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유영 기자]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은 4월 24일 오후 무거운 마음으로 상황실에 앉아 있었다. 선사와 외교부의 수색 상황 보고에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망망대해에서 실종된 가족을 찾아야 하는데,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어 더 힘겹다.

삼등기관사 문원준 씨 아버지 문국원 집사(가명)는 답답할 때면 창가에 선다. 상황실 창가에 서서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아들에게 보낸 카카오톡 창에 있는 숫자 1이 없어지기를 기대하며.

"우리 원준이가 지난해에는 호주를 오가는 화물선을 탔어요. 신조선(새 선박)이라 위성 통신도 잘 됐어요. 그래서 매일 카톡으로 성경 말씀을 보내 주었지요. 그럼 원준이는 고맙다며, 어떻게 지내는지 답하곤 했어요.

아들은 이번 출항에서 스텔라데이지호에 처음 탑승했습니다. 오래된 배라 기관사 업무로 많이 힘들었어요. 일이 많아 보름 만에 답이 오기도 했지요. 엔진 냉각기 고장 수리 등 노후 선박 기관사로 지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설명하기도 했어요. 지금도 그때처럼 카톡 숫자가 없어지면 좋겠어요."

문 집사는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 다른 가족이 모두 힘들어하는데, 본인마저 힘든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견딜 수 있고 기다림에 지치지 않을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기다림, 문 집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시간이 고통스럽다.

삼등기관사 문원준 씨 부친 문 집사는 언제 끝날지 모를 기다림이 고통스럽다. 뉴스앤조이 현선

책임과 성실 강조하던 아들
"다른 사람 먼저 섬기던 인물"

힘든 시간에도 아들 이야기를 할 때면 문 집사 입에는 미소가 번진다. 특히 원준 씨가 한국해양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이야기할 때는 자랑이 넘쳤다. 책임감 강한 아들이 든든했고 대견했다. 해양대에서 해사인(바다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한국해양대로 진학한 원준 씨가 2학년이 되면서 학생회 간부로 활동한다고 했을 때, 문 집사는 놀랐다. 원준 씨가 아버지에게 한 이야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성실'과 '책임감'이 해사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요. 원준이도 성실과 책임감을 더 기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학생회에 들어가 간부로 지내며 필요한 덕목을 기르겠다고 하더군요. 기특했습니다. 스스로 사명감을 불어넣고,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가 고마웠지요.

사실 원준이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얘기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그럼에도 교육차장, 명예사관장 직책으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자신이 학교에서 훈련 받으면서 가장 싫었던 전통처럼 이어진 악습과 필요 없는 규칙 등을 바꾸려 했어요. 후배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지도하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삼등기관사 문원준 씨. 실종자 가족 제공

원준 씨는 말로만 덕목을 기르려고 하지 않았다. 성실히 책임을 다하려 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학교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에 신경을 많이 썼다. 자신이 장학금을 받으면 학우들을 후원했다. 해양대는 졸업할 무렵 같은 기수 학생들이 장학금을 모금해 후배들에게 준다. 후배들은 어려운 상황과 장학금이 필요한 이유 등을 써서 선배들에게 보내고, 이들 중 2명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학생회 간부였던 원준 씨는 몇 명이라도 더 장학금을 받기 바랐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학생들 이야기를 정리해서 원준이가 엄마에게 보냈습니다. 장학금을 더 주고 싶다고 하면서요. 친척들과 교회, 지인들에게 알려서 모금해 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모금해서 보내 주었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 원준이 후배가 연락했어요. 자기가 당시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라고 하면서요. 원준이가 후배와 식사하고 셔츠를 한 장 가져왔더군요. 정말 힘든 상황이었는데 진정 고맙다며, 후배가 보답하고 싶어 첫 월급을 받고 셔츠를 한 장 사왔다고 하더군요."

사고 소식을 들은 다른 원준 씨 후배들도 문 집사에게 연락해 온다. 문 집사는 해양대 학생들의 격려가 고맙다. 후배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에서 희망을 찾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이 몸과 머리에 매뉴얼로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그렇게 훈련받았다."

해양대 학생들은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해양 사고를 대비해 훈련받는다. 학생회 간부는 훈련을 받으면서 다른 학생들을 훈련한다. 문 집사와 학교 후배들 모두 제대로 훈련받은 원준 씨가 분명히 탈출해 구명벌에 탑승했으리라 믿는다.

