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삶의 문제가 아닐까? 도덕성은 곧 우리의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교회는 기도 생활, 말씀 묵상, 성령 충만한 삶, 전도와 제자 훈련, 예배를 얼마나 강조하는가? 우리의 문제는 이런 영성이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행위 문제라고 하면 누가 온전하다고 하겠는가? 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다. 정도의 문제이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그들보다 낫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그들보다 떨어질 때가 많다. 우리의 행위가 그들보다 떨어질 때, 사람들은 실망하고 신뢰하지 않게 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도 결국 행위가 문제가 되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

이사야 1장 11-13절에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린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렇다.

이런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 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알 수 있다. 하나님께 부지런히 제물을 바쳤다.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들을 열심히 지켰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열심히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고 주일, 수요일, 새벽 기도 등 모든 집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하나님께 부담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14절). 너희가 드리는 예배와 헌물이 내가 지기에 너무나 힘들다. 그러니 그만 가져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이 드리는 분향을 '가증히' 여긴다고 하신다. '가증스러운 것'(토에바)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자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인들에게 사용된 단어이다(레 18:22; 20:13; 신 7:26). 무엇이 이들의 종교 생활을 하나님께 무거운 짐, 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가?

하나님은 이들에게 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손을 펴서 도움을 요청해도 눈을 가리고 응답하지 않겠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15절)고 말씀하신다. 이들의 기도에 대해 전혀 응답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귀를 닫아 버리는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과 예배 행위를 지긋지긋하게 여기시는지 그 이유를 중간중간 말씀하신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절)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은 곧 행위의 문제였다. '악한 행실'이 문제였다. 하나님은 이들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악행 대신 선행과 정의를 행하라고 요청하신다. 정의란 17절에 나오듯이 사회적인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와 같은 힘없는 자들의 소송을 공정하게 하라는 말이다.

예루살렘은 한때 정의와 공의의 도성이었으나 이 당시에는 악을 행하는 살인자들이 우글거리는 도성이 되었고, 예루살렘 권력자들은 도둑들이었고 뇌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소송이 공정하게 행해지지 않았다(21절). 이들의 행위가 바로 문제였다.

잘못된 행위는 우리의 종교 생활 자체를 무효화한다는 사실을 이사야 1장은 분명하게 가르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제물과 절기 준수가 의미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가 부패한 상태에서는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나 예배도 하나님께 무거운 짐만 지워 드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일부 종교개혁 후예들의 오해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타락한 로마 가톨릭의 행위구원론을 깨뜨리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면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개신교에서는 귀가 따갑도록 가르친다. 이를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많은 개신교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지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오해한다. 이런 오해에 큰 함정이 숨어 있다.

이런 오해는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루터가 종교개혁 할 당시에도 나타났던 문제이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행위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이런 오해가 오늘날 구원파 이단이 갖고 있는 구원관과 일치하는 견해이다. 루터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나중에 깨닫고 성도의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여전히 루터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던 오해를 종종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니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언제라도 이런 오해에 빠지기 쉽다. 이런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항상 야고보서를 함께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는 항상 "율법의 행위"와 대조를 이룬다(롬 3:20-22, 28; 갈 2:16; 3:2, 5). 많은 본문에서 "믿음"과 "행위"를 대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을 대조하고 있다(롬 3:27; 9:32; 11:6).

바울 당시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점이다. 이것이 이들의 함정이었다. 십계명을 온전히 지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 이들의 문제점이었다.1) 이들은 십계명을 주신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이를 지켜서 구원을 얻도록 주신 것이 아니다. 십계명은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성경은 미워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한다(요일 3:15). 지금까지 살면서 전혀 미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과연 십계명을 이런 관점에서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십계명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것이다. 여기서 율법의 제2, 3의 용도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십계명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십자가로 달려가 죄 용서 받도록 주신 것이다. 그리고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주신 것이다.

그런데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율법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이룬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게 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이들에게 필요 없게 된다.

이와 똑같은 함정에 빠졌던 종교가 중세의 가톨릭이었다. 이들은 믿음 외에 행위도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행위가 온전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에 답을 할 수 없다. 이 고민이 중세의 루터가 했던 고민이다. 자신의 행위를 생각할 때 도저히 구원 얻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회개 기도하고 고행을 했던 것이다. 나중에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필자가 종종 행위구원론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 드는 실례가 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자신의 피를 조금 더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과 똑같다. 나의 죄를 씻는 것은 100%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은 것이지 만약 내 피가 1%라도 들어 있다면 내 핏속에 들어간 원죄 때문에 나의 죄는 씻을 수 없다. 오직 100%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이 곧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내 행위를 1%라도 의지하게 되면 구원의 실격자가 된다. 그 행위는 나의 구원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는 중요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답은 야고보서에서 가르쳐준다. 먼저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것)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점을 오해하지 말라.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선행'을 의미한다. 야고보서의 '선행'은 믿는 자이면 반드시 나타나야 할 열매이다. 이 열매가 없으면 그 믿음은 가짜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여기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율법의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선행이 없다면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역설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진정한 믿음의 증거임을 알 수 있다.

1) 샌더스(E. P. Sanders)가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를 주장한 이후에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고 주장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이는 편향된 주장이라고 본다. 샌더스가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행위구원론과 관련된 자료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면 쿰란공동체에서 하박국 2장 4절을 주석하면서 "의인"을 "율법을 행하는 자"(doer of the Law)라고 해석하고 있다. 샌더스는 왜 이런 자료는 보지 못하는가?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증표

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아브라함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상당히 충격적이다. 언뜻 보면 어떻게 성경에서 이렇게 대조된 주장을 하고 있는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먼저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말씀을 함께 보자.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1-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으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1-24)

로마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친숙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설다. 분명코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행위를 믿음의 관점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그가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독자 이삭을 제단을 바쳤을 것이라는 논리이다(참고, 롬 4:18-22).

