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슬라브 볼프의 책 <알라>에 대한 논의와 반응들

미로슬라브 볼프의 책 <알라>(IVP, 2016)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같은 신을 예배한다는 주장으로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신이 같다는 주장은 그렇게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이슬람중앙회 홈페이지에서는 "알라"를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같은 것처럼 어필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측에서도 역시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한스 큉도 그런 주장을 했다[<한스 큉의 이슬람―역사, 현재, 미래>(시와진실, 2012), 9, 191].

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볼프가 <알라>에서 제시한 정치신학적 측면 가운데 공감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볼프의 <알라>가 역사신학적으로 부정확하며, 성경신학적 측면에서 매우 편협할 뿐 아니라, 조직신학적으로 "정통 신학"에서 탈선했고, 논리적 측면에서도 아주 허술한 점이 많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정통 신학(혹은 전통적 신학)"이란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빈, 바빙크의 신학을 이어 가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신학자들에 생소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이 글에서 제시한 내용 중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으리라 믿는다.

[이하에서 볼프의 <알라> 인용은 괄호 안에 숫자로 간략하게 처리함; 쿠란 인용은 "쿠란, 장:절"의 형식을 사용함; 볼프가 유수프 알리(Yusuf Ali)의 번역을 사용하므로, 여기서도 그것을 참조함; 글의 특성상 자세한 각주는 생략함; 이 글에서 "하나님"은 기독교의 신을, "알라"는 이슬람의 신을 지칭함].

볼프의 <알라>의 핵심 주장 요약

볼프는 자신만의 특유한 글쓰기 방식으로 논점이 분명하고, 설득력 있고 흥미롭게,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하고 겸손하게 <알라>를 썼다. 이 책에 나타난 볼프의 중심 주장들은 아래와 같다.

첫째, 볼프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표방한다. 정치적 다원주의란 모든 종교인이 공적 영역에서 자기 입장을 표현할 수 있고, 국가가 모든 종교를 존중하고 차별하지 않는 사상이다(29). 볼프는 이 책을 통해서 알라와 하나님이 같다고 함으로써, 정치적 다원주의를 촉진하고자 한다(29, 291-292, 294; 2부 6장도 동일한 주장).

둘째, 역사적 접근에서 볼프는 중세의 신학자, 쿠사의 니콜라우스(1401~1464년)와 루터(1483~1546년)를 예로 들면서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다고 주장한다(1부 2, 3장). 볼프는 무슬림들이 잘못 아는 참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한다(88, 99).

셋째, 볼프는 요한복음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여전히 그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보았다고 주장한다(126~127; 2부 4장).

넷째, 볼프는 자신이 이 책에서 기준으로 삼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규범적 버전(normative versions)"이라고 주장한다(131, 182).

다섯째, 볼프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다음 6가지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에 그들은 같은 신을 예배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논변이다(147~148). 그 6가지란, △신은 오직 한 분이시다 △신은 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창조했다 △신은 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과 완전히 다르다 △신은 선하시다 △신은 우리의 모든 존재를 다해 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신은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여섯째, 볼프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같은 종교라고 보지는 않는다. 다른 종교이지만 같은 신을 섬긴다는 것이다(254). 그와 동시에 볼프는 "무슬림이 옹호하는 신념을 따르고 그들이 실천하는 많은 의식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100퍼센트 기독교인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263). 소위 말하는 크리슬람(Christlam)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일곱째, 볼프는 종교를 제거할 수도 없고, 종교 집단을 한곳에 가둬 놓을 수도 없으며, 종교와 공적 영역을 분리할 수도 없기에, 더 나은 대안은 공공선의 추구를 위해 종교인들이 노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17~321).

이상에서 볼프의 <알라>에 나타난 그의 논점을 정리해 보았다. 이제 아래에서는 그의 견해가 가지는 문제점들을 역사신학적, 성경적, 신론적, 논리적 관점에서 고찰하겠다.

