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시간] 크레이그 에번스, 톰 라이트 <우리 주 예수의 마지막 날들>(IVP)
부활은 말이 안 됩니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부활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기에 만약 부활이 있었다면 우리의 가치관은 완전히 전복되어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부활은 신앙의 머릿돌과 같습니다.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신앙이 가능합니다. 반면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고전 15:14)에 불과합니다. 부활절만 되면 많은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다만 부활이 실제 역사 안에서 일어난 것인지 검증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 끝에서 일어날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죠. 흥미롭게도 사도들은 종말에 일어날 일이 과거 역사의 한 시점에서, 한 사람에게 일어났다고 선포했습니다. 부활이 진짜 일어난 일인지는 역사의 끝이 되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감히 관찰할 수 있는 유의 사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활은 난제입니다. '부활'은 실제 '역사'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어야 마땅합니다. 다만 '역사'를 들여본다 한들 '부활'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 부활을 '신앙'의 영역에서만 말해 봅시다 |
역사 안에서 부활을 검증할 수 없다면, 차라리 '신앙'의 영역 안에서만 말하면 어떨까요? 어떤 이들은 예수의 죽음을 목격한 제자들이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대충 부활이란 범주에 도달"(159쪽)한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합니다. 이와 유사한 논증은 신학자들 사이에도 발견됩니다. 루돌프 불트만 혹은 에드바르트 쉴레벡스가 이에 속합니다. 그들은 부활을 두고 "제자들이 무덤을 찾아갔을 때 그들의 마음이 빛으로 충만했기에"(159쪽) 일어난 사건이라 해설합니다. 두 부류 모두 부활을 신앙의 영역에서 바라본 사례입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이지만 다소 담대하게 '역사'의 영역까지 밀어붙인 학자도 있습니다. 바로 존 도미니크 크로산입니다. 그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유골 및 로마 고대 문헌 연구 결과를 인용합니다. 예컨대 당시 로마 십자가 처형은 죄수가 죽기까지 전시해 두다가, 죽은 후에는 시체를 버리거나 군인이 직접 매장했다는 점을 인용합니다. 반면 복음서의 기록은 이와 상충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무덤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세 명의 여인이 고급 향유를 들고 무덤을 찾아 나섭니다. 크로산에 의하면 복음서 기록은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후대에 '신앙'으로 말미암아 짜깁기된 결과물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어떻게 됐을까요? 십자가에 달린 대다수의 시체는 새와 개의 먹이로 전락하거나 로마 병사들에 의해 석회 구덩이에 버려졌습니다. 따라서 크로산은 예수의 시체 또한 그렇게 됐을 개연성이 짙다고 주장합니다. 참고로 이는 단순한 상상에 근거한 소설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한 개연성이 충분한 가설입니다.
| '역사'의 영역에서 개연성을 따져 봅시다 |
크로산의 주장은 무척 발칙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연구 방법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 자체를 다루진 않습니다. 그 어떤 사료를 통해서도 검증이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부활을 둘러싼 복음서 기록을 살핍니다.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지, 역사적으로 검증합니다. 크로산의 방법에는 힌트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 사건 자체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부활을 둘러싼 복음서 기록의 역사적 개연성을 따지는 일은 가능한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크레이그 에번스와 톰 라이트의 강연을 엮은 <우리 주 예수의 마지막 날들>(IVP)에 담긴 작업이 꼭 그렇습니다. 그들은 복음서 기록(죽음, 매장, 부활)의 개연성을 역사적으로 살핍니다. 특별히 두 번째 장에서 크레이그 에번스가 보여 주는 논증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크로산과 동일한 방식의 작업으로, 크로산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물론 크로산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습니다).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크로산이 다루지 않은 사료를 바탕으로 더욱 설득력 있는 가설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토비트기, 쿰란 문헌, 랍비 문헌을 인용하며 유대인들이 시체가 버려지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부정한 시체가 곧 땅을 오염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대제사장이나 나실인이라도"(86쪽) 유기된 시체를 매장할 의무가 있었으니까요. 또한 로마 제국은 늘 유대인 고유의 문화를 존중해 왔습니다. 따라서 크레이그 에번스는 로마 제국에서 처형당한 시체 대다수가 유기되었을 것이라는 크로산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다만 적어도 유대 땅에서 처형된 죄수는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즉 복음서의 매장 기록은 당시 십자가에 달린 유대인 죄수에게는 충분히 있을 법한 묘사입니다.
| 역사를 통해 부활의 함의를 살펴봅시다 |
역사를 살필 때의 유익은 단순히 복음서 기록의 역사적 개연성을 검증하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록에 담긴 당대의 역사적 의미 또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가 도말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떠올릴 때 회개와 감사의 마음을 품습니다. 다만 당시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신앙을 일깨우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을 약화시켰던"(19쪽)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아니었다면 단순한 죄수의 사형 혹은 의인의 억울한 죽음에 불과했을 겁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부활은 "육체 없는 천국에서 누리는 사후의 영광스러운 삶"(121쪽)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굳이 사흘 후에 부활하시지 않고 바로 부활하시는 것이 더 극적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CH북스),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IVP)를 통해서 부활을 면밀히 해설했던 톰 라이트는 세 번째 장에서 '부활'을 둘러싼 기록을 살핍니다. 그가 말하길 부활은 "죽음 후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일어나는 새로운 삶"(124쪽)을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즉 신원(伸冤)입니다. 하여 당시 유대인들은 부활을 두고 "마지막 날에 한꺼번에 모든 사람에게"(141쪽) 일어날 사건이라 믿었습니다. 반면 사도들은 종말에 일어나야 할 부활이 지금 일어났다고 선포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야 할 부활이 예수라는 특정인에게서 일어났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이며 그들이 선포한 부활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요? 역사를 꼼꼼히 살펴야만 마침내 부활의 의미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 '부활'이 던지는 질문에 응답할 차례입니다 |
부활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활을 말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부활의 역사성을 변증하는 데 열을 올립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역사라는 영역에서 벗어나 신앙의 영역에서만 부활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부활을 말이 되는 방식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유혹에 자주 직면합니다.
크레이그 에번스와 톰 라이트는 부활에 대한 좋은 가이드를 자처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당대의 사료를 꼼꼼히 살펴 가며 복음서를 충실히 살피는 태도는 뭇 설교자와 성경 교사들이 따라야 할 모범과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부활에 회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및 이후 부활 신앙의 태동 과정이 담고 있는 꽤 높은 역사적 개연성을 보여 줍니다. 이는 결국 '증명'에 매몰되지도 않으면서 '회의'에 빠지지도 않는, '부활'을 믿는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마지막 날에 '부활'은 스스로를 증명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묻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기에 말이 안 되는 부활에 근거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의 응답만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으니,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것이며, 따라서 우리와 여러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은 그 새로운 세상의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을 만드는 참여자가 되도록 초대받았습니다."(156쪽)
홍동우 /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지우) 저자, 유튜브 채널 '추천왕 홍목' 운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