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3월 17일, 사순절 다섯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51:1-12 / 예레미야 31:31-34 / 히브리서 5:5-10 / 요한복음 12:20-33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합니다
Chiharu Shiota, 'The Web of Time'. 사진 출처 xinhuanet.com
Chiharu Shiota, 'The Web of Time'. 사진 출처 xinhuanet.com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배하러 온 그리스인들은 예수를 만나 보고 싶어 빌립에게 청합니다. 무슨 소식을 들었길래 예수를 '보려고' 발걸음을 한 걸까요. 그들은 분명 예수를 보기 전에 '듣는 행위'가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에게 들었던 예수의 존재를 이제는 실제로 보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것이었지요. 들은 존재에서 보는 존재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향해 거리는 좁혀져야 하고, 시간은 폭넓게 확장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까지 어떠한 경로로 왔는지 모르나, 그들은 시간을 들이고, 그에 따라 거리를 좁히고 좁혀 예수의 제자 빌립에게까지 당도합니다. 그리스식 이름을 가지고 있던 빌립. 그는 마치 헬라인들과 예수를 연결해 주는 중간과도 같은 인물로 보입니다. 저자 요한은 그들의 정체성과 출신은 먼 곳으로부터 낯선 것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듣는 행위에서 보는 행위로 나아오는 이들의 움직임은 다만 예루살렘에 예배뿐 아니라 예수라는 '원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풍경을 보여 줍니다. 헬라인들은 원의 중심에 이를수록 희미하던 예수 얼굴의 안개가 점차 걷히고 보다 선명히 보일 거라 생각했겠죠. 과연 그럴까요? 그들은 예수의 가장 주변인 제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중 헬라인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을 지닌 빌립까지 결국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요 12:21)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들의 방문 소식을 들은 예수는 시간의 종말에 대한 말을 하지요. 그 종말은 다름 아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 즉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를 보고자 했던 헬라인들의 걸음의 도착으로 비로소 시간의 만기가 되는 것처럼 말하셨죠. 예수는 해질녘 같은 저녁의 끝자리에서 지는 해와 거뭇해지는 어둠의 경계에 계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다 찬 상태. 그것은 무엇일까요? 시간은 애초부터 그 용량이 정해져 있던 걸까요? 예수는 종종 '때'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때'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 2:4, 공동번역)

현재를 넘어선 시간의 끝을 예수는 동시에 보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지요. 첫 번째 표적을 보이셨던 가나의 연회장에서 언급한 '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시간이 열리는 순간을 가리킨 것이었으니까요. 예수의 공적인 사역이 마무리가 되는 때에, 시간이 다 되었다는 고별의 메시지는 이어서 시간을 입은 한 알의 밀이 가진 숙명의 이야기로 연결이 됩니다.

한 알의 밀이 시간과 맺는 관계 
Capsula Mundi, 'How to make a haunted forest'. 사진 출처 frightfind.com
Capsula Mundi, 'How to make a haunted forest'. 사진 출처 frightfind.com

작은 씨앗이 품고 있는 생명의 원천은 광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씨앗이 시간을 만났을 때 가능한 일이지요. 혹독한 계절을 버티고, 땅의 기운에 그 몸을 온전히 맡기는 것, 줄기와 잎을 틔워 내는 변화를 감수하는 것, 이윽고 열매를 얻기까지 그것은 모두 시간을 감내하는 일이고 올바른 때를 기다리는 일일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심기는 것이 죽음과 다름없다는 말 속에는 죽음은 곧 생명의 시작이고 시간을 얻은 생명은 더 많은 열매로서 생명을 틔운다는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한 알의 밀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본 예수는 곧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할 때를 안 것이고,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너희를 위한 것'임을 알고 계셨죠. 때를 아는 자, 생명을 기꺼이 버린 자가 영원함을 얻게 됨은 자연의 순환 안에서 끝도 없는 밀의 탄생을 이미 보고 계시는 듯했지요. 예수의 눈동자에는 한 알의 밀 속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생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제자들과 헬라인들은 쏟아지는 밀알과 같은 말들을 주워 담기 바빴지, 그 눈동자 안에 즐비한 밀알의 영원성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곁에서 같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요 12:27-28a, 새번역)

아버지의 목소리를 아는 것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 때가 임박한 것을 알고 있는 예수의 목소리는 단호하지만 떨림이 느껴집니다. 다가올 종말의 시간을 아는 존재는 그것을 피할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지만, 의연히 그 때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것으로 자신을 맡깁니다. 자신이 맞이하게 될 밀알의 운명을 미리 앞당겨 보고 있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요 12:28b, 새번역)