볼프의 <알라>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

1) 쿠사의 니콜라우스의 경우

볼프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교회사 속의 두 사람의 신학자를 소개한다. 한 사람은 쿠사의 니콜라우스이며, 다른 사람은 마르틴 루터이다. 하지만 볼프가 이 두 사람을 다루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자신의 전제를 사료(史料) 해석에 부적절하게 개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니콜라우스가 중세 신학에서 중요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그가 (볼프가 <알라>에서 말했던) "규범적 기독교"를 대변하는 인물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니콜라우스는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세의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하이델베르크 신학 교수였던 요한네스 벤크(Johannes Wenck)는 니콜라우스가 하나님과 창조 세계를 동일시하는 이단 사상을 가졌다고 비판한 바 있다. 칼빈신학교 교수인 존 쿠퍼는 니콜라우스를 중세의 범재신론자로 묘사한다[<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새물결플러스, 2011), 86~92].

니콜라우스의 주저는 <유식한 무지에 관하여(De docta ignorantia)>이다. 이 책에서 니콜라우스는 "그리스 철학적 일원론"에 근거하여 절대 일자에 대해 논하고, "단일성, 동등성, 연합은 하나다. 그리고 이것인 삼위일체적 단일성이다"(1.7.21)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방식에서 보자면 무슬림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을 동등하게 보는 니콜라우스의 주장이 그렇게 이상할 것이 없다. 알라 역시 얼마든지 "최대 일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볼프는 이렇게 니콜라우스가 삼위일체성을 철학적으로 증명함으로써 무슬림들도 기독교의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알라와 하나님을 동일한 신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75~77). 그러나 과연 이러한 사유 방식이 옳은가에 대한 논의는 제시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볼프는 자신의 교수 자격 논문(Habilitation)을 출간한 책에서는 그러한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적 일원론"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리스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서 그것이 "인격성"의 개념으로 극복되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삼위일체와 교회>(새물결플러스, 2012), 140~141]. 자신의 교수 자격 논문에서 버렸던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적 일원론"을 <알라>에서는 니콜라우스의 "그리스 철학적 일원론"을 통해 다시 되찾아 오는 격인데, 볼프는 이에 대해 전혀 해명하지 않는다.

2) 루터의 경우

볼프가 루터를 다루는 방식은 더욱 심각한 결함을 보여 준다. 볼프가 보기에 루터의 이슬람에 대한 견해는 이중적("Yes and No")이라고 하지만, 사실 루터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한 의견을 갖고 있었다.

루터는 이슬람에 대해 적어도 6편 이상의 중요한 글들을 남겼다. 이 중에서 "튀르크인들과의 전쟁에 관하여"(1529)라는 글과 <튀르크인들의 종교와 관습>이라는 책의 "서문"(1530)과 테오도르 비블리안더(Theodor Bibliander)의 쿠란 번역에 대한 "서문"(1543)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튀르크인들은 무슬림을 뜻한다.)

그런데 이 세 작품 모두에서 루터는 이슬람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는 이슬람의 교리 안에는 "모든 혐오들과 모든 오류들과 모든 악마들이 한 더미로 쌓여 있다"라고 주장한다(영역판 루터 전집 LW 46:177). 그는 튀르크인들의 신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말한다(LW 46:183). 심지어 루터는 영광을 받으실 그리스도께서 속히 "저 가증스러운 선지자 마호메트"를 심판하시기를 간구한다. 자신이 쿠란을 직접 읽은 다음 루터는, 마호메트가 선지자들과 사도들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신앙을 고안해 낸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을 지적한다(이상, Henrich and Boyce, "Martin Luther," Word & World 16.2: 260, 263 참조).

요약하자면, 루터는 이슬람의 알라는 사탄이며 우상이며, 기독교인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루터가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는데 왜 볼프는 루터의 "대교리문답" 4.20에 나오는 아주 모호한 표현 하나를 붙잡고 루터가 하나님과 알라를 같은 신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는지 알 수가 없다. 볼프의 정치신학적 기획에 대한 열정이 너무 지나쳐서 역사적 사료가 말하는 진실도 가려 버린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정치신학적 동기가 옳더라도 부정확하고 왜곡된 역사신학적 판단에 근거하여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3) 칼빈의 경우