"아들이 사랑한 회사에
배반당한 기분"

원준 씨는 한국해양대를 졸업하고 폴라리스쉬핑에 입사했다. 그가 다른 대형 해운 회사를 뒤로하고 폴라리스쉬핑에 입사한 이유는 간단했다. 족벌 경영하지 않는 회사, 해양대 선후배 사이인 김완중·한희승 두 회장의 오랜 우정과 공동 경영에서 희망을 보았다. 나이가 들면 폴라리스쉬핑 같은 회사를 친구들과 일구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은 회사를 많이 자랑스러워했어요. 다른 회사처럼 가족 중심으로 운영하지 않고, 실력 없는 사람들이 연줄로 승진하는 회사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지요. 그토록 원준이가 아끼던 선사의 실종자 수색 노력이 더 섭섭하고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역설이라고 해야 하나. 원준이가 졸업하던 2016년, 선사 한희승 회장이 해양대 총동문회 회장에 취임했어요. 졸업생 대표로 연설한 원준이와 나란히 앉았어요. 그날 원준이는 세월호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오랫동안 세월호 사고를 기억했으면 한다.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무책임하게 회피하거나 봐주기 대응을 하지 않는 용기와 힘을 기르고 늘 약자 편에 서서 생각하고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따뜻한 해양대 68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어요. 원준이가 강조했던 이야기를 직접 들은 회장이 운영하는 회사가, 사건 초기부터 안일하게 대응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졸업생 대표로 답사하는 원준 씨.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이야기하며 해사인의 책임감을 강조했다. 실종자 가족 제공

문 집사는 초기 대응만 아니라 선사가 30년 가까이 된 노후 선박을 사용한다는 사실에도 분노했다. 선원 생명이 달린 문제인데, 낡은 선박으로 안일하게 경영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원준 씨가 스텔라데이지호를 타기 전 부모에게 처음으로 배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 순간부터 든 생각이다.

"처음 타는 선박이라 앞서 탑승했던 선원에게 배 상태를 물었나 봐요. 기관사니까 선박 관리를 위해 먼저 탔던 선원에게 확인한 것이지요. 그랬더니 비가 샌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배에 물이 샌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물이 새는 것을 손으로 막고 시멘트로 바른 적도 있고, 어떤 날은 몸으로 물이 새는 것을 막고 시멘트를 발랐다고도 했어요."

이야기를 들고 가족은 크게 걱정했다. 스텔라데이지호를 꼭 타야 하는지 물었다. 원준 씨는 "기관사로 더 성장하고 배우기 위해 지원했다. 신조선은 기관 고장 등이 없어 일이 많지 않다. 앞으로 어떤 배든 타야 하니 배우는 기회로 삼겠다. 나중에 실력도 없는데 높은 자리 차지하고, 책임감 없이 권세만 부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옳지 않을 일이다"라고 답했다.

걱정하는 가족을 위해 쉽게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스텔라데이지호 같은 화물선은 축구장 3배 정도 크기의 대형 선박이다. 문제가 생겨 침수로 침몰해도 1~3시간 정도 걸려 선원 모두 탈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스텔라데이지호는 이번에 5분 만에 침몰했다. 가족은 이 점이 의아하다. 어떤 이유로 배가 침몰했는지 확인할 길은 아직 없다. 이 사실을 밝혀 줄 선원들은 어디서 표류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아들의 밝은 웃음을 다시 보고 싶다. 오늘도 이 마음으로, 26세 젊은 아들을 기다린다. 실종자 가족 제공

"실종자 모두 돌아올 때까지
선사 더 책임 있는 모습 보여야"

"뱃사람은 어떤 사고가 나도 한 식구다. 함께 살고, 함께 고생하는 게 우리 배 타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다."

문 집사는 아들이 한 말을 선사 임원들에게 다시 들려주고 싶다. 원준 씨가 평소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회사가 더 적극적으로 수색에 임해 주기를 바란다. 24세 젊은이도 아는 이야기에 회장이 듣고 느끼는 사실이 있기를 기대하며 회사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텔라데이지호에는 200억 원 정도의 화물이 실렸다고 추정됩니다. '똥배'(노후 선박)에 그 많은 화물을 싣고 나른 건 옳지 않습니다. 심지어 2012년 광양항에 접안하다가 사고가 났던 배 아닙니까. 당시에 선체에 구멍이 생겼고, 중국에 가서 1달 동안 수리했습니다. 더 관리를 했어야 합니다. 수색은 물론이고 다른 부분에도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노후 선박 운영을 재고해야 합니다. 선원의 생명을 담보로 선사가 운영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문 집사를 포함한 가족들은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도 실종자들이 가족 품으로 모두 돌아오길 고대한다. 문 집사는 실종자 수색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국민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애타는 심정을 이해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한국교회에 부탁했다.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이 감정은 무슨 말로도 형언할 수 없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내 삶은 여기서 멈추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흘러가지 않아요. 혹시 다쳤더라도 부모 품으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제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데, 원준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들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보다 천국에 늦게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들이 꼭 살아 돌아온다고 믿습니다."

다른 실종자 가족 앞에서 울지 않는다던 문 집사는 말을 마치며 눈물을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창으로 걸어간 그는 아들에게 보낸 카톡을 확인하려고 다시 스마트폰을 꺼냈다.

문 집사는 인터뷰 마지막 말을 마치며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 뉴스앤조이 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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