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나이,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최초로 성공회대에 설치됐다. 성공회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는 3월 16일 교정에서 '모두의 화장실 준공식'을 열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성별, 나이,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최초로 성공회대에 설치됐다. 성공회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는 3월 16일 교정에서 '모두의 화장실 준공식'을 열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에는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프지 않거나 목이 마르지 않다는 거짓말, 자신의 성별과 다른 화장실에 들어감으로써 느끼는 모멸감, 비 오는 날 비 맞으며 다른 건물로 이동하며 느끼는 자괴감, 참고 참다가 결국은 몸에 생기게 된 방광염 등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려움을 다소 해소할 수 있는 시설이 생겼습니다."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성소수자 활동가이자 성공회대학교 총학생회 인권위원장·비대위원장을 역임한 이훈 씨가 '모두의 화장실'이 준공되는 날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성공회대(김기석 총장)가 국내 대학 최초로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했다. 모두의 화장실이란 성별, 나이, 장애 유무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 가능한 화장실이다. 겉으로 볼 때는 일반적인 공중화장실과 큰 차이가 없다. 화장실 표지판에 바지 입은 남성, 치마 입은 여성뿐 아니라 치마바지를 입거나, 아기 기저귀를 갈거나, 휠체어를 탄 사람의 픽토그램을 더한 것뿐이다. 기존 장애인 화장실을 확대해 놓은 것 같은 내부에는, 세면대·양변기에 더해 장애인들을 위한 각도 조절 거울, 접이식 의자, 비상 통화 장치, 점자 블럭, 기저귀 교환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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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 새천년관 지하 1층에 설치된 '모두의 화장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간을 설계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성공회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는 3월 16일 모두의 화장실 준공식을 열고, 7년간의 준공 과정과 의미를 소개했다. 모두의 화장실이 위치한 성공회대 새천년관 앞에서 진행된 행사에는 성공회대 학생·교수 등 학내 구성원 20여 명이 참여했다.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처장,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박한희 변호사, 대학노조 성공회대지부 류시태 위원장도 참석해 축하 인사를 전했다.

성공회대 국제문화학과에 재학 중인 우준하 씨는 지난해 결성된 모두의화장실을위한비상대책위에서 활동했다. 휠체어에 앉아 발언을 시작한 우 씨는 학교 건물에 장애인 화장실이 없어 불편함을 겪었던 시간을 회상하며 "이제야 학교 구성원으로서 존중받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천년관 화장실에 비데가 없어 미가엘관 화장실까지 가야 했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눈과 비를 맞고 화장실에 간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학교 구성원으로서 존중을 못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생겨서 정말 기쁘다"며 "우리의 목소리와 연대로 형성된 모두 존중받는 화장실 문화는 인권 친화적 대학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회대 구성원으로서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성공회대학교 총학생회 인권위원장과 비대위원장을 역임한 이훈 씨는 모두의 화장실 설치를 반대하는 학내 구성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토론회·강연·문화제 등 대면 행사를 열고, 손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훈 씨는 "마침내 성소수자가 사람이라는 것과, 사람은 화장실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학교 구성원이 화장실 문제를 겪고 있다면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 우리 모두가 합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성공회대학교 총학생회 인권위원장과 비대위원장을 역임한 이훈 씨는 모두의 화장실 설치를 반대하는 학내 구성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토론회·강연·문화제 등 대면 행사를 열고, 손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훈 씨는 "마침내 성소수자가 사람이라는 것과, 사람은 화장실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학교 구성원이 화장실 문제를 겪고 있다면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 우리 모두가 합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진보적인 대학으로 알려진 성공회대에서도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하는 과정은 지난했다. 2016년 학내에서 누구나 차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모두의화장실TF'를 꾸리고, 2017년 총학생회 '바다'가 모두의 화장실 설치 안건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재원 마련 및 일부 구성원의 우려로 무산됐다. 이후 2021년 5월 모두의 화장실 설치 안건을 다시 제시한 제35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손 편지를 쓰고, 문화제를 여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며 학내 구성원을 설득해 나갔다. 결국 지난해 10월 대토론회 개최에 이어 11월 성공회대 처장단 회의에서 설치 안건이 확정됐고, 올해 1월 공사를 시작했다.

모두의 화장실 설치를 위해 힘써 온 이훈 씨는 "심장이 터질 듯한 벅참과 동시에 이날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동시에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모두의 화장실은 학내 소수자들도 화장실을 갈 수 있게 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 소수자 인권을 진보시키는 정치적 공간이라며 "성공회대는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거침없이 사랑하며 있는 힘껏 포용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했다.

모두의 화장실은 학교가 소수자에게 특혜를 베풀거나 양보한 게 아니라고 했다. 이 씨는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만드는 건 교육의 장인 학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아직 한 칸에 불과한 모두의 화장실을 학내 모든 건물에 만들어 달라"고 제안했다.

지난해 <나의 오줌권에 대하여>(한국다양성연구소)를 펴내고 성공회대 모두의 화장실 설계에 참여한 김지학 소장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모든 대학으로 뻗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미국·일본 등에는 대학과 공공 기관 건물에 '유니버셜 디자인', '배리어 프리(무장애 시설)' 등의 형태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보편화해 있다. 그는 성별 이분법적이고 성인 중심적인 화장실은 소수자를 배제하는 사회 모습과 닮았다며, 모두의 화장실이 공간의 변화를 넘어 인식·제도의 변화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행사 참석자들이 모두를 위한 화장실 표지판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행사 참석자들이 모두를 위한 화장실 표지판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박한희 변호사는 모두의 화장실이 성별 고정관념으로 불편함을 겪는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만을 위한 화장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장애인 화장실이 생긴다고 비장애인들이 그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게 아니지 않나. 모두의 화장실은 누구나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며 "찬반을 논하기보다 실제로 써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불편한 점이 있다면 개선을 요구해 달라. 그렇게 모두의 화장실은 하나의 사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학, 나아가 사회 전체로 확산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모두의 화장실이 성범죄나 사회적 낙인을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실제로 보수 개신교계는 모두의 화장실이 공중도덕을 무너뜨리고 성별을 해체한다며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박 변호사는 "화장실 때문에 성별이 없어진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실제로 머리가 긴 남자나 머리가 짧은 여성이 화장실에서 거부당하는 일도 많다. 모두의 화장실은 인권을 축소하는 게 아니라 확장하는 개념"이라고 반박했다. 또 해외에서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한 후 성범죄가 늘어났다는 통계 결과는 거의 없다며, 불법 촬영 탐지 등 보안 대책을 마련해 이러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성공회대 김기석 총장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화장실 사용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학내 구성원들이 있어서 그동안 안타까웠다"며 "추진 과정에서 다소 미흡한 점도 있었지만 학내 구성원 토론회 등 숙의 민주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모두의 화장실을 만들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학내의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공존하는 방식을 배우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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