볼프는 칼빈이 이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는 개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자이기 때문이며, 칼빈도 알라를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1536년판), 2.28에서 비록 종교적 관용을 요구하긴 하지만, 튀르크인들을 "참된 종교의 적"으로 묘사한다. 칼빈은 벧전 1:3-5의 주석에서 유대인들과 튀르크인들이 우상숭배자라고 하고 있다. 요일 2:22 주석에서도 역시 동일한 내용을 주장하였다. 그는 <기독교강요>(1559년판), 2.6.4에서도 "현재 튀르크인들은 천지의 창조자는 하나님이라고 힘껏 외치지만, 그리스도를 부정하면서 우상으로 진정한 하나님을 대치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칼빈은 신명기 18:9-15에 대한 설교에서 쿠란을 최고의 지혜로 여기는 마호메트와 자신의 교서를,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교황을 "적그리스도의 두 개의 뿔"이라고 주장한다. 그 두 종교는 모두 우상숭배를 하고 있으며, 또한 행위 종교이다. 칼빈은 튀르크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라고 주장한다(신 1:22-28 설교). 그는 튀르크인들과 유대인들을 가리켜 썩은 부위처럼 교회로부터 잘려 나간 자들이라고 하며, 이단으로 여긴다(신 13:1-3 설교). 심지어 칼빈은 교황주의나 마호메트의 쿠란과 같이 새로운 종교를 조작해 내는 자들은 용서 없이 죽음에 처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한다(신 13:6-11 설교).

이런 사실을 볼 때에 칼빈이 이슬람에 대해서 말한 것은 앞서 루터가 말한 것과 거의 동일하다. 두 종교개혁자 모두 무슬림은 우상숭배자이며, 알라는 거짓된 신이고, 이슬람은 참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루터와 칼빈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이슬람의 알라와 결코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볼프의 <알라>에 대한 경전적 고찰

1) <알라>에서 제시하는 알라에 대한 부족한 묘사

알라의 신명(神名)을 파고들어가 보면, 알라는 다양한 우상들 중에 최고의 신이라는 단일신교(單一神敎; henotheism)에서부터 나온 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마호메트가 차차 모든 우상들을 배격하고 알라만이 유일신이라고 선언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알라가 정말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라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탐구가 이뤄져야 함에도 볼프는 "6가지 유사성에 근거한 하나님과 알라의 일치 논증"만으로 두 신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다.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6가지 유사성에 근거한 하나님과 알라의 일치 논증"은 "충분한 유사성에 근거한 논증"이다. 즉 알라와 하나님이 충분히 유사하기만 하면 두 신은 똑같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147). 그런데 볼프가 제시하는 "충분한 유사성"은 그에게는 충분할지 모르나, 쿠란과 성경이 제시하는 신론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 아니다. 먼저 쿠란이 제시하는 신론이지만 볼프가 명확하게 강조하지 않거나 왜곡시킨 부분을 서술하겠다.

첫째, 쿠란에서 알라는 "하나이며 유일한 존재"이며, "낳거나, 나시지 않으며", "그에게 견줄 자 없다"(쿠란 112:4)라고 묘사된다. 이 표현은 아주 의도적으로 알라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름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부가 성자를 낳았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쿠란 112장은 알라가 일위일체임을 말한다. 실제로 최영길 번역의 쿠란에서는 쿠란 112:3을 "성자와 성부도 두지 않으셨으며"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볼프는 쿠란 112장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인은 무슬림과 함께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유일하시다'(알-이클라스 112:1)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만 말한다(192). 바로 이어지는 구절들을 완전히 생략해 버린 것이다.

과연 볼프의 이런 글쓰기 방식이 기독교인뿐 아니라, 무슬림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나빌 쿠레시는 이슬람에서는 알라가 결코 "아버지"가 아님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Qureshi, No God but One, 33). 알라는 단지 "단자(單子, monad)"일 뿐이다(쿠란 2:116 참조). 쿠란에서 알라 외에 신이 없다는 구절들(쿠란 3:2, 3:6, 3:18 등)은 ―이 구절들에 대한 최영길의 쿠란 역주가 말해 주듯이― 모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구절들이다. 볼프는 이런 점을 전혀 강조해 주지 않고 있다.

