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 시간] 피터 J. 윌리엄스 <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는가?>(감은사)

1. 믿기 힘든 마음을 넘어서기까지

신학을 공부하며 가장 크게 충격받았던 기억은, 성경 본문을 비평학적으로 다루는 방식을 접했을 때였습니다. 그동안은 오경의 저자가 모세인 줄로만 알았고, 복음서도 당연히 각기 책 이름을 따라 마태·마가·누가·요한이 직접 저술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비평학적 관점에서 본 복음서는, 몇몇 성실한 기자들이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문서라기보다는, 다양한 정치적·문화적 맥락에 위치한 '공동체'의 상황과 소망이 예수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에 투영된 '대체 서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제 신앙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던 '믿음의 방식'에 적지 않은 변화를 줘야만 했으니까요.

기존에는 성경 해석의 목표가 기술된 사건 그대로를 받아들여 내면화하거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상황을 현대인으로 살아가는 제 상황과 조화롭게 결부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평학적 방법론을 접한 후에는 복음서 기사들을 얼마나 혹은 어디까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제가 속한 교단의 신학적 울타리를 넘어서는 진보적인 학술서를 읽을수록 이 고민은 더 깊어졌죠. 결국 저는 복음서 본문을 모조리 해체한 후, 안개 속 미궁처럼 잘 보이지도 않는 당시 신앙 공동체의 맥락을 짚어 가며 나름의 재구성 과정을 거치는 희한한 해석 작업에 매몰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재구성은 신학도의 '지적 유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해체하고 재구성해 낸 예수의 이야기가 복음서의 익숙한 기사들보다도 되레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죠. 그래서 저는 성경을 잡을 때마다 '이게 맞나' 하는 자괴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서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최고의 묘사이자 전기傳記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쉽고 편리할 뿐 아니라 가장 정확한 길이라는 진실을 말이죠.

힘들고 혼란스럽긴 했지만 결국 복음서의 정확성을 신뢰하고 다시금 그 바탕 위에 신앙을 재정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이미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자였고 '믿을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내용을 다시금 신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본문이 오늘날 말하는 소위 '역사적 사실(fact)'이 아니라 '우주적 진실(truth)'을 전달하고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책 <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는가?>(감은사)에도 나와 있듯이 고대인에게 '인용'과 '보도'라는 개념은 우리 현대인의 개념과 다르고, 그들이 정보 전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요소는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하나도 '틀림없이' 전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이 담지하고 있는 의미와 메시지를 '틀림없이' 후대에 남겨 주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죠.

<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는가?> / 피터 J. 윌리엄스 지음 / 김태훈 옮김 / 감은사 펴냄 / 236쪽 / 1만 6800원
<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는가?> / 피터 J. 윌리엄스 지음 / 김태훈 옮김 / 감은사 펴냄 / 236쪽 / 1만 6800원

그동안 설교자로서 복음서의 메시지에 깊이 천착했기에, 이 원리를 깨닫는 순간 복음서는 세상에서 가장 '진실'된 문서라는 환희에 찬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저를 옭아매던 '믿기 힘듦'이 무너지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강력한 진실의 세계가 눈에 훤히 들어온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제 안에는 '믿음'과 '믿기 힘들다'는 양가감정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던 거죠. 믿기 힘들다는 생각이 저를 괜시리 먼 길로 돌고 돌게 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라는 크고 작은 덧게비를 다 치워 버리면 참된 '역사적 예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란 환상에 도취하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복음서 변증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든 생각은, 목사인 저조차 복음서의 초자연적 사건에 관한 기록들 앞에서 '믿기 힘들다'는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데, 다른 교인들은 오죽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지성과 첨단 기술의 위대함이 이끄는 세상에 살면서, 신화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텍스트를 읽고 거기서 '믿음'을 길어 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과정은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전제로 합니다. 철저한 반지성주의에 입각한 광신적 태도, 혹은 믿기 힘들지만 그 힘듦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기대하며 묵묵히 신뢰해 보는 신실함.

