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미 출간한 지 20년 넘은 서적에 대해 글을 쓴 것은 '미래'라는 단어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의 미래가 복음주의에 있다는 맥그래스가 말하는 저 미래에 현재 우리가 있고, 지금이 맥그래스가 예견한 미래의 너머인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현재 세계 기독교의 추이나 이 가운데 복음주의 운동 현주소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는 필자가 무지하여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 기독교 내 복음주의 상황은 그렇다. 맥그래스가 그렸던 대로 우리는 복음주의 황금기를 한 번 맞이했다. 한국교회의 지난 사반세기는 낙관적 미래를 꿈꾸는 많은 이의 헌신이 돋보였고, 그리스도교 교인들 숫자가 교파 종파 구분 없이 1000만을 앞두고 있다며 자신했던 시기였다. 성서한국을 비롯해 많은 교회 연합 운동, 대학 캠퍼스 선교 단체들의 약진, 많은 지교회의 양적 성장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황금기를 추억하고 있는 만큼 다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가나안 신자라는 말이 등장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고, 각각의 교회가 이전처럼 연합 운동을 전개하기에는 많이 지쳐 보인다. 세대는 사회 분위기를 강하게 반영하듯 극단적으로 분리돼 있다. 맥그래스가 걱정했던 19세기 말 유럽이 미래 너머의 오늘 우리에게 재림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견 타당했음을 인정하면서 복음주의에 종말을 선고해야 하는가. 지금은 시대가 변하여 더 이상 복음주의가 그 자체로 적실하지 않다는 평가를 내려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IVP) 재출간은 하나의 운동에 대한 종말 선고를 앞두고 우리가 하는 마지막 검토이자 이후 우리의 방향성에 대한 검토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IVP 펴냄 / 288쪽 / 1만 4000원. 사진 출처 IVP

2. 그렇다면 한번 살펴보자.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저자는 복음주의를 "여섯 가지 지배적 확신"에 기초한 신앙 운동이라고 묘사한다(2장). 여섯 가지 확신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성경이 갖는 최고의 권위 2)예수 그리스도 3)성령의 주 되심 4)인격적 회심의 필요성 5)개별 그리스도인과 교회 전체의 복음 전도의 우선성 6)영적 양육, 친교, 성장을 위한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

물론 이 6가지의 확신은 복음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특정 그리스도교적 전통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를테면 16세기 종교개혁, 17세기 이후의 경건주의, 18세기 청교도 운동, 20세기 신복음주의 운동(다양한 운동에 대한 포용 정신)이다(1장). 그래서 맥그래스는 이 확신들을 '복음 전도/선포에 대한 일차적 관심', '개인의 회심 경험과 신앙 체험', '영성/경건'과 '지적 엄밀성 추구'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예를 들어, 맥그래스는 성령의 주 되심이라는 확신을 개인의 신앙 체험 관점에서 은사주의 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복음주의는 이런 점에서 나름의 매력이 있다(3장). 그것은 1)정통성(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론과 삼위일체론 등 역사적 교리에 대한 헌신) 2)합리성 3)복음 자체의 매력에 대한 강조 4)교파적 독선의 방지다. 맥그래스는 이 점에서 복음주의가 다양한 종류의 운동으로 확장되며 큰 양적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고 본다(4장).

물론 양적 성장만이 복음주의 운동의 특징은 아니다. 그는 영적/지적/전인적 삶의 질적 향상과 이에 대한 추구 또한 복음주의가 갖고 있는 유산이며 본 운동의 근본적 의지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5장). 이 운동의 '그늘', 곧 약점도 존재한다(6장). 이미 한국교회가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는 1)죄의식에 대한 강조와 탈진 2)구원에 대한 확신의 문제가 가져오는 독단주의 3)특정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의한 개인숭배 등이다.

