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도시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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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 '하늘소년'으로도 알려져 있는 기후위기기독인연대 김영준 대표가 녹색당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펼쳐 온 경험을 토대로, 기후 위기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해야 할 새로운 세상을 제안합니다. 연재명 '에코토피아'는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저서에서 따온 이름으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하는 이상적 사회'를 의미합니다. 격주 수요일 총 6회에 걸쳐 진행합니다. - 편집자 주 |
지난 글에서 '성장주의'라는 강력한 서사를 바꾸기 위한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이야기를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공간은 바로 도시이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온실가스의 70%가 도시에서 배출되기에, 도시의 역할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도시는 국가보다 빠르게 변화를 이끌고 '문화적 혁명'을 일으킬 잠재력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1기)이 파리 기후변화 협약에서 탈퇴한 이후에도, 수십 명의 미국 시장과 주지사들은 여전히 협약을 준수하고 그 이상도 할 것이라 선언했었다. 즉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더라도 지방정부가 의지를 가지면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시는 중요하다. 이번 글에서는 3가지 도시 기획을 살펴보려 한다.
| 15분 도시(15-minute city) |
15분 도시의 3가지 핵심 요소
'15분 도시'는 걷거나 자전거로 15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정하고, 주민들이 그 안에서 완전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능을 제공하는 도시 기획이다. 이 개념을 창안한 프랑스 파리 제1대학 부교수 카를로스 모레노는 공로를 인정받아 오벨 어워드(2021) 수상 및 유엔 해비타트 명예훈장(2022)까지 받았다.
핵심은 '삶의 질을 위한 초근접성'이며, 이 생활권은 거주, 업무, 생활 서비스 공급, 건강, 학습, 여가의 6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즉 직장과 주거지를 분리(직주 분리)하고 멀어진 두 곳을 연결하기 위해 '속도'를 강조하던 근대 도시의 패러다임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이다. 직주 분리는 필연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심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5분 도시는 세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크로노-어바니즘(Chrono-Urbanism)으로 '도시민 시간 우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바꾸어 쫓기지 않고 여유로운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다. 자동차와 도로는 줄이고, 자전거와 보행자 길을 늘리자고 제안한다.
둘째, 크로노토피아(Chronotopia)로 '장소의 다목적성'이라 할 수 있다. 인프라를 다양하게 활용하자는 개념으로,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장소의 용도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재택근무로 수요가 줄어든 사무실을 주택으로 재배치하거나, 학교나 공공건물을 일과 후 주민 복지와 여가 용도로 겸하는 것이다.
셋째, 토포필리아(Topophilia)로 '장소애'라 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는 것으로, 도시 및 주변 환경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중심에 있다. 주거지 인근에 높은 수준의 녹색 공간을 제공하거나 자연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해 양질의 사회적 삶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 15분 도시의 이점과 전 세계적 흐름 |
15분 도시는 도시를 압축하면서 탄소 배출을 줄이는 도시 기획이다. 하나의 중심이 아닌 여러 개의 중심지가 분산된 '다핵분산형 도시구조'를 가지며, 필요한 것은 자체적으로 해결할 '자족적 기능'(주거·업무·교육·의료·문화 등), 자전거·대중교통 중심 설계 등 '콤팩트 시티' 개념을 포함한다. 보행 중심 환경으로 탄소 배출의 감소,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를 통한 삶의 질 향상, 도시 회복 탄력성 증가, 경제 다변화 등이 15분 도시의 이점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파리가 대표적인 사례로, 파리 전역의 운행속도 30km/h 제한, 주차장 면적 절반 축소, 생태 기후적 지역 도시계획 등을 현실화하고 있다. 파리 외에도 캐나다 오타와, '20분 도시'로 응용한 호주 멜버른과 미국 디트로이트, 미국 오리건주의 포틀랜드,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 기후 대응을 잘한다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실험중이다.
