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한스 멤링(Hans Memling, 1440~1494), '최후의 심판'. 사진 출처 National Museum (Gdańsk, Poland)
한스 멤링(Hans Memling, 1440~1494), '최후의 심판'. 사진 출처 National Museum (Gdańsk, Poland)

첫인상부터 강렬합니다. 섬세한 표현뿐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라는 작품 이름에서 풍기는 섬뜩함이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직전, 중세 말엽인 15세기 말 작품이어서 그런지 장면 곳곳엔 신화적 세계관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작가인 한스 멤링(Hans Memling, 1440~1494)은 지금의 벨기에 브뤼헤 은행 소유주였던 안젤로 타니의 주문으로 이 그림을 제작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 최고 거상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려고 이런 주문을 했는데, 그 은행이 바로 피렌체 메디치 가문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천상계

작품을 봅시다. 그림은 심판이 이뤄지는 중앙화를 중심으로 오른편엔 지옥, 왼편엔 천국으로 구분되는 전형적인 세 폭 제단화입니다. 가장 중요한 중앙화부터 봅시다. 전체적으로 하늘과 땅이 양분되는 구도입니다. 천상엔 최후의 심판 주인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 왼편의 마리아, 그 건너편에 무릎 꿇은 세례 요한이 보입니다. 열두 제자들 머리 위를 날고 있는 네 명의 천사 손엔 돌기둥/채찍, 십자가, 가시관, 창/망치가 있습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된 상징입니다. 이것으로 천사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중간에도 세 명의 천사가 보입니다. 이들은 천상의 천사와 달리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세상의 종말을 알리며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심판 주 그리스도는 황금 공 위에 발을 올리고 큰 링에 걸터앉아 있습니다. 황금 공은 지구든 태양이든 뭐로 해석해도 무방하지만, 황금색으로 처리된 의미가 중요합니다. 황금은 가장 거룩하고 영원한 것의 상징이라서, 거기서 나오는 빛이 어둠을 이기고 땅에 힘을 줍니다. 고대인들은 태양이 이런 황금 공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걸터앉은 링은 무지개입니다. 이 무지개가 하늘 왕국과 땅의 왕국을 연결합니다. 구약 성경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무지개로 상징되는데, 여기서 무지개 위에 앉은 그리스도는 물의 심판과 비교할 수 없는 최종적인 심판을 하늘과 땅 모든 곳에서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의 손을 봅시다. 펼쳐진 오른손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고, 하늘로 향한 손과 팔의 위치는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마지막 날 의인들에게 주어질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이 이렇게 묘사된 것이지요. 오른손과 달리 왼손 세 손가락은 땅을 향해 엎어져 있습니다. 이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리키는데, 악인에게 도래할 심판을 뜻합니다. 

특이한 것은, 개신교 교리에서 볼 수 없는 로마가톨릭교회 교리가 이 그림에 담겨 있다는 점인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무지개 양 끝에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기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를 통해 로마가톨릭교회의 중보자 교리를 엿볼 수 있게 됩니다.  

지상

중앙화 하단의 땅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땅의 색깔이 차이가 납니다. 왼편은 푸른 초장이 펼쳐 있고, 오른편은 황량합니다. 땅과 하늘의 경계선에 대천사 미카엘이 검은 갑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에서 이름이 거명되는 천사는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이렇게 셋입니다. 그중, 미카엘은 전쟁의 천사라서 악과 싸우기 위해 손에 칼을 든 모습으로 그려지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선 칼 대신 십자가 모양의 저울을 들고, 거기에 사람의 영혼을 달아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최종 심판을 수행합니다. 종말이 되면 죽은 자들도 모두 무덤에서 일어나 이 저울에 올라 영혼의 무게를 잰 다음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게 될 것입니다. 

