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2월 11일, 산상 변모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50:1-6 / 열왕기하 2:1-12 / 고린도후서 4:3-6 / 마가복음 9:2-9

폴리나 크라예프스카, '예수의 변형'. 사진 출처 paulinakrajewska.pl
폴리나 크라예프스카, '예수의 변형'. 사진 출처 paulinakrajewska.pl

장소는 고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장소가 만드는 본래의 감정이 있습니다. 공간이 주는 분위기는 그곳에 있는 존재를 압도하고, 그 안에서 존재의 감각은 흠뻑 고양됩니다. 예수가 기도를 하기 위해 산으로 오르셨다(막 1:35, 눅 5:16, 눅 6:12)는 성경의 글귀를 읽다 보면, 그 행간에서 느껴지는 고유한 공기가 형성됩니다. 그것이 어떤 산이건 상관없지요. 유대의 어떤 산 혹은 성서를 읽는 사람이 떠올리는 산의 실재는 다를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산을 오르는 예수의 걸음 소리라든지, 날씨의 풍경, 들려오는 소리를 상상해 가며 글자의 문맥을 좇아가다 보면, 눈을 감은 예수의 눈꺼풀의 미세함이나 모은 두 손의 투박한 마디를 만나기도 합니다.

산을 오르시는 예수 뒤에 제자들이 따릅니다.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기 위해 산을 향해 걸음했던 지난 많은 날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산을 올랐어요. 비탈진 산의 허리, 앞 사람의 발뒤꿈치를 보며 숨이 차도록 오릅니다. 지상과는 달리 산세 속으로 들어오면 제각각 휘황한 그림자를 만나지요. 생경한 새의 소리나 어떤 구석에서 들리는 동물들의 인기척이 주의를 예민하게 만듭니다. 산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지상과는 멀어지고 하늘과는 그만큼 가까워집니다. 그렇게 도착한 산의 꼭대기는 이전에 없던 공기가 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늘과 땅을 새롭게 바라보게 해 주죠. 들이쉬고 내쉬는 숨으로 느껴지는 공기는 달큰하고 신선하여 그것을 만끽하다 보면 이 공간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운이 차오릅니다. 하늘에 펼쳐진 구름의 틈으로 빛줄기들은 자신을 감추지 못해 그 몸을 드러내고 구름은 모양을 바꾸며 빛의 너울을 이리저리 투과시킵니다. 사람들의 집이 작게 보이고 산의 능선과 바다의 교차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린 제자들은 맞닥뜨립니다. 희게 변형되어 있는 예수를 말이지요.

엘리야를 보는 눈, 모세를 보는 눈, 예수를 보는 베드로의 눈

산꼭대기에 걸쳐 있는 구름은 조각을 두고 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구름에 몸을 담았던 빛들도 산꼭대기에 고스란히 걸려 멈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것을 옷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요. 희다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요. 베드로는 처음 보는 광경에 그것을 묘사할 말을 부지런히 찾아봅니다. 평생 바다 위에서 살며 자연이 주는 다양한 빛을 보았고, 바다 위에 쏟아지는 무수한 별들의 빛을 보았었죠. 새벽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솟구치는 강렬한 태양 빛을 셀 수 없이 마주했었지요. 뜨거운 여름의 바다는 단 하나의 그늘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온전했고, 베드로의 살갗은 태양을 저항 없이 수용했던 감각의 결정체였습니다. 그을린 피부는 그 모든 시간의 증거였고요. 바다가 아닌 산 위의 베드로는 이전과는 다른 빛을 경험합니다. 빛의 광경은 시간을 순식간에 얼립니다. 베드로는 이 빛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지난 과거의 마주했던 경험과 신화 속에서 찾아보려고 애씁니다.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베드로 내면 안에 숨은 이야기와 저장되어 있던 옛 기억들이 하나둘 들춰집니다.

'변형된 그리스도'. 사진 출처 episcopalmaine.org
'변형된 그리스도'. 사진 출처 episcopalmaine.org

이윽고 여호와를 마주하는 떨기나무 앞 모세의 두 눈이 섬광 안에서 형체를 내밀었죠. 모세의 눈은 불타는 대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을 마주하는 베드로는 그 빛에 자신이 타 버릴 것 같습니다. 어느새 떨기나무의 뜨겁고 활활 일렁이는 빛은 베드로에게 옮겨붙고 말죠. 두 손을 바라봅니다. 손을 뻗어 허우적거리는 그 끝에 불수레와 불말들이 보이고, 그 곁에 엘리야의 몸이 빛 사이에 드러나고, 그 곁에는 희게 변형된 예수가 그 광경 안으로 들어옵니다. 한편 고개를 돌리니 함께 온 제자들이 두려움이 떨고 있는 것이 보이는군요. 황홀경은 본래 두려움을 동반하며 찾아오지요. 이글거리며 타는 모세의 눈빛이 형형하고 회오리바람으로 감싸여 있어 손을 대면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엘리야의 몸과 그 곁에 눈부신 광채 그 자체인 예수에게 베드로는 용기 내어 입을 떼 봅니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요.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 (막 9:5, 공동번역)

산꼭대기의 이곳은 베드로의 존재가 압도되는 시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이 기운을 이길 힘이 없으니 제자들은 그저 엎드려 떨고 있고요. 베드로는 지난 과거 어부로서의 자신과 그 과거 이전에 있는 유대의 서사 속에 존재했던 인물들이 한데 묶여 있는 이곳의 시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분명 저 아래 보이는 마을과 바다는 오늘을 보여 주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난 시간과 현재 어쩌면 앞으로 보게 될 미래를 한데 끌어 놓은 것 같은 광경이었죠.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이 시간을 영원히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에 거처를 마련한다면 그 영원의 한 조각이 되어 나도 이 빛의 일부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베드로는 생각해 봅니다.