둘째, 쿠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쿠란 5:17에서는 "하나님이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라고 한다. 이 구절도 볼프가 다루고 있다. 그는 "하나님은 마리아의 아들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무슬림의 주장에 대해서, 기독교인도 역시 "하나님은 그리스도이다"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고는 말하지만, 그 역은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80). 그러나 이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에 가깝다. 무슬림들이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당연히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것 역시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볼프의 이런 억지스런 주장을 무슬림들이 받아들이겠는가?

또한 볼프는 무슬림들이 "하나님과 위격들(persons)을 함께 경배함으로써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모욕한다"라고 하는데, "어떤 기독교인도 인간을 경배하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라고 응수한다(181). 무슬림들이 하나님과 위격들을 함께 경배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위격" 개념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볼프는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않고, 인간 경배 운운하면서 화제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다. 이처럼 볼프의 <알라>는 무슬림의 알라 이해와 쿠란 이해를 편파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2) <알라>에서 제시하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부족한 묘사

볼프의 <알라>는 알라와 쿠란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과 성경은 더더욱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성이다. 무슬림들은 쿠란이 최종 계시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기독교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신을 섬긴다 해도, 결국 기독교인들은 쿠란을 따르지 않기에 알라의 최종 심판을 받을 것이라 주장한다. 알라의 최종 계시가 마호메트를 통해 주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최종 계시이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보여 주는 최종 계시가 된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 주는 복음서이다. 예수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삼위일체 신앙은 이처럼 기독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마이클 리브스, <선하신 하나님>(복있는사람, 2015), 109~110 참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완전히 제외한 채, 하나님에 대해서 논한 볼프의 <알라>는 기독교 신론과 계시론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둘째, 유대교의 신 이해의 문제와 이슬람의 신관의 문제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점이다. 볼프는 요한복음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여전히 그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보았다고 주장한다(126~127).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이 믿었던 신에 대해서 과연 예수와 바울이 인정해 주었던가? 볼프에 따르면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볼프의 성경 해석은 문제가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즉, 예수는 유대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마귀의 자식이 되어 거짓을 따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볼프의 유대인 이해와 너무나 다르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부인했던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하게 볼 수 있다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무슬림들의 알라도 역시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하게 볼 수 있다고 하는 볼프의 주장은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볼프의 <알라>가 가진 조직신학적 문제점

1)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잘못된 분리

볼프는 루터가 무슬림들의 신관에 대해서, "'존재(being)'에 관한 것은 맞지만, '성품(character)'에 관한 것은 대부분 틀렸다"라며 비판했다고 적고 있다(99). 즉, 볼프가 이해하는 루터에 따르자면, 무슬림들은 기독교인의 하나님을 존재적으로 믿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의 성품이나 속성에 대해서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볼프의 이 평가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루터가 말한 것은 무슬림들의 신관은 신의 '성품'에 관해서 너무 많이 틀렸기에 사실상 다른 '존재'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볼프는 루터가 무슬림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서도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본다(88, 99). 하지만 볼프가 직접 적고 있듯이, 이 문제에 대해 루터는 "만스펠트 백작의 비유"를 사용하여 정확히 설명했다(99). 어떤 사람이 만스펠트 백작을 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 백작을 묘사해 보라고 했더니 팔과 다리와 머리가 없는 백작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스펠트 백작을 모르고 있음을 오히려 드러내 준다. 루터는 "바로 이것이 무슬림과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루터가 내린 결론은 무슬림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팔과 다리 즉, "그의 완벽한 신성"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바이마르판 루터 전집, WA 53:152, 14~15). 따라서 루터는 무슬림들이 잘 알지 못하는 참된 신을 섬기고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무슬림들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에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너무나 분명한 루터의 생각을 곡해하는 볼프의 주장은 정말 억지스럽다.

