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 누가 알 수 있을까. ⓒ뉴스앤조이 최유리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세월호 참사 유가족, 미수습자 가족, 생존자를 만나면서 느끼는 위기는, 이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참사 2년이 지났고 현장을 오가며 안면이 있어 나도 모르게 이들을 편하게 대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깊고 아득한 슬픔이 느껴진다.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이석태 위원장)의 노력으로 피해자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다. 아직 더 많은 연구와 실제적인 조치가 필요하지만, 이 연구 결과로 대형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됐다. 이런 연구는 우리 사회가 어떤 자세로 참사 피해자들을 대해야 하는지 시사점을 준다.

김은지 교수(마음토닥정신건강의학과의원)는 2014년 7월부터 2년간 단원고등학교 스쿨닥터로 있었다. 참사 생존 학생들을 가깝게 만났고 그들뿐 아니라 그 부모님, 참사 당시 1·3학년 학생들, 학교 교직원 등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7월에는 특조위 요청으로 참사 피해자들을 연구한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8월 9일, 안산 단원구에 있는 마음토닥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서 김은지 교수를 만났다. 1시간 넘게 그는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단원고 스쿨닥터로 재직하면서 경험한 일들과 대형 참사 피해자들이 겪는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지난 2년간 단원고 스쿨닥터를 맡아 온 김은지 교수. ⓒ뉴스앤조이 구권효

'생존 학생'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없어

- 어떤 과정을 거쳐 단원고 스쿨닥터가 되셨습니까. 세월호 참사 피해자를 만나는 일에 뛰어든 계기가 있으시다면.

2014년 4월 16일 사고가 나고 교육부에서 바로 경북대 학생정신건강지원센터에 요청을 했어요. 센터는 17일 전국 소아정신과 의사들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단원고에서 자원봉사할 사람을 모집한다고요. 그걸 보고 지원해서 18일부터 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했어요. 그 후 학교에 스쿨닥터를 두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거기에 지원해서 7월 1일부터 일하게 됐죠.

마침 제가 2014년 2월까지 일하고 잠깐 쉬고 있었어요. 큰아이가 일곱 살인데 학교 들어가기 전 중요한 시기라 생각해서 같이 지내려고 했죠.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터진 거예요. 센터에서 메일을 받고 '나같이 노는 사람이 가서 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집이 서울 서대문 쪽이었는데 안산까지 왔다 갔다 했죠.

사실 의사가 학교에 풀타임으로 상주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예요. 어떤 환경일지 알 수가 없으니 스쿨닥터를 뽑는다고 했을 때 선뜻 지원한 사람이 없었어요. 당시 제가 단원고에서 풀타임으로 봉사한 경험도 있고 해서 지원하게 된 거예요.

- 생존 학생들을 만날 때 어렵지는 않으셨나요.

아이들이 병원과 연수원에서의 경험 때문에 심리 치료, 심리검사, 이런 거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억지로 상담을 하자고 하지 않았어요. 먼저 아이들 부모님부터 만나 관계를 형성했어요. 부모님들이 저희를 신뢰하니 아이들도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아이들이 일부러 말을 꺼내게 한다거나, 아이들과 친해지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어요. 제가 단순히 상담자라면 친해지려 노력하는 게 맞겠지만, 정신과 의사는 좀 다른 역할이에요. 정말 힘들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걸 말하고 싶을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사람이 정신과 의사잖아요. 제 역할은 '너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항상 여기에 있다', '너에게 들은 이야기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어요.

- 기자로서 생존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접근하기가 어렵더라고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언론에 노출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바깥에서는 '생존 학생들이 이러이러해서 힘들 것이다'는 정도로 추측하는데요. 실제로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한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김빠지는 대답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힘든 걸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각자 다른 상황에 있으니 각자 다른 아픔을 겪고 있는 거죠. '생존 학생'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얘기할 수 없어요. 사실 너무 당연한 얘기죠.

아이들을 개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배려가 이 사회에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요. 어디를 가나 '생존자'라는 라벨이 붙어 행동에 제약을 받는 상황을 많이 봤어요. "그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잘 살아야지"라는 말이 오히려 아이들을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해요. 아이들이 인식하지 못할지 몰라도 상당히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건 학교나 어디나 아이들의 심리 치료가 우선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학교는 아이들 심리보다 교육이 우선이잖아요. 어떤 행사를 해도 아이들 심리 보호는 우선순위에서 밀리죠. 그런 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최대한 아이들의 심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게 힘들었어요.

- 스쿨닥터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가장 보람됐다고 느낀 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1주기 때 한 '추모 꽃다발 만들기'였어요. 다양한 꽃을 가져와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희생 학생·선생님을 생각하며 꽃다발을 만든 거예요. 아이들이 그냥 상담을 할 때보다 꽃다발을 만들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밤 9시에 끝내려고 했는데, 선생님과 학생들이 한 자리도 빠지면 안 된다면서 밤늦게까지 모든 자리에 놓을 꽃다발을 만들었어요.

또 하나는 작년 12월부터 올해 1월 생존 학생들과 만남을 마무리할 때였어요. 아이와 부모님과 제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는데요. 부모님 모시고 오라면 싫어할 때인데도, 그동안 상담을 별로 하지 않던 아이까지 부모님을 모시고 오더라고요. '이 녀석들 의리가 있구나' 싶었죠. (웃음) 아이들이 도와줘서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특조위 주최 발표회에서 발제하는 김은지 교수. ⓒ뉴스앤조이 구권효

간접 피해자들에 대한 연구 이뤄져야

- 참사 당시 단원고 1·3학년 학생들도 많이 만나신 줄 압니다. 그들은 어떤 고민을 했나요.