| 도넛 경제 도시(Doughnut City) |
<도넛경제학>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가 주류 경제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경제 모델이다. 도넛 경제의 핵심 개념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도넛을 떠올려 보자. 도넛 바깥으로는 '지구 위험 한계선'을 넘지 않게 하고, 도넛 안쪽으로는 '복지를 위한 사회적 기초'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여, 그 사이에서 '사람들의 삶을 위한 안전하고 정의로운 영역'을 구축하자는 것이 핵심 개념이다. 쉽게 말해, 복지를 추구하면서도 환경을 파괴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구 위험 한계선은 지구 시스템을 구성하는 9가지 요소를 수치로 평가할 수 있게 만든 지표이다. 9개 중 하나만 위험 한계를 넘어도 도미노처럼 다른 요소에 영향을 끼쳐 한계(임계점)를 넘게 할 수 있는데, 현재 6개가 고위험 한계선을 넘어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사회적 기초는 유엔의 '지속 가능 발전 목표(SDGs)' 개념을 가져온 것으로, SDGs는 전 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 발전을 실현하기 위해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유엔과 국제사회가 달성해야 할 목표이다. 도넛 경제는 직관적이고 실용적이어서 많은 도시와 지역에서 정책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 도넛 경제를 도시에 적용하는 방법 |
도넛 경제를 도시에 적용하기 위해 '도시 초상화(City Portrait)'와 '도시 셀카(City Selfie)'라는 툴이 개발되었다. 도시 초상화는 도넛 원리를 4개의 사분면(지역·세계·사회적·생태적)으로 구획하고, 지구 위험 한계와 사회적 기초에 대입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도시 현황을 파악하는 방법론이다. 도시 셀카는 초상화보다 더 좁게,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도넛 원칙이 실현되고 있는지, 결핍된 부분은 무엇인지 세밀하게 파악하는 방법이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도넛 경제 모델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첫 사례로, 도시 정책 결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분석을 통해 카카오 빈(초콜릿 원료) 수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과 아동 노동 착취 간의 상관관계를 확인했으며, 도시 임차인의 주거 불안정 실태도 파악했다. 또한 이에 대한 대안도 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부시장은 "도넛은 우리에게 답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을 제시해 주어서 우리가 예전과 같은 구조 속에서 살아가지 않도록 해 준다"며 도넛 모델의 이점을 강조했다.
도넛은 암스테르담(네덜란드) 외에도, 이포(말레이시아), 글래스고(스코틀랜드), 바트 나우하임(독일), 코펜하겐(덴마크), 팀부(부탄), 멕시코시티(멕시코), 오슬로(노르웨이), 나나이모(캐나다), 콘월(잉글랜드), 발랑스-로만(프랑스) 등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
| 슈퍼 이웃 공화국(République des Hyper Voisins) |
프랑스 파리14구에서 진행된 '슈퍼 이웃 공화국'은 15개 거리와 1만 5000명이 참여한 흥미로운 사회적 공동체 실험이다. '15분 도시'가 하향식 프로그램이라면 슈퍼 이웃 공화국은 그것에 대한 풀뿌리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슈퍼 이웃 공화국은 협력, 상호 지원, 이웃애를 통해 초지역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주민들은 함께 기기를 수리하고, 중고품을 판매하며, 의료 자원을 공유하고, 마을의 자투리땅에 정원을 가꾸는 활동을 해 왔다. 특히 팬데믹 기간에는 함께 마스크를 만들고, 취약 이웃에게 물품을 전달하며, 재난에 대한 회복력을 높였다. 나아가 도시 공간을 전유하는 형태로 진화하여, 주차장에 유기 폐기물 퇴비화 처리장을 짓거나, 마을 광장을 보행자 전용 구역으로 바꾸기도 했다. 노인과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시간 은행'이라는 혁신적인 신용 화폐도 실험 중이다. 이렇듯 슈퍼 이웃 공화국은 '돌봄과 삶의 재생산'에 초점을 맞춘 실험이다.
| 기후 도시, 새로운 표준을 만들다 |
우린 종종 거대한 기후 위기 문제 앞에서의 막막함과 무력함을 느낄 때가 많은데, <기후 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의 저자 이송희일 작가의 다음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체제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지만 새롭게 구성할 체제의 비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 비전들은 미세한 틈새 속에서,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충분히 생산하고 실험할 수 있다. 관계와 신뢰의 흘러넘침이 새로운 이야기의 동력이다."
우리는 이러한 도시 기획을 일상에서 하나씩 구현해 가며, 개발과 성장주의라는 기존의 큰 이야기를 바꿔낼 수 있다. 즉, 작은 이야기들(마이크로 내러티브)이 모여 큰 이야기(메타 내러티브)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이런 도시들을 '기후 도시'라 부를 수 있으며, 이는 앞으로 모든 도시의 표준인 '뉴 노멀 시티'가 될 것이다.
김영준 / 기후위기기독인연대 공동대표, 생태전환lab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