둘째로, 전통적인 신론에서 존재는 곧 속성이며, 속성은 존재이다. 네덜란드의 대표적 개혁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하나님이 가진 각각의 속성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Bavinck, Reformed Dogmatics, 2:112). 그 이유는 하나님의 "단순성" 때문이다. 하나님이 단순하다는 말은 하나님은 복합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속성들 사이에는 어떤 실제적이고 존재론적인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각각의 속성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하다(Bavinck, 앞 책, 2:118). 이렇게 보자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부인하는 무슬림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볼프는 애써 이런 점을 무시한다.

2) "6가지 유사성에 근거한 하나님과 알라의 일치 논증"의 문제점

볼프의 <알라>에 나오는 핵심 논변도 역시 큰 문제가 있다. 볼프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위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6가지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에 그들은 같은 신을 예배한다고 주장한다(147~148). 볼프의 논변은 전통적인 신론의 측면에서 볼 때에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첫째로, 볼프가 언급한 신의 특성들은 가장 중요한 점인 삼위일체성을 생략하고 있다. 볼프는 의도적으로 6가지를 택했지만 그것은 너무 임의적이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생략한 채 다른 것만 제시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신(혹은 우상)을 만드는 것과 진배없다. 볼프가 제시한 6가지 특징을 가진 신을 수납하는 종교는 세상에 많을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 신론에서 삼위일체성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들이 도출되는 일종의 근원적 토대와 같다(리브스, <선하신 하나님>, 42, 67). 따라서 삼위일체성을 부인하는 이슬람이 가진 신론에서 신의 특성이 아무리 하나님의 특성과 유사해도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볼프도 인정하다시피, 알라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전적으로 다르다(225). 알라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랑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전까지 성부, 성자, 성령의 교제 가운데 계시는 온전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Bavinck, Reformed Dogmatics, 2:318~322). 사실상 알라는 "사랑"일 수 없다. 알라는 고립된 단일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슬람의 신론이 가지는 약점이자 모순이다(리브스, <선하신 하나님>, 65).

셋째로,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명령도 기독교와 이슬람이 차이가 난다. 우선 기독교의 하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지만(마 5:43-48), 알라는 그렇게 명령하는 구절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146에서 볼프도 인정함; 237~238과 비교). 아브라함 카이퍼는 기독교인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났는데,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을 닮아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Kuyper, The Work of the Holy Spirit, 519; 리브스, <선하신 하나님>, 96 참조). 이런 측면은 이슬람의 신론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볼프가 제안한 "6가지 유사성에 근거한 하나님과 알라의 일치 논증"은 그 자체로 매우 결함이 많은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알라>에서 제시하는 신론이 정통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과 충분히 같다고 한다면, '여호와의증인'이 제시하는 신론도 역시 그것과 일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호와의증인'도 역시 볼프가 제안한 6가지의 신의 특성을 충분히 충족시키기 때문이다[바우만, <여호와의증인>(은성, 1997) 참조].

<알라>가 가진 논리적 문제점과 실제적 한계

1) 볼프의 <알라>와 <삼위일체와 교회>에서 제시하는 신론의 차이

볼프가 제시하는 삼위일체론은 그가 자신의 책, <삼위일체와 교회>에서 제시한 삼위일체론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볼프는 그 책에서 몰트만과 판넨베르크가 제시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채택한다고 적고 있다(<삼위일체와 교회>, 330). 그런데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핵심에는 "의지의 중심(center of will)"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viii; Pannenberg, Systematic Theology, 1:319~320). 그런데 그렇게 의지의 중심이 셋인 신론을 무슬림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알라는 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볼프가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말이 될 뻔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전통 속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단일 의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의지의 중심은 하나이기 때문이다[우병훈, The Promise of the Trinity, Vandenhoeck & Ruprecht(2017 출간 예정), 3.3.2.2와 7.1.2를 참조].

<삼위일체와 교회>에서는 삼위 안에 세 의지들 혹은 세 의식들에 대해 말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지지했던 볼프가 <알라>에서는 단일 의지를 가진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자기모순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2) 볼프의 <알라>에서 제시하는 실제적 한계

미국가톨릭대학(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셈어와 이집트어를 가르치는 시드니 그리피스의 지적처럼, 볼프는 실제로 무슬림 지역에 살아 본 기독교인들의 견해를 무시한다(Griffith, "Allah," First Things 216: 56). 무슬림 지역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무슬림들이 실제로 행하는 결혼 관습이나 그들의 폭력적 성격, 정치적 비민주성에 대해서 매우 심각한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이슬람 사회가 지닌 폭력성은 쿠란이 갖고 있는 내재적 문제에 기인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이만석, <베일 벗긴 이슬람>; 유해석, <기독교와 이슬람 무엇이 다른가> 참조).

