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경 민원실에서 설교를 준비한 경험이 있다. 반동성애 세력이 서울 퀴어 문화 축제의 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같은 날짜 같은 장소에 집회 신고를 하려 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집회 신고 1번 대기표'가 필요했다. 2015년과 2019년에 이은 '집회 신고 줄서기'였다. 나는 5월 28일 22시부터 24시까지 민원실을 지켰다. 민원실 내 의자에 주석서를 비롯한 책을 몇 권 펴 놓고 노트북으로 설교를 쓰며 자리를 지켰다.

혐오 세력들의 방해로 사람들이 돌아가며, 밤낮으로 민원실에 앉아 있는 것이 속상했다. 민원인을 맞이하는 경찰관들은 뭘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의 말에 그저 웃으며 "그러게 말이에요. 사는 게 참 힘드네요"라고 답했다. 우리들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 민원실에서 읽은 책 한 줄에 큰 위로를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책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길에는 고난과 핍박이 있으리라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어떤 때는 사랑에 대해 십자가 처형의 응답이 오기도 한다. 우리는 증오의 한복판에서도, 심지어 증오가 승리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사랑을 행하기로 부름 받았다. (중략) 예수는 우리에게 위험한 사랑을 행하도록 부르신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행할 때 우리의 삶과 타인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1)

'우리가 모두 사랑을 행하기 위해 있구나. 심지어 증오가 승리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제법 씩씩하게 사랑을 행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줄 서기가 마무리되고 퀴어 문화 축제도 예정대로 잘 치러질 수 있었다. 많은 이가 행한 사랑 덕분이었다.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 - 사랑이 혐오를 이겨 온 10년> / 구권효·나수진 지음 / 한티재 펴냄 / 250쪽 / 1만 6000원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 - 사랑이 혐오를 이겨 온 10년> / 구권효·나수진 지음 / 한티재 펴냄 / 250쪽 / 1만 6000원

책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한티재)를 읽으며 혐오 세력들의 방해 공작에 눈길이 머물렀다. 책 속에 담긴 자캐오 신부의 말처럼, 삶을 위로받고 나와 하나님을 이어 주던 종교적 언어가 혐오의 말로 재생산되는 순간들이 괴로웠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혐오의 장면들에 잠식되지 않고, 사랑을 행하는 많은 사람에게 주목해 보라는 것이다. 책에는 서울과 인천, 춘천, 광주, 부산, 경남, 제주, 대구 총 8개의 지역 단위 퀴어 문화 축제를 만든 이들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혐오의 한복판에서, 심지어 혐오가 승리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사랑을 외치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서 책을 읽어 가기를 권한다. 지독한 방해에도 꿋꿋하게 축제를 만들어 간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이 혐오를 이겨 온 10년의 기록에서 이제는 우리가 설 곳이 어디인지를 결정해 보았으면 좋겠다.

신학자 토마스 보헤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와 그를 환대하는 무리의 모습을 두고 퀴어 문화 축제의 행진을 떠올린다. 승리와 기쁨으로 들뜬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이 꼭 퀴어 문화 축제의 행진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지난 2월 '시드니 게이와 레즈비언 마디그라'라는 이름의 퀴어 문화 축제에 다녀왔을 때, 토마스 보헤치의 말이 더욱 이해가 되었다. 행진 참여자들이 도시의 가장 큰 도로를 걸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행진 코스를 둘러싸며 무지개 깃발을 흔들고 환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행진하는 사람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환영하고 그들의 삶을 응원했다. 보헤치의 눈에 무지개 깃발이 종려나무처럼 보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에 반해, 한국 퀴어 문화 축제의 행진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와 그를 환대하는 무리의 모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귀를 타고 행진을 하는 예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예수를 환대하는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환대하는 사람이 없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내가 알고 예수님이라면, 행진에 달려드는 혐오 세력들을 피해 가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결국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것이다. 혐오가 거세져도 하나님나라를 향한 걸음은 거스를 수 없었을 테니까.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를 읽는 여러분들이 자리를 정하셨으면 좋겠다. 책을 읽고, 가장 가까운 시일에 열리는 퀴어 문화 축제에 참여해 보시길, 신앙인으로서 성소수자의 동료 시민 '앨라이'가 되어 주시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를 반기던 사람들처럼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행진 참여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 보시기를 추천한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행할 때 우리의 삶과 타인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김유미 / '한국교회를 향한 퀴어한 질문 큐앤에이' 간사. 신학생이고, 전도사이고, 개신교 내에서 성소수자 인권 운동하는 활동가입니다. 종합해서 말하면 예수쟁이인 것 같습니다.

1) 데이비드 L. 바틀렛,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동연) 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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