가정에서 한 아이가 아프면 그보다 큰아이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그보다 작은아이는 부모의 관심을 덜 받게 되는데요. 이런 상황이 똑같이 일어났다고 보시면 돼요.

당시 3학년 학생들은 '외상성 애도'를 경험했어요. 후배들이 그렇게 된 것에 책임감을 느끼고 선생님들 따라 장례식 다니고 했어요. 한국에서 고3은 특별한 시기잖아요. 그 시기에 이런 일을 겪은 거예요. 학교 내부에는 계속해서 기자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외부적으로는 특례 입학이다 뭐다 공격을 많이 받았어요. 중요한 시기를 박탈당한 거예요.

1학년 학생들은 희생 학생들과 긴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학교에서 벌어지는 어수선한 상황을 겪어야 했어요. 청소년기는 사람이 계속 성장하는 시기예요. 이 시기에 학교 환경은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지난 2년간 단원고는 잠잠할 날이 별로 없었어요. 갑자기 학사 일정이 바뀌고, 학교 안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학교는 이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장소가 되지 못한 거죠.

-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억 교실 존치 문제가 생각나는데요. 진통 끝에 결국 교실을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학생들 의견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교실 문제에 있어 아이들이 배려받지 못한 거죠. 단원고에 학생이 1,000명 정도 되는데 아이들 생각이 다 달라요. 그들의 의견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둘째 문제고요. 그 과정 자체가 없었다는 거죠. 학생들을 배려하려 했다면 공청회라도 열어서 잘 설명해 줄 수도 있잖아요. 아이들의 심리적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수는 없죠.

어른들이 항상 말로는 "지켜 주겠다"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이렇게 되면 아이들이 무력감을 느껴요. 무력감은 분노로 이어지고, 이 사회 전반을 불신하는 결과를 낳아요.

학교 차원에서도 주도권을 가지고 어떻게 해 볼 상황이 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정치적으로 큰 이슈가 되다 보니 교사들이 주도적으로 할 수가 없었어요. 마치 가정에서 상처받은 아이를 부모가 잘 돌보려 하는데 옆에서 자꾸 간섭하는 거죠.

- 지난 특조위 주최 발표회에서 간접 피해자에 대해 강조하셨는데요.

참사 당시 고3이었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요.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아이들은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서 지원도 별로 없어요. 간접 피해자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면 이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힘든 게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면서요.

세월호 참사는 특별하죠. 당시 배가 가라앉는 걸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봤으니까요. 그때 사람들은 참담함을 느끼며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기울어 가는 배를 떠올리면 눈물이 그렁해져요. 그런데 참사 이후 지금까지 일이 진행된 과정은, 양쪽으로 갈라져서 계속해서 서로를 상처 입히는 방식이었던 거예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국민 전체가 간접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 기억 교실 존치 문제에서 학생들 의견은 배제되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트라우마 치료, 준비도 되지 않았다

- 세월호 유가족, 미수습자 가족, 생존자들을 만나면 '이 상처가 언제 어떻게 드러나게 될까'라는 우려가 들어요.

사실 크게 보면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는 사건이 끝난 다음 시작하는 거거든요. 근데 지금 이분들은 상처를 계속 입고 있는 상황인 거예요. 상처가 낫기는커녕 계속 덧나고 있는 거죠. 트라우마를 치료할 준비조차 안 되는 상황이에요. 그나마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것뿐이죠. 이미 초인적인 힘으로 견디고 계시지만.

'외상 후 성장'이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람이 이를 극복하려면 사회적 지지가 필요해요. 주변에서 이 사람의 상처를 공감해 주고, 이 사람의 재기를 응원해 줄 때 성장이 가능하다는 거죠. 그런 게 없으면 계속 분노만 쌓이게 돼요. 세월호 참사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에게는 이게 되지 않는 거죠.

- 사람들이 세월호 피해자들에게 너무 정상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세월호 가족들은 실수하면 안 된다"는 거죠.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데 정상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건 그만큼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동감'(sympathy)과 '공감'(empathy)을 구분해야 하는데요. 한국 사람들은 동감은 잘해요. 동감은 자기와 동일시하는 거예요. 자기 일처럼 느끼는 거죠. 그런데 동감은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다 보니 판단하게 되고 행동 수정을 요구하게 돼요.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지"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공감은 그 사람 시각에서 이해하려 하는 거예요. "네가 정말 힘들겠구나" 여기에서 멈추는 거예요. 나와 너가 분명하게 구분되죠. 나도 슬프지만 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에 다 알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라는 것을 인식하는 거죠. 사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뭐가 옳은지 알아도 몸이 안 따라 줄 때가 있거든요. 그걸 이해해 줘야 해요.

- 유가족 아픔이 다르고, 미수습자 가족 아픔이 다르고, 생존자 아픔이 다르다는 걸 느끼는데요.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정신적 피해에 대한 개념부터 피해를 당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해 수준이 낮은 것 같아요.

이게 참 안타까운 일인데 세월호 참사는 '슬픔의 서열화'가 너무 빨리 이뤄졌어요. "누가 누구보다 더 슬프다"는 건 사실 합리적으로(reasonable) 설명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다 슬픈 거죠.

대형 재난과 같은 상황으로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겪으면 그 집단에서 '편 가르기'와 '투사'가 빈번하게 일어나요. 감당할 수 없는 일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지워야 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죠. 그분들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누구나 그런 일을 겪으면 마찬가지예요. 그게 트라우마의 속성이죠.

트라우마를 겪는 분들은 모든 사안에서 민감해져요. 모든 위험을 파악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게 되거든요. 보통의 사람들은 그냥 받아들이는 일도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부정적인 사인(sign)만 받아들이게 돼요. 그럴 수 있다는 걸 이해하고 세월호 가족들을 대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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