이 그림에선, 두 사람이 저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악인은 어떻게든 저울을 무겁게 만들어 밑으로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가벼운 영혼 탓에 저울접시가 위로만 올라갑니다. 이에 반해 왼편에 있는 의인은 최후의 심판이 이뤄지는 이 순간에도 저울 위에서 기도하며 평온한 모습을 유지합니다. 그의 영혼은 묵직한 탓에 저울접시가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저울 위에서 영혼의 무게가 정해지면, 영혼이 가벼운 악인은 마귀의 채찍을 맞으며 영원한 불구덩이로 던져지고(오른편), 의인들이 천국 열쇠를 손에 든 문지기 베드로의 환대를 받으며 수정 계단에 올라섭니다(왼편). 그런 다음, 천사들의 환호 속에서 새 옷을 갈아입고 드디어 천국 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으로 의인의 최종적인 구원은 완성됩니다. 

심판의 주인

다시 중앙에 있는 심판 주 그리스도에게 주목해 봅시다. 얼굴 좌우편에 무언가 낯선 것이 보이는데, 백합과 불 칼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심판의 상징인데 백합은 순결과 축복을, 불 칼은 영원한 저주와 멸망을 뜻합니다. 이 둘은 의인과 악인의 운명이 될 천국과 지옥을 상징하는데, 백합과 불 칼이 그리스도의 얼굴 주변에 놓인 것을 통해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 최후의 심판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합과 불 칼이 등장하는 식의 최후 심판 묘사는 중세엔 통상적인 표현법에 속합니다. 이런 표현에 담긴 당시 메시지는 확실해요. 종말의 때를 진중하게 생각하면서, '백합을 손에 쥘 수 있는지, 아니면 불 칼을 맞을 것인지 지금 당장 생각해 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심판의 권한이 왕이신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이 제단화는 웅변합니다. 그분은 온 우주를 심판하며,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 위에 서 계신 분이라는 종말 사상이 여기 담깁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이 정도 되면 누가 뭐라 해도 그리스도는 왕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왕은 이 정도 막강한 능력과 권한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차마 왕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합니다. 출생부터 시작해서 젊은 시절 갈릴리 사역도 그렇지만, 빌라도 법정부터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장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왕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무너뜨립니다. 

이쯤에서 누가복음 23장을 조용히 묵상할 만합니다. 반항 한번 못하고 처형당하는 것도 바보스럽게 읽히지만, 이제껏 가르치고, 병 고쳐 주고,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비정하게 돌아서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장면에선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입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들! 여태껏 해 준 게 얼마나 되는데!'라며 욕지거리를 한바탕 해 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당사자는 억울하지도 않은지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이런 무력한 사람을 최후의 '심판 주', '만유의 왕'이라고 인정하는 신앙 자체가 우리에게 역설입니다. 왕이 아니라 '바보' 예수로 보입니다. 그 바보가 슬피 우는 여인들을 지나 해골산 십자가에 못 박히고, 거기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진 패가 높이 달립니다. 군인들이 그 밑에서 조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

나라면 달랐을까요? 우리도 충분히 저런 말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아요. 우리가 원하는 왕은 한스 멤링의 그림처럼 세상 위에 군림하고 호령하는 강력한 군주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의 눈이 가려져 이런 비천하고 무력한 사람을 왕으로 모시며 따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저 군중과 다르다'고, '나는 십자가 예수를 붙잡고 산다'고 늘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 아프게 돌아봅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 대신, 훔치고 강도질하는 예수를 구원자로 알고 환호하며 그 뒤를 따르는 건 아닌지, 그러면서 이걸 신앙이라고 확신하며 사는 건 아닌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예수는 주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내가 모시는 왕, '우리의 주님'이라는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종말의 때까지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는 '바보 예수'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때가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는 절대 군주가 아닌 절대 패배자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갑옷 입은 천사를 부리며 천상 위에 군림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빌라도 앞에서 모진 모욕을 당하고, 힘에 부친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제 죽을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는 바보 예수, 그렇게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어 가는 그 예수가 우리가 섬길 왕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이런 바보 왕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봅니다. 이 그림에서 15세기 유럽의 세계관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 양편에 그려진 백합과 불 칼을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불 칼을 피하고 백합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당시 교회는 그에 대한 일종의 해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잡든, 네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거예요. '최후의 심판 때, 네 영혼을 저울에 달아 볼 터인데, 선을 행하면 천국 가고, 악을 행하면 지옥 가게 될 것이니 각자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아주 오랜 역사가 있는데, 바로 이런 생각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 시스템과 연옥 사상이 생기게 됩니다. 물론 고대 교회의 교부 문헌에서도 '연옥' 사상을 찾아볼 수 있지만, 교부들이 언급한 연옥은 장소 개념이 아니라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사목적 차원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복음의 가치를 왜곡하여 교인들의 영혼을 위협하며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켰을 때, 교회는 타락했고, 이는 곧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됩니다. 중세 교회에서 백합과 불 칼은 신자 개인의 윤리와 도덕에 달려 있거나, 심하게는 교회에 돈을 얼마나 내느냐에 달려 있었지만, 개혁자들은 의인과 악인이 구분되는 시금석을 거기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돌려놓습니다.  

