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3월 10일, 사순절 넷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07:1-3, 17-22 / 민수기 21:4-9 / 에베소서 2:1-10 / 요한복음 3:14-2

빌 비올라, 'The Dreamers'. 사진 출처 academyartmuseum.org
빌 비올라, 'The Dreamers'. 사진 출처 academyartmuseum.org

"내가 여섯 살 때 호수에 빠져 물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였어요. 아마도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다채로운 빛깔들의 향연이 있었고, 식물들이 저마다 움직이고 있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광경은 제 머릿속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마음의 눈으로 끊임없이 보는 그곳은 일종의 낙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것이 현실 세계라고 느꼈어요. 제가 운이 좋았죠. 제 삼촌이 날 물 속에서 들어 올려서 구해 줘서 살았으니까요. 이 사고로 난 인생의 표면 이상의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진짜는 표면의 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그 경험을 잊었어요. 그 경험은 겨우 여섯 살 때였고, 이미 인생에 엄청난 양의 정보와 이야기들이 있고, 실제로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이 쌓였으니까요. 생물학적, 정서적, 영적인 정보가 입력되었고요. 그래서 거의 잊어버릴 뻔한 기억이었는데, 30대 초반쯤 어떤 인터뷰 중에 질문을 받게 되었어요. 어린 시절에 대해 묻길래, 방금 이 에피소드를 말했죠. 그러자 인터뷰 하던 이가 제게 '아, 그래서 작품에 물이 등장하는군요'라고 말했어요. 난 그건 생각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1)

비디오아티스트 빌 비올라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물에 대한 작업을 많이 다루게 된 심리적 계기에 대해 이렇게 답변합니다. 물 속에서 보았던 찰나의 순간이 빌 비올라의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다수 작품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작품 '날이 갈수록 going forth by day', '트리스탄의 승천 Tristan’s Ascension', '표류자들 The Raft', '출현 Emergence', '꿈꾸는 자들 The Dreamers' 등등 그의 예술 세계를 드러내 주는 매체로서 물이 사용되고 있지요. 

빌 비올라, 'Tristan’s Ascension' (The Sound of a Mountain Under a Waterfall). 사진 출처 artlyst.com
빌 비올라, 'Tristan’s Ascension' (The Sound of a Mountain Under a Waterfall). 사진 출처 artlyst.com

물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감각을 통해 온 것임을 비올라는 경험했고, 그 한순간은 인생의 긴 여정 동안 떠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공명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공명은 거대한 기억과 현실 세계 사이의 긴장이지요. 수면 아래에 있던 기억은 현재를 추동합니다. 침윤되어 있는 기억은 여기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공명은 두 가지 에너지 파동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이죠. 기억은 반복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고 현실을 해명하는 데 나타나곤 합니다. 현상을 거꾸로 분석하게 해 주는 것도 기억이 반복될 때 나타나는 공명의 현상이지요. 거기서는 상식적인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가 뒤엉키기도 하고, 대응하기도 하지요. 물로부터 시작한 공명은 반복적인 기억으로써 감각의 재현이기도 합니다. 비올라의 작품들이 저마다 다른 표면을 지니고 있지만 물의 속성으로부터 오는 감각을 '보여 줌'을 통해서 작품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요. 최초의 경험자인 비올라는 물의 질감과 온도를 '느꼈고, 만졌지만' 그것이 재현되는 과정은 미디어 아트로 '보여 줌'의 형태로 바뀌지요. 역순으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보는 행위'를 통해서 다시 '느끼고, 만지는' 경험으로 회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는 행위'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 새로운 차원을 위해 예술가는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것이고요.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걷던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때, 그들은 하찮은 음식들이 싫다며 모세에게 원망을 드러냅니다. (민21:4-5) 이집트 삶이 기억의 대부분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삶은 그저 옛 시절보다 못한 것들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으신 여호와는 그들에게 불 뱀들을 보내고, 많은 백성이 불 뱀에 의해 죽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민21:6) 다수의 죽음을 경험한 백성들은 모세에게 이 뱀들이 떠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여호와는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명령하시고, 뱀에 물린 자들은 놋 뱀을 쳐다봄으로써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방금 내 가족을 물어 죽인 뱀을 쳐다보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백성들의 믿음은 '보는 행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이전의 뱀에 대한 인식을 부정함으로 재인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땅을 기어다니며 목숨을 빼앗아 갔던 뱀이 아닌, 장대 위에 높이 매달린 놋 뱀을 보는 것. 그것은 기억의 재현이라기보다는 떠나보냄에 가깝고, 삭제되지 않은 경험의 감각을 보존한 채 새로운 감각을 덧씌우는 과정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맞이했지요.

