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고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루터 연재 1-2: 비텐베르크의 마녀재판

종교개혁의 중심지인 비텐베르크(Wittenberg)는 중세의 잔재가 제거된 신(新)인류의 도시였을까?

꼭 그렇진 않다.

'95개조 논제'로 유명한 비텐베르크는 명실공히 종교개혁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이다. 루터가 교수와 목사로서 활동하던 주 무대가 이곳이고,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이 '개신교적 절차'에 따라 최초의 담임목사로 청빙된 도시(1523), 개신교적 교리에 따라 양형 성찬이 시행된 도시, 자국어 예배와 회중 찬송(Coral)이 시작된 곳이 바로 비텐베르크다.

역사가 그렇다 보니, 비텐베르크는 중세가 품고 있던 미신적 색깔을 몽땅 제거한 '계몽된 도시'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다. 다른 도시와 달리 이곳은 종교개혁 정신이 잘 스며든 스펀지 같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중세의 미신적 흔적은 여전히 감지된다. 심지어 루터가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 있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루터의 엄마와 옆집 아줌마 이야기(1-1)에서 중세 시대에 흔히 말하는 '신실한 신앙'이 어떤 종류였는지 살펴보았다. 거기서 언급되었던 '유령의 숲'은 그리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비텐베르크는 도시라곤 하지만 구시가지 크기는 우리네 '동'의 크기보다 작다. 이곳 중심부엔 너른 광장이 펼쳐진 시청이 자리 잡고 있는데, 1540년 6월 29일 비텐베르크로 들어가 보자. 그날 시청사 광장에선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프리스타 프뤼보틴(Prista Frühbottin)이라는 늙은 여인과 아들, 그 외 두 남자가 가죽이 벗겨진 채 나무에 달려 화형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옆엔 시민들이 구경하러 나와 있었고, 그 가운데서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 J.)는 화폭에 그 장면을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었다(아래 그림 참조). 루터가 그 광장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사건을 몰랐을 리 없다.

Lukas Cranach der Jüngere - Jörg Haustein, Martin Luthers Stellung zum Zauber- und Hexenwesen, Stuttgart 1990, 187.

크라나흐의 회고에 따르면, 프뤼보틴은 50이 넘은 할머니였다(당시 평균수명이 45세 이하였다). 죄목은 가뭄과 폭염을 만들고, 대지에 독약을 뿌려 풀이 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바로 '마녀'라는 것이다.

1540년 비텐베르크는 500년 만에 처음 경험할 정도의 기록적인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물 부족 현상에 대지는 타들어 가고, 그나마 있던 물도 오염되어 식중독이 심각했다. 그때 해결책을 찾지 못한 시의회는 가뭄과 폭염의 이유를 마녀에게 돌려놓은 것이다. 그리고는 당시 타지방에서 이주해 온 프뤼보틴의 가족과 사형집행인으로 있던 사람들을 마녀 집안으로 지목해서 화형에 처하게 된다. 이때 도망갔던 사람들은 끝내 붙잡혀 다른 지역에서 처형당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이 발생한 1540년부터 1674년까지 비텐베르크에서 마녀재판에 최소 21명이 기소되었고, 그 중 8명이 사형, 나머지 13명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 기록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녀재판에 기소되어 사형대 위에 섰을 것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Monika Lücke, Dietrich Lücke: Ihrer Zauberei halber verbrannt. 2011, 126; Uwe Schirmer: Die Hinrichtung einer Zauberin. In: Erich Donnert (Hrsg.): Europa in der Frühen Neuzeit. Band 7. 2008, 138).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이야 천재지변이나 이상기후의 문제를 자연과학적 원인에서 찾는 게 당연하지만, 16세기엔 그런 지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후나 천재지변의 일들은 모두 '흑마녀'의 일로 치부했고 그 때문에 마녀재판을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비단 비텐베르크만 유별났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 독일 도처에서 마녀사냥이 성행했던 이유 역시 이런 배경이 있다. 종교적으로 더욱 열정이 강한 도시일수록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그 때문에 무고하게 피해를 보았던 부류 중 하나가 바로 재세례파 진영의 사람들이다.

이것이 중세인들의 보편적인 세계 이해였고, 루터의 가족이나 종교개혁의 중심지도 역시 이 세계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루터의 신학에서 마귀가 도처에서 등장하고 미신적인 문구들이 튀어나오고 중세 신분제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한 뉘앙스가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루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시대의 아들'이다. 그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시대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보고 걸어 나갈 수 있었기에 '개혁자'로 불린다.

역사적 맥락의 이해 없이 21세기의 눈으로 16세기를 칼질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런 칼질은 마치 초등학생에 갓 입학한 학생에게 미적분을 왜 못하냐고 윽박지르는 것과 같다.

역사는 천천히 흘러갔고, 사람들도 유령의 숲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고 대지의 빛을 서서히 보게 되었다. 역사는 단절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연속이다. 종교개혁의 역사와 루터도 이런 배경 가운데 이해해야 한다.

참고로, 독일에선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이 되는 2017년을 10년 전부터 준비하며 새로운 미래를 도모하고 있다. 그 과제 중 하나가 역사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참회다. 이 정신에 따라 2013년 10월 30일 비텐베르크 시의회는 16세기 당시 마녀재판 기록들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마녀사냥으로 죽은 모든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이란 이렇듯 역사적 과제 수행을 통해 다시는 이런 아픔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평화와 공존의 미래가 열리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그냥 물음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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