맥그래스는 저 약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그럼에도 기독교의 미래는 복음주의에 달려 있으며, 낙관적 미래를 예견한다(7장). 에큐메니컬 복음주의라는 공적 영역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한 흐름을 제시하면서, 그는 복음주의가 로마 가톨릭이나 자유주의에 비해 그 범위나 영향력 면에서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압도해 나가고 있다고 보며, 비록 '복음주의적 합리주의의 등장'이 나름 위협이 되나 대안들(복음 전도 강조와 목회적 실천, 신앙 체험의 강조)을 제시하며 어느 정도 긍정적인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3.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나 맥그라스가 복음주의의 약점으로 제시하는 부분이다. 그가 이 운동의 약점을 솔직하게 제시하고 약점에 대한 대안을 잊지 않고 덧붙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약점으로 제시하는 부분이 내 눈에는 강점에 대한 강력한 어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체적 측면에서 보자면, 저자는 1)양적, 수적 확장이 가져오는 정체성의 문제(4장) 2)영성의 메마름과 황폐화(5장) 그리고 전반적인 그늘(6장) 곧 3)죄의식과 탈진 4)복음적 독단주의 5)카리스마를 가진 개인숭배 6)공적 영역에의 참여(7장)를 복음주의가 처한 위기와 문제로 제시한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복음주의가 1)정체성 문제가 발생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양적, 수적 확장을 하고 있으며 2)영성 측면이 문제가 될 정도로 지성주의를 강력히 추구하되 3)우리 자신의 완전한 타락을 탈진할 때까지 붙드는 겸손한 운동이라는 게 된다. 또한 복음주의는 4)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에 대한 열정적 확신과 변호의 태도를 지니며, 이와 관련하여 5)개인의 신앙적 체험의 다양성과 양육적 차원에서의 특정한 카리스마적 개인들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개방적 운동이며, 그렇다고 다소 개인적 신앙 운동이라기보다 6) 적 영역에의 활발한 참여의 방향성 또한 소유한 공동체적 운동이라는 말이다.

4. 그러나 맥그래스가 제시하는 복음주의 운동은 적어도 사상적 측면에서 작금의 주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점으로 대두되는 '개인주의', '성장/성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의 개인주의적 특성의 대표적 측면은 구원관과 교회관의 철저한 분리와 위계 설정이다. 맥그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주의는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특정 교단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참된 복음을 믿으면 될 뿐이다. (중략) 구원받음의 기준은 그 사람이 어느 교회나 단체에 출석하는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그가 복음을 듣고 복음에 반응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중략) 어떤 문제로 자신이 속한 교단에 실망해 교단을 바꾸기로 결심한 브라질의 한 복음주의 신자의 가족도 생각해보자.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복음주의 교회와 공동체 사이에서 여러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들은 복음주의를 포기하지 않고도 복음주의라는 넓은 영역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닐 수 있다. 상대적으로 중요할 뿐인 문제(목회자의 인격을 포함한)들에 대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복음주의다(133~134쪽).

맥그래스가 말하는 복음주의는 구원과 교회를 철저히 분리한다. 구원은 개인의 인격적 만남 영역이고, 교회는 여기서 대개 회심 이후의 신앙의 롤모델(카리스마적 목회자), 목회적 서비스, 자녀의 신앙적 양육과 친교의 도구로 존재한다(97쪽). 복음주의는 특정 교회나 교회 질서를 갖지 않으며 비교파적이라는 특징을 지니는데(99쪽, 133쪽), 그렇기에 사실 복음주의는 개교회나 특정 교파 전통을 부차적으로 본다.

회심이든 성화든,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은 애초에 구원받은 개인이 구원받은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공동체적 사건 아닌가. 내가 회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길을 돌이키는 것, 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회심 아닌가. 개인의 회심이나 신앙의 인격적 체험에 비해 교회 공동체를 부차적으로 설정하는 태도는 타자를 동일한 인간으로서, 또한 그 자체 타자로서 정당하게 대우하는 사상인가. 그렇기에 소위 개인적 회심 중심 구원관과 이와 분리된 부차적 교회관은 굉장히 우려스럽다.

5. 복음주의의 성과주의적 특성을 볼 수 있는 대표적 측면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용인하고 지지하는 일련의 태도와 성장을 성공과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이 측면은 정말 뼈아프다. 개인의 영적 체험과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용인은 개인에 대한 기존의 공동체나 교파의 통제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과 자유와 다양성에 대한 맥그라스의 선호 때문에 그는 이것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요소라고 본다(132~133쪽).

