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진격의 교인'들을 소개합니다. 성서가 강조하는 가치와 뜻을 실천하기 위해 일상에서 진격하는 크리스천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기독교의 역할과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박요셉 사역기획국장] 교회를 떠났을 때 그의 마음은 참담했습니다. 한때 그에게는 교단과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에 소속됐다는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거대한 예배당과 하늘로 뻗은 종탑, 그리고 그 안을 빼곡하게 채운 수만 명의 교인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창대한 하나님나라가 눈앞에 도래한 듯했습니다. 1997년, 교회가 부자 세습을 결의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양윤선 작가는 충현교회 세습 결의 이후 교회를 떠났습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때까지 성장기 대부분을 보낸 '집'과 같은 곳을요. 1997년 그 사건은 그의 자부심을 수치심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떠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그는 교회 모습을 기록하는 사진작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올해 충현교회 설립 70주년을 맞아 '이룬 잃은 일흔 그 집, 충현'이라는 주제로 사진전도 열 계획입니다.

같은 장면을 촬영해도 감정에 따라 사진의 질감과 온도가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교회를 바라보면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사진은 날카롭고 차가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사진은 피사체에서 한 걸음 떨어져 절제되고 차분합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떠난 교회 모습을 사진에 담고, 사진전을 여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8월 9일, 충현교회 종탑이 보이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카페에서 양윤선 작가를 만났습니다.

양윤선 작가. 교회 모습을 촬영해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양윤선 작가. 교회 모습을 촬영해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교회를 떠나다

#1. 1997년 5월 11일, 충현교회는 4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를 열었습니다. 담임목사 후보에는 김성관 목사가 올랐습니다. 김성관 목사는 교회 설립자인 김창인 원로목사의 아들입니다. 김창인 목사 은퇴 이후, 다른 사람들이 담임목사가 됐지만 그들은 모두 3~4년 만에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공동의회 사회를 맡은 김창인 원로목사는 무기명 비밀투표가 아닌 기립 투표로 찬반을 물었습니다. 수천 명 가운데 단 200여 명이 반대 의사를 표시하며 자리에 일어났습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양윤선 작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의견을 내기가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도 용기를 내어 반대 의견을 표하셨군요.

"오히려 떳떳했습니다.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대학부 교역자들과 선배들도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앞서 2·3대 담임목사님들이 물러나는 과정도 매끄러워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 공동의회가 끝난 이후 한동안 뒤숭숭했을 것 같아요. 그 이후에도 교회를 계속 다니셨나요?

"몇 년 더 출석했습니다. 제게는 대학부 공동체가 있었으니까요. 저는 '마을'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요. 교회는 제가 머무는 마을이기에, 비록 마음은 떠났지만 몸은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어요."

양윤선 작가는 대학부 생활 이후 군대와 유학을 핑계로 교회 밖을 전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독일에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떠났습니다.

— 1990년대 충현교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초대형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1997년 결의 이후, '대형 교회 세습 1호'라는 오명을 얻게 됐죠. 그 모습을 보면서 속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한때는 충현교회 교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컸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모두 불명예가 돼 버렸죠.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충현교회 출신이라는 사실이 주홍글씨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이후 들려오는 교회 소식들 중에는 부끄러운 뉴스들이 많았으니까요."

충현교회 첨탑. 사진 제공 양윤선
충현교회 첨탑. 사진 제공 양윤선
이주민들에게 우산이 돼 준 교회

#2. 김성관 목사가 청빙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는 분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김 목사는 아버지 김창인 원로목사와 장로들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중직자들을 제명·출교했습니다. 교역자 수십 명과 교회 직원이 해고되는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분쟁을 겪으면서 4만 명에 달하던 충현교회 교인은 수천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 작가님께서는 언제부터 충현교회에 출석했나요?

"가족들이 독산동에 살다가 1985년 역삼동으로 이사 왔습니다. 어머님께서 자녀들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원래 다른 교회에 출석했는데 거리가 멀어지니까 집에서 가까운 충현교회에 가게 됐습니다.

