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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운동 이어받은 민주화 운동과 양동교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목포 양동교회
  • 이근복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05.04 17:37

목포로 가던 4월 29일 오전 8시, 용산역 대합실에서 TV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와 창성동 주민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다가 울컥하였습니다. 평화와 통일의 부푼 꿈에 기차 차창으로 보이는 신록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에서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이 매년 역사 인문 기행을 하는데, 이번에는 목포였습니다. 민주화 운동과 촛불 혁명이 남북 정상회담을 추동했다는 점에서 시기와 장소가 잘 맞았습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중략)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은, 남도 곡창지인 나주평야 쌀을 수탈하고 일본 공산품을 보급하기 위해 목포를 개항한 일제로부터 억압당했고 이후에도 계속 소외당했던 목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부용산'이라는 노래도 많이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 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2절)

문화해설사를 따라가니 목포여자고등학교 교정에 '부용산 노래비'가 있었습니다. 박기동 선생이 누이동생과 제자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애달파 시를 지었는데,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음악교사 안성현 선생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안 선생이 한국전쟁 중 월북하여 공훈예술가가 되는 바람에 '부용산'이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빨치산 노래였다는 이야기는 와전이고, 가수 안치환도 부른 '부용산' 2절 가사는 2000년, 52년 만에 박기동 시인이 호주에서 보내왔답니다. 일본 관서대학 영문과를 나온 박 시인은 지식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시대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문학 청년의 길을 걸었습니다. '부용산'을 쓴 좌경 인물이란 이유로 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아 수차례 가택수색으로 시작 노트를 압수당하자 시인은, 1993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답니다.

이튿날 아침, 세월호가 누워 있는 목포신항으로 갔습니다. 어제 해설사가 목포를 "'목' 놓아 우는 사람을 '포'근히 감싸는 곳"이라고 풀었듯이, 목포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세월호를 품고 함께 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어지는 마음을 아는지 세월호는 뿌연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포 양동교회. 이근복 그림

이번 기행에서 등록 문화재 제114호 양동교회가 돋보였습니다.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직접 날라 온 응회암으로 축조한 아름다운 석조 건축물입니다. 양동교회는 목포가 개항하던 1898년,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오웬 선교사는 프렌치병원을, 스트래퍼 선교사는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양림교회는 호남 선교의 산파역을 하며, 목포 지역 신문화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견인하는 구심체였습니다.

1909년에 부임한 6대 윤식명 목사는 호남 지역 첫 한국인 위임목사로서 자립하고 교회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가난한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하여 1911년에 완공한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예배당에 1929년 1000명이 출석하였습니다. 당시 5000명에 불과했던 목포 인구 1/5이 출석한 것입니다.

제8대 이경필 목사와 교인들은 목포 3·1 혁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민족 교육의 결과는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1919년 4월 8일에 일어난 만세 시위에서 드러났습니다. 계속된 시위로 200여 명이 검거되고 담임목사 등 100여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1926년 부임한 박연세 목사는 일본과 천황을 비판하는 설교를 한 혐의로 체포되어 목포경찰서에 수감되었습니다. 1년 형을 확정받고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 중 모진 고문 끝에 1944년 2월 두 눈을 부릅뜬 채 동사하였습니다.

이남규 목사는 일제의 기독교 탄압 정책에 맞서 교우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으로 선출되자 교회를 떠났고, 나중에 초대 전라남도지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공직을 마치고 다시 겸허히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돌아왔기에, 그는 민족을 목회한 '목민牧民목회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석조 예배당의 남성들이 출입하던 좌측 문 석재 아치에 '대한융희사력大韓隆熙四年'이란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가 있고 중앙에 태극기 문양이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에서 어떻게 태극 문양이 보전되었을까, 등나무 넝쿨이 일본 경찰의 눈을 가린 것입니다. 여성들이 출입하던 우측 문 아치에는 '쥬 강생 일천구백십 년'(주후 1910년)이라는 한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현재 양동교회를 시무하는 최병기 목사 안내로 들어간 1층에는 오래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지금도 사용하는 2층 예배당은 108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온전하였습니다. 2017년 선교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태국의 가난한 동네에 세웠다며 최 목사님이 보여 준 교회는 참 소박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제11차 역사 인문 기행에서 목포 지역 민주화 운동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남도의 민족해방운동을 선도한 목포답게 1970~1980년대에 활발하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는데요. 교인들은 물론 목회자들까지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한 까닭에 교회의 위상이 높았다고 합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이를 지지하기 위해 많은 시위를 하였고 탄압도 심했습니다. 지금은 광주 성광교회를 섬기는 박상규 목사는 목포대학교 2학년 때,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항거를 이끌다 계엄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기행 끝 무렵에 간 곳은 '안철 선생 안집비'이었습니다. 1970~1980년대 기독교장로회 교회 청년운동을 세우고 목포의 민주화 운동,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안철 장로가 운영하며 수없이 대책 회의를 했던 집 앞에 작은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5월에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아름다운 역사를 되새기며 현재를 성찰하고 평화와 통일을 길에 적극 나서길 소망합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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