니고데모를 만난 예수의 답변은 이 부분을 반복하여 나타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3:14)

들리는 것은 예수 자신이며, 이것을 모세의 책으로부터 가져와 장대 위에 매달린 놋 뱀을 비유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와 놋 뱀을 평행적 비유 관계로만 놓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3:13)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망원한 하늘의 수직적 세계를 마음의 눈으로 보는 듯합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무한한 공간으로부터 땅으로 내려온 존재는 다시 그 영원한 공간으로 올라간다는 상상은, 그것을 보는 시선의 끝 또한 영원 속에 담길 수밖에 없겠지요. 이것은 몸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고요. 위로 '들리는 것'은 단순히 어딘가에 걸려 있음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장대 위에 매달린 놋 뱀이 '보는 행위'의 믿음을 통해 구원으로 이르게 했듯이, '들려진 인자'를 '보는 것'은 그야말로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일 테니까요. 

순교자들
빌 비올라, 세인트폴대성당에 걸려 있는 설치미술, 'Martyrs (Earth, Air, Fire, Water)'.
빌 비올라, 세인트폴대성당에 걸려 있는 설치미술, 'Martyrs (Earth, Air, Fire, Water)'.

좁고 긴 세로로 된 네 개의 패널에는 네 명의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은 모래와 바람, 불과 물에 고난을 받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외부의 공격, 즉 네 요소들이 순교자들에게 반복적으로 영향을 미칠수록, 그들의 표정이나 몸은 더욱 의연해집니다. 거센 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거나 그 일부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빌 비올라는 순교자 martyrs를 뜻하는 단어가 그리스 어원 '목격자 witness'에서 온다고 설명합니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가치와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 고난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이 작품을 목격하는 '보는 행위'를 통해서 순교자 표면 아래에 있는 진정한 의미의 '순교자'를 마음속에 심상으로 경험하게 된다고 밝힙니다. 작가의 어린 시절 물에 대한 경험은 일순간이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는 행위를 수만 번의 '반복'을 통해 경험한 것이 타인의 심상으로 옮겨져 가는 과정인것이죠.

반복repetition
스벤 헬비그의 '반복 repetition' 뮤직비디오. 유튜브 갈무리
스벤 헬비그의 '반복 repetition' 뮤직비디오. 유튜브 갈무리

공명되는 반복의 사건이 다른 존재에게 전이되는 것을 '공감'(共感)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타자의 감각이 나의 감각이 되는 것, 그 이전에 수만 번 진동되었던 것이 나에게로 와서 비로소 진동하는 것. 반복은 이렇듯 타자와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데 결정적입니다. 하나의 사건이 재생되고 재생된 후에 비로소 내게 오는 십자가 구원의 사건을 올해의 사순절도 반복해서 만날 수도 있을까요? 사순절 넷째 주 경건한 청음은 독일의 작곡가, 스벤 헬비그(Sven Helbig ,1968~)의 '반복 repetition'입니다. 그의 음악은 크사베리 키르클레프스키(Ksawery Kirklewski, 1988~)의 미디어 아트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과정으로서의 반복이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뮤직비디오죠. 단순한 선의 무한한 반복은 음악이 반복되면서 쌓아 올려지는 악기들과 리듬들을 시각화시킵니다.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니터 위에 어지러운 선의 반복은 선과 선의 관계를 만들고, 거리와 시간을 경험하게 합니다. 비정형의 선들은 곡이 끝나갈 때쯤 어떠한 형상을 보여 주죠. 그리고 그것의 소멸되는 과정을 역순으로 보여 주며 결국은 단순한 하나의 선으로 이 모든 것들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음악도 그 과정을 똑같이 배치하고요.

빌 비올라의 물의 경험이 마음속 공명하는 반복의 사건이었던 것처럼 스벤 헬비그의 음악 '반복'도 수많은 선들과 함께 재생됩니다. '보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었던 광야 위 사람들, 십자가 나무에 매달릴 것을 이미 심상으로 보았던 예수, 그리고 실제로 그 사건을 보았던 제자 요셉과 함께 스벤 헬비그의 곡, '반복 repetition'을 들어 보시겠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밤에 있었던 예수와의 영생에 대한 대화를 일생에 두고두고 반복하여 재생했을 것이에요. 그리고 지금도 그 진동은 반복되어 공명하고 누군가의 마음으로 도달하고 있겠지요.

주)

1) 빌 비올라 인터뷰: Cameras are Keepers of the Sou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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