물론 그는 '복음주의의 그늘' 장에서 동일한 측면을 '개인의 우상화'라는 주제로 살피고 있으며, 이 점에서 이것을 나름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83~89쪽). 하지만 문제 해결에 대한 낙관적 인식(193~194쪽)과 대안으로 제시하는 '만인제사장 교리에 대한 이해'를 볼 때 과연 그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그는 왜곡된 사제직에 대한 공동체적/민주주의적 비판이라 할 수 있는 만인제사장설을 다분히 루터적 시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199~202쪽). 그렇기에 그가 이해하는 만인제사장 교리는 위계는 없다고 하지만 기능과 역할의 차이를 보존한다. 그러나 기능과 역할의 차이는 위계의 차이를 함축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충분한 검토 없이 루터적 시각의 만인제사장설을 "죄의 잠재력을 억제할 수 있는 지혜"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맹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맥그래스의 카리스마적 개인에 대한 관대함이 성장과 성공을 동일시하는 그의 관점과 짝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맥그래스가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복음주의의 확장과 성장의 대목을 보여 줄 때 사용하는 전거로서의 수/양적 지표에 대해 그는 어떠한 주의나 경계도 하지 않는다(118~119쪽). 이러한 태도는 빌 하이벨스 목사의 윌로우크릭교회에 대한 평가(120~121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6. 이런 비판보다 더욱 중요한 지점은 복음주의의 모순적인 위계적 태도와 차이, 다양성에 대한 피상적 시선이다. 예를 들어, 맥그래스는 복음주의 운동의 분리/분파주의적 전략이나 반대주의에 대한 문제에 주목한다(30~41쪽), 그리고 그는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내세우면서 부차적인 문제에는 포용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복음주의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이 부차적 문제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그의 복음주의는 비록 같은 복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더라도, "낙태 문제와 관련한 임신중절"이나 "동성애"에 대해 전혀 포용적이지 않다(156쪽). 이것은 자유주의와 가톨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가톨릭에 대한 그의 반감(156~157쪽)과 부정적 이해는 과연 이 책에 교과서적 역할을 부여해도 될지 의심을 일으킬 정도다. 그렇기에 나는 복음주의가 정말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제외한 문제를 부차적으로 취급하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복음 전도 외 나머지 문제를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위계적 태도 자체도 문제다. 우리는 이런 태도가 과연 정당한 태도인지 반드시 물어야 한다. 후기-세속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태도는 결국 차이와 다양성을 겉핥기로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회의 다양한 사역에서 복음 전도는 항상 우선성과 우위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교회 내 다른 모든 활동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기보다는 저 우선적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정치든 친교든 도덕적 태도든 교회 내 모든 것이 수단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하거나 복음 전도와 가치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교회 내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 개신교회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문제를 대할 때면, 언제나 일단 부차적 문제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포용적 복음주의자들도 노동운동이나 성적 지향의 다양성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사안들은 부차적인가. 누군가의 삶을 인도하는 정체성이 걸린 이 사안을 부차적으로 취급해도 좋은 것인가. 그렇게 부차적으로 취급하는 태도가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며 타자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인가. 이 태도는 진정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신념으로 삼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정당한 태도인가.

7. 차이와 다양성에 대해 강력한 지지와 타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하고 있는 현재의 후기 세속화 시대에 이런 난점은 아무리 복음주의 운동의 장점을 고려하더라도 이 운동의 지속적인 추구를 머뭇거리게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적어도 맥그래스가 주장하는 복음주의 형태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쇄신할 수 있는 것일까. 복음주의는 차이와 다양성을 근본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복음주의는 구원 중심적 태도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복음주의는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것을 여전히 복음주의라 부를 수 있는지, 꼭 그렇게 불러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본 서평은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의 수요독서회에서 이루어진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 대한 토론의 도움에 힘입어 작성됐다. 독서회의 열띤 토론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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