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신학] 코로나19가 불러온 뜻밖의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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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뉴노멀;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입니다. |
개인적으로 2020년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마음이 평안으로 가득했다. 갱년기 여성이라 이유 없이 찾아오는 우울감에 쉽게 농락당하던 나로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마음의 봄날을 경험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나만의 반전으로 '은밀하게 위대하게' 도달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사람은 모름지기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어른들 충고를 신봉했다. 결혼 후, 지방 소도시에서 사역하던 남편이 수도권 신도시로 이동했을 때, 드디어 지방을 떠나 더 큰 세상으로 간다며 설렜다. 신도시를 떠나 미국에서 유학할 기회가 생겼을 때도, 좁은 한국을 떠나 세계를 누빌 생각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더 넓은 곳으로 가서 삶의 반경이 넓어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좁아졌다. 소도시에서는 '도시 전체'가 내 손바닥 안이었는데, 신도시에서는 교회와 집을 중심으로 한 '동네'가 삶의 반경이 됐고, 미국에서는 '신학교 안'으로 더 좁게 국한됐다. 유학 생활을 마친 후, 교통망·인터넷·인맥이 훨씬 촘촘하고 더 넓은(?)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어 기뻤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자 이내 내가 애써 당도한 '큰물'은 몇 평 안 되는 사무실로 귀착됐고, 거기서 소수 사람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큰물'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인간은 '큰물'이라는 환상에 농락당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더 위대한 일을 하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의 병을 앓아 가면서도 '큰물', '넓은 세계', '높은 꼭대기'라는 신기루를 좇아 달려왔는지 모른다.
코로나19는 이런 끝 모를 달음박질을 멈춰 세웠다. 비행기가 결항하고 모임을 제약받으면서 외출도 절제해야 했다. 내 2020년은 많은 일로 옹골차게 준비돼 있었다. 5월 유럽에서 열리는 '메노나이트 교회 컨퍼런스'에 참가할 예정이었고, 서울에서 열리는 큰 컨퍼런스, 한국교회 여성 리더십을 세우는 '시스터 케어 세미나' 등 환대·평화 관련 사역이 내 일정표를 채웠다. 빡빡한 일정이 내가 유능한 사역자라는 걸 증명해 주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코로나19는 모든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게 했다.
처음에는 혼돈과 두려움이 있었다. 이런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애도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모든 사역을 중지한 상황에서 '어떻게 내 정체성을 찾고, 가치를 증명해야 할지' 두렵고 막막했다. 하지만 한 달 정도 지나자 마음속에 큰 평안함이 찾아왔다. 내 정체성과 가치가 '바쁜 스케줄', '복잡하고 두터운 인맥', '일을 완수하는 능력'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유명 목회자·강사들과 통성명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는 찰나의 희열이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말해 주는 줄 알았지만, 그런 피상적 관계가 쌓일수록 오히려 피로감이 더했다. 뜻하지 않은 코로나19의 등장으로 식구들과 함께 먹고 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자, 그간 느낄 수 없었던 평안함이 찾아왔다. 피상적 관계의 확장보다 가까운 사람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나의 사역도 달라졌다. 사람 수는 사역과 모임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었다. 많은 인원은 오히려 위험했다. 한두 명이 모여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구조로 변했다. 진심이 통하는 만남의 가치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평가를 염두에 둔 '보여 주기식 사역'은 강제 퇴출당했다.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만남을 시작하며, 일방적 전달이 아니라 상호 소통·공감하는 대화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터득했다. '얼마나 많이 아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잘 소통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진심이 통하는 투명한 만남이 일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행복을 느끼게 해 줬다.
평안함과 행복감이 주는 여유에서 비로소 예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가 말한 삶의 가치가 깨달아졌다고나 할까. 목사이자 선교 단체 총무로 일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큰물'에서 놀기 위한 욕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고, 스트레스를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그동안 '갱년기'를 앞세워 자주 몰려오는 우울감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예수가 삶의 중심이 되지 못했던 내 업적 중심 삶을 들춰냈고, 내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큰물'이 아니라 '예수'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변화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뉴노멀'이라는 도전에 적응하도록 부추기고 있지만, 삶의 방향은 여전히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 세상이 심어 준 '큰물'의 환상에서 벗어나, 최종 목적지를 그리스도인 정체성·가치를 드러낼 '예수의 정신과 삶'에 맞춘다면, 뉴노멀이 불러온 변화가 뜻하지 않은 회심을 낳을 수 있다고 내 경험이 말해 준다.
문선주 /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 총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