하늘에서 들리는 거룩한 아버지의 음성은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담겨 있는 소리였습니다. 이미 성취된 영광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영광 사이에 놓여 있는 밀알의 존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음성, 구원의 소리는 사람들에게 제각각 들립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천둥소리로 듣습니다. 두려운 소리는 땅과 몸을 울려대며 등장했습니다. 느닷없이 들린 거대한 음량을 들은 사람들은 몸을 숨기거나 움츠렸지요. 어떤 이들은 천둥이 아니라 천사의 소리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표적은 늘 하늘의 천사와 동반하는 것이라며 거드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 누구도 그 소리가 자신들에게 들려지는 말임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한 알의 밀로서 종말의 때를 아는 존재, 그것을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실 것을 아는 존재에게만 아버지의 목소리로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온 음성이다." (요 12:30, 공동번역)

아버지의 음성을 아는 아들은 세례터에서 들은 그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산꼭대기 구름 사이에서 동일하게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듯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7, 17:5)

여전히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영광스럽게 한 것과 앞으로도 영광스럽게 할 것을 지속적으로 진동하여 울립니다. 사랑하는 이의 소리는 그런 것이죠. 사라지지 않고 날아가지 않는 것이지요.

그대여, 살아 있는 동안 빛나오 
'Song of Seikilos'. 사진 출처 antigonejournal.com
'Song of Seikilos'. 사진 출처 antigonejournal.com

고대 그리스의 유물로 1883년 튀르키예 에페소스 유적에서 발견된 '세이킬로스의 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를 그 몸에 새기고 있습니다. 비문에는 1~2세기쯤 살았던 세이킬로스(Σείκιλος)라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고 이 악보의 실제 작곡자로 추정하고 있지요. 발굴학자들은 노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그의 사랑하는 아내 에우테르페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노래를 묘비에 새긴 것으로 보고 있어요. 묘비에 적혀 있는 음의 높낮이와 길이를 통해 가락과 더불어 새겨진 가사의 내용은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빛이 나는 존재로 살길 바라고, 삶에 결코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며, 인생은 짧고 시간은 곧 저물어 감을 적고 있습니다. 죽음을 기리는 묘비 위에 살아가는 동안에 빛이 날 것을 새기다니요. 생의 모든 것이 저물고 난 뒤에 비로소 세워지는 묘비에다 슬픔에 젖지 않고 빛이 날 것을 새기다니요. 세이킬로스의 역설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땅속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세이킬로스의 비문에 적힌 노래는 호주의 작곡가 루크 하워드(Luke Howard)가 새로 작곡한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While you live'이라는 곡으로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표됩니다. 작곡 의뢰는 바로 소프라노 박혜상이 한 것이지요. 그는 팬데믹 기간 극심한 두려움의 감정을 겪게 됩니다. 죽음에서 비롯한 두려움의 시간은 죽음의 과정 등에 몰입하게 됩니다. 후에 박혜상은 긴 시간 동안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진실에 다다르게 하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감정임을 알게 되었고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떠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신비로운 꿈을 꾸게 되는데 '라 트라비아타' 중 '지난날이여 안녕'을 부르며 물속으로 고요히 가라앉는 꿈을 꾼 것이지요. 깊은 물속에서 죽음에 임박한 것 같은 시간을 느꼈을 때 오히려 편히 숨을 쉬며 유영하는 자신을 보고, 삶과 죽음을 새로이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죽음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없이는 삶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깊은 감사가 제 영혼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1)

사순절 다섯째 주 경건한 청음은 박혜상이 부르는 오래된 새 노래, 루크 하워드의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While you live'입니다. 한 알의 밀로서 시간의 '때'를 알고 계셨던 예수,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신 예수, 아버지의 음성 속에서 그분의 사랑하심과 영광스럽게 하심을 들으셨던 예수와 함께 들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기 위해 걸음 한 헬라인들과 이 고대 그리스 '세이킬로스의 비문'을 함께 보면서 들어 보시지요. 

 Ὅσον ζῇς φαίνου
μηδὲν ὅλως σὺ λυποῦ
πρὸς ὀλίγον ἐστὶ τὸ ζῆν
τὸ τέλος ὁ xρόνος ἀπαιτεῖ

While you live, shine
have no grief at all
life exists only for a short while
and Time demands his due

그대여, 살아 있는 동안 빛나오
결코 슬픔에 젖지 말기를
삶은 찰나와 같고 
시간이 그 마지막을 청할 테니

곡. Luke Howard : While you live
시. From Seikilos’ Epitaph

주)

1) 2024년 2월 2일 멜론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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