사실 쿠란에는 다른 종교에 대한 폭력("칼의 구절")이나 전쟁(지하드)을 직접 지시하거나 암시하는 구절들이 적지 않다(쿠란 2:216, 2:190-194, 3:151, 4:76, 4:89-90, 4:95, 8:12-16, 8:39, 8:60-65, 9:5, 9:19-20, 9:73, 9:81, 9,123, 47:4, 22:39). "우리가 참된 신과 거짓 신 중에 어떤 신을 예배하는지는 말보다 행위가 보여 준다. 우리가 어떤 신을 예배한다고 말로써 고백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볼프는 이슬람 내부의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왜 언급하지 않는지 궁금하다(159).

볼프는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이라도 정치적 다원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무슬림의 경우에도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무슬림 사회는 강력한 정교일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종교적 배타주의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실제로 오늘날 무슬림 사회에서 늘 목격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볼프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하는 이슬람 사회가 가진 이러한 근원적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

결론

볼프의 <알라>는 무슬림을 '포용'하려다가 성경적인 하나님을 '배제'시켜 버린 작품이다. 앞서 나왔던 볼프의 역작, <배제와 포용>에서 그는 '포함'보다는 '포용'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볼프, <배제와 포용>(대한기독교서회, 2012), 22, 34, 44]. 그랬던 그가 <알라>에서는 억지스런 '포함'을 강행하고 있다. 이처럼 볼프의 <알라>는 그가 이전에 썼던 책들과 여러 면에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무슬림의 화해를 위해서 볼프의 방식보다 더 나은 방식은 무엇인가?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반드시 예배하는 신이 일치해야지만 정치적 화해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볼프는 이것을 철통 같이 믿고 있지만 사실 이 주장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다.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사회라도 얼마든지 구성원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둘째, 각각의 종교에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더 많이 부각시켜서 적용하는 일이 필요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쿠란 내에는 폭력적인 성전(聖戰)을 지지하는 구절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쿠란 내에는 평화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구절들도 분명히 있다. 그럴 경우에 후자의 구절들이 전자의 구절들보다 해석학적인 우선성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이슬람 개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무슬림 법학자 나임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Naʻīm, Toward an Islamic Reformation, 179~181).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해 한국교회가 보다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큰 사랑과 공의로 행하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슬람 다문화 가정에 대해서 교회는 관심과 돌봄을 실천할 수 있다. 이는 최근에 풀러신학교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10년 동안 700명가량 조사한 결과가 잘 말해 준다. 가장 큰 회심의 이유는 기독교인 친구들의 영적이고 이타적인 삶 때문이었다(유해석, <기독교와 이슬람 무엇이 다른가>, 217). 따라서 루터가 이미 500년 전에 말했듯이, 기독교인들은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서, 사랑과 정의의 삶에 있어서 더욱 탁월해져야 한다. 그럴 때에 진정으로 무슬림들과 공존하면서도 영적으로 휩쓸려 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다른 종교에 대해서 이해하고 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종교 간의 대화가 서로 간의 폭력성을 줄여 줄 수는 있다. 물론 우리는 볼프가 주장하듯이 서로의 신이 같은 신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사실 종교 간의 다름을 인정할 때에 관용의 정신이 더욱 꽃필 수 있다.

바로 이 마지막 지점에서 볼프의 <알라>는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진다. 무슬림들이 밀려오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다문화가 더욱 확장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사는 기독인들은, 볼프 <알라>의 중심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평화와 정의가 공존하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향한 그의 비전은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볼프의 책이 역사신학적, 조직신학적, 성경신학적, 논리적 측면에서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신학적 기획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는 여전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병훈 /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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