.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분들 중 다수가 당시 빌리 그레이엄 집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복음에, 시대의 불의한 권력에 순종하게 만드는 메시지가 섞여 있었다. 양가감정이 든다. 당시 집회는 박정희 정권이 미국에게 보여 주는 일종의 시위였다. "우리는 기독교 지지한다. 버리지 마라"는.

빌리 그레이엄이 참여한 1973년, 1974년 대회(EXPLO74)는 한국교회 성장의 방아쇠였다. 이후 급격한 교회 성장이 일어난다. 풀러신학교에서 시작한 교회성장학을 김선도, 조용기 같은 한국의 몇몇 선진적 목사가 능동적으로 수용한 상황이었다. 당시 밀려들던 교인을 받아 낼 수 있었던 교회는 메가 처치가 됐다.

- 빌리 그레이엄은 스캔들이 없었고, 개인 윤리적으로 깨끗했다고 평가받는다. 비판받을 지점도 있지만 인정할 만한 부분도 크다고 본다. 빌리 그레이엄의 빛과 그림자와 그가 한국교회에 남긴 유산을 압축해서 이야기한다면.

배덕만 / 그의 사회적 입장, 신학적 해석에는 진영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이구동성으로 빌리 그레이엄의 인격적 청정성을 놀라운 점으로 꼽는다. 1980년대 미국 기독교계를 보면 짐 베이커(Jim Bakker, 1940~), 지미 스와가트(Jimmy Swaggart, 1935~) 등이 섹스 스캔들, 배임 및 횡령으로 다 날아간다. 이것이 복음주의가 슬럼프에 빠지는 원인이 됐다.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는 1년 예산만 해도 큰 기업체에 비교할 만하고 직원도 수백 명인데, 한 번도 재정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 돈과 스캔들의 유혹이 있는 슈퍼스타 위치에서 문제없이 지낸 것이다. 마크 놀은 이를 두고 프로야구 선수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3할대를 친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그와 같은 반열을 향해 달리다 미끄러진 수많은 사람을 보면, 그의 가치가 더욱 두드러진다.

빌리 그레이엄은 근본주의 배경에서 자랐다. 진화론의 발전, 과학기술의 발전, 세속적 사회학의 발전 등이 기독교에 강한 반작용을 불러왔을 때, 미국 근본주의의 일차적 반응은 분리주의와 반지성주의였는데, 빌리 그레이엄의 신복음주의 출현은 이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학자가 아니었지만 지적 책임을 중요시했고, 성경과 신학이 시대 문제에 반응해야 한다고 봤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를 만들고 신학자 칼 헨리(Carl Henny, 1913~2003)를 데려왔으며, 휘튼대학교 등에서 복음주의 신학이 발전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학자연하지 않고 평생 학자를 존중했다. 자기 진영에 필요하지만 자신이 못 갖추고 있는 부분을 인정하고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해석에 따라 장점이나 단점이 되는 면이 많다. 시대가 낳았고, 시대를 잘 활용했던 대표적 케이스다. 시대적 한계와 미국의 입장을 인정하더라도 초창기 냉전 시대에 반공주의를 드러낸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와 메시지는, 냉전 시대에 미국의 진영을 양분화하고 경화했고 특별히 한국 사회에 반공이 뿌리 깊게 내재화하고 군부독재가 반민주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남용된 측면이 있다.

그는 개인 영혼 구원, 내세 구원을 강조했다. 예수만 믿으면 만병통치가 되는 듯한 단순한 복음 메시지를 전했다. 미국 사회의 이념 문제와 인종 문제, 베트남전쟁에 엮여 있는 갈등 등에 예수 믿고 기도하면 세상 문제가 해결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다 보니, 복음주의가 현실 문제를 외면하거나 무책임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예수와 하나님이 정말 얘기하고 싶은 것은 배제한 채 예수 십자가 보혈로 내가 해결받는다는 점만 부각한 것이다.

대중에게 단순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대단한 장점이지만, 신학적·실존적 통찰이 상당히 얕다. 성경에서 예수가 전하려 했던 것, 하나님이 나를 통해 만들고 싶은 세상이 있는데, 이에 대한 메시지는 없다. 거기에 자본주의와 반공주의가 결합하니까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반공주의를 내재화하고 예수를 수단시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예수를 통해 내면의 죄는 씻겨지고 이 세상에서는 자본주의자와 반공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이명박, 나아가 안태근을 낳았고,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 문제를 만들었다. 냉철한 자성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

이강일 소장은 복음을 반성 없이 요약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강일 / 예수가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전달됐다는 사실 자체는 감사한 일이다. 파문을 일으켜 내가 대학 시절 복음을 전달받기까지 영향을 준 사람 아닌가. 그러나 그가 전한 복음에 섞여 있는 다른 요소를 분리하기까지 나름대로 대가를 치렀다. 복음에 반공이나 시대의 패권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DNA를 붙이는 것을 용인한 점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왜 대형 집회를 강조했는가.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맹목적 신념 하나를 '성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고 본다. 성장과 복음을 붙여 버린 점도 있다.

빌리 그레이엄은 순수 복음을 전하려 했는지 모르지만, 그 메시지는 이미 반공과 성장주의 같은 시대정신과 섞여 있었다. 실제 한국교회도 복음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복음 전파의 방식은 다채로워야 하고, 복음 자체에 대해서도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빌리 그레이엄의 복음을 받아 사회·경제·정치권으로 나간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자의 행보를 보라. 얼마나 세상을 닮아 있는지.

복음은 아무 반성 없이 요약하고 대량 보급해서는 안 된다. 예수도 시대에 대한 성찰이 굉장히 깊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요약된 복음을 전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과도한 기대가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체를 활용해 때와 장소나 상황과 상관없이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좋다. 하지만 복음의 내용은 각고의 노력과 성찰, 반성을 거듭한 뒤에야 비로소 정리할 수 있다. 원래 복음이 단순하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전도자는 복음을 응축해야 하지만, 많은 반성과 해석이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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