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3월 3일, 사순절 셋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19 / 출애굽기 20:1-17 / 고린도전서 1:18-25 / 요한복음 2:13-22 

두 대의 피아노가 있습니다. 첫 피아노에서 먼저 소리를 내기 시작하죠. 그리고 저 쪽의 피아노는 그 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는 겁니다. 4도, 5도, 3도, 2도, 3도, 4도….4도, 5도, 3도, 3도, 3도, 5도. 음의 도약이 일어나는 동안 그저 듣습니다. 차분함과 반복이 어떤 투명한 파형을 만들어 내고 이것은 물 위로 번지는 동심원 같기도 하죠. 계속되는 패턴을 귀로 듣고 있던 반대쪽의 피아노가 메아리처럼 나타납니다.

Hibari의 첫 도입부 1~4마디.
Hibari의 첫 도입부 1~4마디.

곡이 시작한 지 다섯 번째 마디에 이르러서 나온 등장입니다. 이쪽의 피아노를 따라하여 나오는 저쪽의 피아노는 네 마디를 꾸준히 듣고 있다가 그에 응답을 하는 거죠. 다섯 번째 마디, 다시 처음의 노래가 반복되는 순간에 곧 이어 반박자 늦게 그것을 모방하며 자신을 드러냅니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처럼 등장한 소리는 첫 피아노의 소리를 망칠 것도 같지만 혹은 먼저 있던 소리를 뒤덮을 것도 같지만, 우려와는 달리 어떤 공격도 저항도 없이 그저 두 대의 피아노는 나란히 투명한 파동을 그려 갈 뿐입니다. 네 마디동안 일어나는 도약의 파동은 서로 거울을 바라보는 듯 꼭 닮은 채 번져 나갑니다. 

Hibari의 피아노 2가 등장하는 5~8마디.
Hibari의 피아노 2가 등장하는 5~8마디.

시간이 흐르면 어떤 것이 첫 번째 피아노였는지, 어떤 소리가 무엇을 모방을 하는 것인지, 어떤 소리가 메아리였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아득함이 찾아오죠. 이제 두 악기는 구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쪽에서 저쪽에서 주고받는 소리는 처음의 것과 나중의 것이라는 경계가 사라진 채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 소리가 풍경(風景)으로 펼쳐질 뿐입니다. 시간차로 오는 환영(幻影)은 지속에 대한 꿈을 꾸게 하죠. 주제가 모방되어 오던 것은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 본질과 재현이 뒤엉켜 제3의 덩어리가 되어 하늘을 굴러다니는 겁니다. 무게도 맛도 질감도 없는 것들이 영원을 담고 있는 하늘을 구르는 것이 지속되다 보면, 끝까지 울리는 것들, 사라지지 않는 것들, 표현할 수 없는 것들, 공간과 시제가 없는 것들, 처음과 끝이 이어진 것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한을 본 것 같은 시간은 연주되는 고작 9분 동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아이러니는 두 번째 피아노가 마지막으로 첫 번째 피아노를 홀로 쫓아가는 마지막 네 마디를 듣고 종지하게 되면 음악에 진입하고 방금 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주섬주섬 제목을 찾아보죠. Hibari. 히바리(ひばり)는 일어로 종달새라는 뜻입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종달새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

종달새. 종다릿과의 새. 몸은 참새보다 조금 크며 붉은 갈색이고 검은색 가로무늬가 있다. 뒷머리의 깃은 길어서 뿔처럼 보인다. 봄에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면서 잘 울며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1)

본질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관점을 입혀 청각적 표현으로 이끌어 내는 것을 작곡이라고 정의한다면, 사카모토의 종달새는 사전에서 읽히는 새와는 다소 다른 존재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종달새 Hibari는 종달새의 소리를 묘사하거나 흉내 내지도 않았으니 말이죠.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청각적 정보를 음악으로 재현하는 것에 지극한 관심을 두어, 종달새 '되기 becoming'에 목표를 두고 작곡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소리를 채집하여 모방하고 재현하는 음악도 가능할 텐데 말이지요. 그러나 사카모토는 소리의 모방자로만 있기를 거부하고, 종달새를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소리로 내어 놓는 것에 관심이 있는 듯합니다. 관점이라는 용어가 어쩌면 음악을 이해하는데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그거야 리스너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니까요. 어쩌면 사카모토는 Hibari라는 곡을 Hibari 그 자체로 바라보고 있는 건데, 청자들에 의해 해석이 발생하고 본질과 현상을 나누어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음악가들은 그 많은 가능성에 대해 폐쇄적인 적이 없답니다. 서두에 풀어 놓은 Hibari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또한 음악에 대한 청자로서의 자유와 권능을 지니고 나름대로 해제했으니까요. 읽는 자, 듣는 자에 의해서 대상은 변모할 수 있으니, 모든 사물과 현상은 그 이면에 있는 이야기와 태초의 본질과 늘 긴장 상태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죠.