요새 올라오는 '홀리컴뱃'이라는 유튜브 콘텐츠를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습니다. 여러 참가자가 기독교의 진리를 교회 밖 사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변증하는지 겨루는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입니다. 한데 저는 '변증'이라는 행위가 사실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을 향해 이뤄져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왜냐하면 정작 복음서의 신뢰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도 복음서도 '믿고 싶지 않은' 소위 비신자가 아니라, '믿기 힘듦'을 끌어안고도 신실하게 교회와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자일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책이 기존의 신자들, 특히 신학적 사유와 합리적 탐구의 긴 터널을 지나는 경험을 하기 어려운 비목회자 교인들에게 안성맞춤인 변증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렵거나 복잡한 비평학적 논의를 다루지 않고 신학적으로 충분한 훈련을 거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변증을 펼쳐 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저자는 각 장마다 복음서를 둘러싸고 가장 자주 제기되는 질문과 도전을 선별해 뒀습니다. '왜 복음서는 네 권이나 정경으로 선정됐을까?'(2장), '예수의 가르침은 아람어에서 번역되면서 변질됐을까?'(5장), '복음서 사이에 상호 모순되는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7장) 등 정직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던져 볼 법한 합리적 의문들을 화두 삼아, 이를 입증하거나 반박하며 쉽게 풀어 설명해 준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죠.

또한 이 책에는 기존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 접하기 어려운 '외부 자료'들을 통한 변증 역시 충분히 수록돼 있습니다. 저자가 1장 전체를 할애한 비기독교 문헌들에 관한 내용이나, 3장에서 지명의 정확도, 인물 이름의 빈도수, 식물 용어 등을 언급하며 복음서의 신뢰도를 입증하는 단락은 신자들이 교회에서 듣기 어려운 이야기죠. 4장과 5장은 신학책을 좀 접해 본 소위 '고인 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문예비평을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평학적 방법론을 통해 복음서의 신뢰성에 대한 내적 변증이 수행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이처럼 이 책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신선하고, 상투적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알차게 다루고 있습니다.

3. '믿기 힘듦'을 깨뜨리고, '믿고 싶지 않음'을 넘어서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목회자의 삶을 살게 된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교인과 비교인을 만나면서, 사람들을 단순히 '신자'와 '비신자'로 구분하기보다 차라리 '믿기 힘들어하는 사람'과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는 게 더 유의미하다고 느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보통 교회 내 신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되고, 후자의 경우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꺼리는 소위 '비신자'가 대부분이었지만, 때때로 두 경우가 혼재하기도 했죠.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변증을 시연하는 대상은 주로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이지만, 정작 변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믿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아 고뇌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변증이란 교회 밖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내부를 향해야 하는 작업이었던 셈이죠.

애초에 믿음을 갖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이 책도 별 실효성이 없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상식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개진해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반면에 이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 혹은 믿고 싶지만 복음서에 관한 '흉흉한' 소문을 많이 접해서 정말 믿을 수 있는지 의구심에 빠져 있는 사람, 그 '믿기 힘듦'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라면, 저는 신학도이자 목사로서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추천할 것 같습니다. 목회적 관점에서 적실하고 신학적 관점에서 탄탄한, '신자들을 위한 훌륭한 변증서'이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회의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덮어 놓고 믿는 맹신적 태도야말로 아름다운 기독교 신앙을 사회적 해악으로 탈바꿈하는 누룩이죠. 그러나 신앙인을 자처하는 사람 중에도 복음서의 신뢰성을 폄하하고 예수의 역사성을 거부하는 일이 마치 멋지고 '힙한' 자세인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믿지 못할'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그것을 나열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지성이 예수의 가르침보다도 더욱 빛나는 신앙의 요소라고 착각하기도 하고요.

보수적인 목사로서 제가 그런 신앙의 형제자매에게 드릴 수 있는 권면은, "복음서를 신뢰함으로써 불필요한 혼돈의 바다를 잠재우는 '쉬운 길(이 표현은 저자 또한 수차례 반복하고 있습니다)'을 택하시라"는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은' 분이 아니라, '믿고 싶은데 아직은 그게 힘든' 분이라면요. "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본 기억은 있지만 그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변을 들어 보지 못한 신자들에게, 저는 "YES"라는 대답과 함께 이 책을 건네주고 싶습니다. 힘내라는 파이팅 모션과 더불어서 말이죠.

정우조 / 부산에 소재한 대안 교회 '광야그리스도인공동체'의 일원이자 예배 섬김이로 살아가는 사람. '기독교 이단' 말고 '극진공수도 2단'을 목전에 두고 있는 MMA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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