차별 없는 복음

한스 멤링이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그림엔 시대를 초월하는 복음, 즉 모든 인류가 그분을 믿어야 할 이유가 살짝 엿보입니다. 그림 오른편 하단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봅시다. 지옥으로 향하는 군중 속에 피부색이 다른 한 사람이 보일 겁니다. 흑인! 그런데 천국으로 가는 반대편에도 검은색 얼굴이 보입니다. 지평선 부근에 있는 이 사람도 흑인입니다. 그림 안의 모든 인물은 백인인데, 이렇게 두 사람만 흑인입니다. 

이 그림을 그렸던 15세기 말 유럽에서 흑인은 매우 드문 비주류였습니다. 중세만 하더라도 흑인에 대한 인식이 근대보다 나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소수자이기에 여러모로 불평등이나 불이익을 감수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수자가 천국이든 지옥이든 둘 다 갈 수 있다는 것은 멤링의 이 작품에 숨겨진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이는 곧 천국과 지옥은 혈통이나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국기와 성조기, 태극기를 힘차게 들어 올린다고 천국에서 알아주거나 보너스 포인트가 쌓이는 게 아닙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스라엘 국기와 성조기, 태극기를 힘차게 들어 올린다고 천국에서 알아주거나 보너스 포인트가 쌓이는 게 아닙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것은 이미 복음서뿐 아니라 바울서신에서 계속 강조되는 복음의 주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할례나 무할례로 의인과 악인이 구별되는 게 아니라고 확실히 해 둡니다. 확실히, 유대인이라고, 백인이라고, 미국인이라고, 부자라고, 학자라고, 목사라고 천국 보장받는 것도 아니고, 먼저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국기와 성조기, 태극기를 힘차게 들어 올린다고 천국에서 알아주거나 보너스 포인트가 쌓이는 게 아닙니다. 보이는 세계, 피부색이나 국적, 신분, 또는 우리의 노력은 천국과 지옥의 구분선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기준, 우리가 만들고 그어 놓은 울타리가 아니라, 그 기준과 선을 지워 버리는 은혜와 사랑의 법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기준입니다. 

멤링의 그림은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구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저울을 잡은 대천사 미카엘의 표정과 시선은 오랜 여운을 남깁니다. 그의 눈은 저울 위에 올라간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저울의 중심만 응시하며, 십자가의 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는지에만 관심을 둡니다. 저울 위 악인이 몸부림을 쳐도 흔들림 없이 십자가 중심을 바라보며 평형을 유지합니다. 이 냉정한 모습에서 우리는 공정한 재판관의 자세를 엿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이 대천사 미카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한 아래 있다는 것을 십자가 저울을 통해 보게 됩니다. 지옥이든 천국이든 십자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천국,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기준 되는 세계, 그리도 바보 같고 비천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에게 천국이 약속되었다는 것이 이 그림에 숨겨진 복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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