그런데 야고보는 이삭을 바친 것을 행위의 관점에서 본다. 아브라함의 이 행동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진짜 믿음으로 입증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약 2:24).

이런 관점에서 믿음을 보게 되면 야고보가 주장하고 있듯이 이런 순종하는 행함 없이는 절대 그런 믿음은 진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절대 구원을 줄 수 없는 가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서 2장 24절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쉽게 바울과 야고보의 믿음관을 요약하면, 바울이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항상 순종이 포함된 진짜 믿음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런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는 순종의 행위가 포함된 믿음이 있고, 순종의 행위가 빠진 가짜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야고보가 공격하는 믿음은 바로 두 번째의 가짜 믿음을 두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라는 말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바울과 야고보를 대조해서 설명한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이 대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야고보가 공격하고 있는 가짜 믿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행위구원론자는 개신교인 중에는 극히 드물 것이다. 오늘날 문제점은 우리가 믿노라고 고백하지만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삶 때문에 세상의 지탄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는 선행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증표이다. 나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인가? 진정한 믿음이라면 분명히 선행의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선행은 살아 있는 예배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의 몸으로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 앞에 "영적 예배"로 드려진다는 사실을 밝힌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를 드릴 때, 제물을 잡아서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제물의 몸을 각을 뜬 후에 번제단 위에서 살랐다. 바울은 바로 이 동일한 이미지를 우리 몸에 적용하고 있다. 번제물로 드려진 제물의 몸처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렇게 산 제물로 드려진 우리의 몸은 하나님 앞에 영적 예배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을 분간할 수 있겠는가? 그 답이 이어서 나온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롬12:2)함을 통해서이다. 우리의 몸으로 하는 행위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릴까 생각해 보면 우리의 행동 지침이 나온다. 성경은 우리가 성도로서 합당히 행해야 할 바를 이미 수없이 가르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다음 덕성의 요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기대하는 분야를 뽑은 것이다. 사랑, 긍휼, 정의, 정직, 경건, 겸손, 온유, 섬김, 충성, 정절, 인내, 절제, 화목, 양선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덕성의 항목들이다. 이를 실천하면 선행의 기본 훈련이 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철저히 연구하면 우리의 선행의 지침이 나오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십계명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오늘날 성도의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십계명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닌가? 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는 성경이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정의 실천의 영역이다. 요즈음 외국인 노동자들과 새터민과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선행을 실천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예배당에 갇힌 신앙 중심에서 삶의 예배 중심으로

이사야 1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이들은 종교 생활에는 열심이었지만 그들의 일상의 행위가 문제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인들 문제점이 이들과 같이 예배당 안에 갇힌 신앙 중심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교회 집회는 주일, 수요일,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도 부지런히 다니지만 세상 속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그렇다고 교인들의 신앙적 열정 자체를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더 문제가 심각한 그룹은 교회에 다니지만 성경도 전혀 읽지 않고, 개인적인 기도 생활도 전혀 없고, 제자도에 대한 헌신도 전혀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귀중한 진리는 행위에 문제가 생기면 종교 생활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삶이 없는 신앙을 하나님은 우상숭배나 동성애와 같은 '가증한' 행위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런 종교 생활이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겠는가? 오늘날도 이 진리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우리에게 말씀을 행하는 모습이 없다면 우리의 종교의식은 하나님 앞에 무의미한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부담스럽고 가증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배에 앞서서 우리의 말씀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 일상의 선행이 우선되어야 주일에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다. 예배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 6일간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다가 주일에 우리의 삶을 함께 묶어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예배가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성도들이 정말 힘써야 할 분야는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삶의 개혁에 있다고 본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다. 다음 항목들을 점검하면서 자기 개혁을 위해 함께 힘써 보자.

* 주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나는 정말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수님이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은 자기희생을 통해 표현된다.
* 어려움에 처한 자를 볼 때 마음속으로부터 긍휼히 여기는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어떻게 삶에서 나타나는가?
* 나는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가? 가족, 교인, 친구, 이웃, 직장 동료 등.
* 나의 생각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나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거룩한 생각으로 훈련할 수 있겠는가?
* 나는 어떤 사건을 접할 때 나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가, 아니면 일의 정의로운 해결을 먼저 생각하는가?
* 나는 금전 문제나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정직한가?
* 나의 언행은 경건한가?
* 나에게 교만한 모습은 없는가? 나는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대하는가? 겸손의 기본적인 개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빌2:3).
* 나의 거친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적은 없는가? 매사에 온유한가?
* 나에게 진정으로 섬김의 정신이 있는가? 아니면 군림하려는 교만한 마음은 없는가?
* 나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가? 적당히 눈가림으로 때우려는 마음은 없는가?
* 나는 정절을 잘 지키고 있는가?
* 나에게 절제력과 인내심은 있는가?
*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는가?
* 매사에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 나는 십계명을 잘 지키는가? 혹시 잘 지켜지지 않는 계명이 있다면 어떻게 지키겠는가?

잠언은 우리의 행위를 위한 좋은 안내서이다. 가능하면 매일 읽으면서 삶을 고쳐 보자.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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