구름 속 소리를 보는 베드로의 눈

마침 구름 속 빛의 줄기 사이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도 그 소리가 들리는가 봅니다. 고꾸라져 있던 그들이 얼굴을 들어 일제히 하늘을 쳐다보았거든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막 9:7)

소리의 근원은 분명 저 구름 속이었습니다. 그것을 샅샅이 살펴본다면 말씀하시는 이의 입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베드로는 생각합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수와 제자들뿐인 곳에서 베드로는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시는 이를 찾습니다. 베드로가 본 것은 구름 속 빛이었을까요. 아님 마음으로 관통하는 하나님의 빛이었을까요. 베드로가 본 것은 엘리야와 모세였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재현한 기억의 섬광이었을까요. 베드로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소리였을까요. 아니면 예수의 진정한 존재를 알아본 알아챔의 순간이었을까요.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분위기를 표현한다는 것
마크 로스코의 작품. 사진 출처 fondationlouisvuitton.fr
마크 로스코의 작품. 사진 출처 fondationlouisvuitton.fr

음악은 가사와 멜로디의 흐름을 가지고 서사를 보여 주고 전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떤 상황이나 분위기만을 포착하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자세히 묘사된 그림이 있는가 하면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처럼 텅빈 듯 가득찬 단색의 추상화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그림과 음악은 표현 양식을 변모하며 왔고, 오늘 함께 들을 음악도 미니멀리즘 태동에 도착한 한 작곡가의 '분위기'를 그린 음악을 들어 보려고 해요. 거기에는 이야기보다는 '인상'이 존재하고, 전개보다는 '포착'이 존재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대에 등장한 미니멀리즘 음악은 영화의 어떤 장면들의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마치 벽지인 것처럼,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리게티의 음악은 좀 더 심도 깊은 불편함이 있습니다. 배경이기엔 불안하고 생경하죠. 그의 음악은 어떤 거북함을 지니고 있어요. 모티브와 프레이즈는 마디를 분절시켜 주고 그것으로 인해 숨 쉴 곳과 끝을 가늠해 주지만, 리게티의 음악에서는 멜로디와 리듬의 모티브를 찾아 들을 수가 없거든요. 단지 어떤 톤(tone)이 존재하고 톤의 지난한 반복이 서서히 변화를 일으켜 주니까요.

빽빽한 감정의 밀도

오스트리아 작곡가 리게티는 루마니아 태생 유태인 음악가로 어린 시절 나치에게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 전부를 잃는 비극을 겪지요. 음악을 더 이상 공부할 수 없었던 그는 헝가리로 이주하게 되고 다시 비엔나로 탈출하게 됩니다. 시대의 압력 안에서 그는 다양한 지역적 정서들을 흡수하고 그만의 독특한 음악적 세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도시를 이주하며 살았던 이방인의 정체성은 그의 음악에 복합적이고 독특하게 드러납니다. 전자음악이 태동하는 시기를 맞이하며 그 또한 시대의 영향을 받게 되죠. 소리의 무궁한 반복과 동시에 거대한 악기들의 두터운 음향을 과감히 사용하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교차하고 혼잡한 소리들이 가득하고 그것은 거대한 음향 덩어리로 들리게 되지요. 덩어리 속에 든 다양한 박자들은 나름의 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리듬을 구분하는 것에 포기를 선언하게 되고, 나아가 음악의 서사 및 전개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암담함을 느끼게 합니다. 반복과 겹침 안에서 형성되는 소리는 리게티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게 됩니다. 1961년 이 곡이 초연되었을 당시 사람들의 충격은 사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요. 오프닝은 59개의 음을 다섯 옥타브 반에 걸쳐 오케스트라가 연주합니다. 분명 악기들의 연주인데 바람의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전자음의 비틀어진 소음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고음으로 치닫는 날카로움을 견딜 수 없을 지경에는 눈이 부시다 못해 눈이 멀 것 같은 소리의 밀도를 보여 줍니다. 현악기의 미세의 트레몰로는 관악기로 옮겨 가며 고음을 유지하다가 난데없는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으로 내리꽂히는 극적인 도약을 만들지요.(3분 40초경) 음의 단위들은 에너지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들이 점묘법처럼 어떤 면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빽빽한 감정의 밀도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Atmosphères, 악보의 한 부분.
Atmosphères, 악보의 한 부분.

산상 변모 주일을 보낸 이번 주 경건한 청음은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 1923~2006)의 '분위기'라는 제목을 가진 아트모스페레(Atmospheres)입니다. 예수의 세례로 시작된 주현의 계절은 지상의 물과 빛으로 시작해, 산꼭대기의 구름과 휘황한 빛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성자 예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대구법으로 천명하지요. 미몽의 공간과 시간, 가늠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눈부신 빛을 마주한 베드로와 제자들과 함께 벅차고도 생경한 현장에서 아트모스페레, 그 '분위기'의 질감 위에 서 있고 싶습니다. 섬광을 맞이한 뒤 찾아오는 얼마간의 암흑처럼 우리는 그렇게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 사순절을 맞이합니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의 실황으로 먼저 들으시고, 그 다음에 이 곡이 영화음악으로 사용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한 장면과 함께 이어서 들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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