성전을 향한 시선 - 요한, 예수, 사람들
Alexander Smirnov, 'The Cleansing of the Temple'. 사진 출처 artandtheology.org
Alexander Smirnov, 'The Cleansing of the Temple'. 사진 출처 artandtheology.org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많은 것들이 집결합니다. 사람들과 동물들, 여행객들과 현지인들, 살아 있는 것과 곧 죽을 것들, 화폐와 거래, 율법과 경제. 집결되는 곳의 소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늘 있어 왔던 것들이죠. 그 모든 것들은 유월절 '되게' 만드는 것들이니까요. 너무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거래와 상식들은 유월절을 지탱하게 해 주니, 거기에는 다른 시선과 의견이 자리 잡을 틈이 없었습니다. 성전 세를 내기 위한 화폐교환을 위하여 환전상이 필요했고, 금리가 발생했죠. 이것은 시장경제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었죠. 순례객들을 위한 여관과 음식점, 제물을 팔기 위한 상인들도 도시의 경제와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고, 어엿하게 자리 잡은 것들이었을 테니, 어찌보면 예루살렘 지역 살림과 시민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견고한 구조가 유월절 등의 명절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얼어붙은 그곳에서 유월절의 의미 그리고 성전의 본질적 존재는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요? 두터운 시스템에 가려 그것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음을 예수는 알아차리십니다. 그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고, 동물들을 내쫓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엎는 역동은 이 모든 굳어진 외연의 것들을 해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채찍을 휘두를수록, 정교한 질서들이 부서지고, 그것들이 흩어질수록 그 모든 구조에 충성했던 자들은 놀라고 성전만큼이나 그들의 내면은 아수라장이 되죠. 이윽고 예수는 성전의 완전한 해체에 대해 말합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

유대인들의 시선은 여전히 물리적인 시간과 현상에 갇혀 있지요. 그들은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진 것이라며 나름 합리적 근거로 대응하니까요. 성전에 대한 유대인들의 시선은 본질을 잃은 지 오래이고, 성전을 향한 본래적 존재 의미는, 요한의 해석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21)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사명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술해 나간 요한은 성전 정화 사건을 두고, 이러한 해석을 숨겨 넣어 예수의 과격한 행동의 이유를 해명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행해지는 유월절 의식의 본령은 결국 진정한 어린양인 예수의 구속 사건과 연결 지어 주지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2장에는 성전 정화 사건을 두고 예수와 유대인들과 요한의 시선, 그러니까 해석이 서로 교차하는 장소인 거죠. 현상으로부터 본질 보기에 실패한 사람들과 본질 그 자체인 존재, 그것을 해석하는 존재의 시선을 이리저리 어지럽게 교차되는 복잡한 선들이 있는 곳 말입니다.

언약과 Hibari

성서 일과는 병행 본문으로 출애굽기 20장을 내어 놓으며 율법이 생기게 된 처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의 사랑이 이끌어지는 방식은 외연에 있지 않고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화해 왔고, 그 안에 있는 숨은 것을 보라고 촉구하는 것처럼요.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장치였고, 그 장치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즉 구원의 약속을 보기 위함이었죠.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율법 이전에 여호와의 언약으로부터 온 것이었지요. '종달새다움'을 통해 종달새를 표현하려고 했던 사카모토는 그의 앨범 'Out of Noise'를 통해 소음으로부터 음악을 찾아내는 시도를 합니다. '음악은 소음에서 나온다'는 그의 철학은 물리적으로 진동뿐인 소음 안에서 소리를 발견하여 들려주는 행위로써 음악이라는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달새의 반복적인 울림 안에 음악으로 치환할 요소를 발견하여 종달새를 느껴 전달하기까지의 행위는 종달새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자신만의 시선으로부터 출발하였고요. 그렇게 전달한 종달새 Hibari는 종달새의 소리를 모방한다기 보다는 그 속에 숨겨진 종달새의 본질적 요소를 사카모토의 발견으로 끌어낸 것이지요.

사순절 셋째 주일의 경건한 청음은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 1952~2023)가 2009년 발표한 앨범 'Out of Noise'의 첫 번째 곡 'Hibari'입니다. 두 대의 피아노 소리가 먼저 출발하는 소리와 시간차를 두고 늦게 출발하는 소리의 겹침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어떤 분위기' 속에서 종달새를 만나 보시지요. 예수를 해석하는 존재인 요한과 소음을 해석하여 음악으로 내어 놓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나란히 앉아서 들어 보겠습니다.

주)

1)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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