어릴 때는 교회에서 거의 살았어요. 토요일에는 성가대 연습, 수요일에는 학생 오후 예배가 있었고요. 주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배와 모임이 계속됐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임원도 맡았고, 찬양팀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알게 된 친구들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낼 정도입니다."

— 가족들 모두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신 것 같아요.

"그 시절 부모님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지역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셨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접점이라고는 거의 교회밖에 없었죠. 같은 구역 교인들이 저희를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셨습니다. 우리보다 연배가 높은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옷가지를 나눠 주셨고, 경조사가 있으면 서로 챙겨 줬어요. 품앗이 문화가 있었죠. 결국 이민자들은 교회를 통해 이웃들을 알게 되고 마을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마을회관 역할을 했어요."

교회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지만, 예배가 끝나면 서로 교제하고 어울리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양 작가는 그런 교회가 '마을회관', '큰집'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역삼동은 이주민들이 넘치는 '신도시'였고, 그중에는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모두에게 똑같은 쉼터가 돼 줬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재산이나 학력, 사회적 지위 등을 내세우며 서로 자랑하거나 평가하지 않았고, 상호 존중했다고 양 작가는 말했습니다.

— 제가 아무래도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 생각했던 강남의 부자 교회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네요.

"교회에서는 모두가 똑같았습니다. 저희 같은 가난한 이민자들도 위화감이 없이 다닐 수 있었죠. 교회에서 주는 국수가 그런 분위기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이든 자산가든 서민이든 예배가 끝나면 똑같이 국수를 먹었으니까요. 마치 성찬처럼 말이죠. 수백 명이 한 식당에서 공동 식사를 하는 모습은 그 당시 교회가 지닌 중요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이 식사하는 만나홀. 사진 제공 양윤선
교인들이 식사하는 만나홀. 사진 제공 양윤선
성찬 준비실. 사진 제공 양윤선
성찬 준비실. 사진 제공 양윤선
교회의 빛과 어둠

#3. 2012년 6월 12일, 김창인 원로목사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과거 무리하게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준 잘못을 인정하며 눈물로 사죄했습니다. 세습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한국교회에 공개적으로 회개한 목회자는 김창인 목사가 유일했습니다. 그의 모습에 교계와 사회가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 독일에 정착하셨는데 어쩌다가 충현교회 사진전을 열게 됐나요?

"제가 다니고 있는 독일 교회는 200여 명이 출석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나름 규모가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요. 제가 그들에게 한국에 있을 때 수만 명이 다니는 교회를 다녔다고 말하면, 다들 믿지 않습니다.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요. 이들에게 실물을 보여 주고 싶어서 2019년 촬영 차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 2004년에 독일로 가셨으니, 교회에 방문한 지 십 년이 넘었겠습니다. 오랜만에 교회를 보니 어떠셨나요?

"대형 교회를 향한 비판 의식이 강했을 때였습니다. 넓은 주차장, 거대한 외형을 보면서 '이게 쇼핑몰이지 교회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사진을 찍었을 때 독기가 가득했어요.

제가 그때 아홉 살 아이를 데려갔습니다. 친구에게 아이를 맡기고 촬영을 끝냈는데, 돌아오는 길에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아이는 본당 앞 돌 난간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놀고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 저와 똑같이. 그 순간 옛날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 어떤 생각들이요?

"일종의 에피파니(Epiphany)였던 것 같아요. 우리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 제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본당 앞 난간은 제가 어릴 때 어른 예배가 끝날 때까지 부모님을 기다리면서 놀던 곳이었거든요. 그 순간 교회를 향한 제 안에 증오심이나 냉소, 반감 같은 감정들이 사그라졌습니다. 그전까지는 이 교회를 단순히 강남의 값비싼 부동산 정도로 이해했는데, 사실 이곳은 나를 키워 준 '마을', 내가 자란 '고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양윤선 작가는 그때부터 교회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 거대한 예배당을 지었는지, 당시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건축에 뛰어들었는지, 그들이 기대했던 교회의 모습은 무엇이었는지 등을요. 독일로 귀국한 뒤에는 인터넷에서 교회 관련 기사를 찾아 읽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옛 지인들에게 <월간 충현> 같은 옛 교회 문서도 구했고요.

"지금은 우리가 여러 경험을 통해 대형 교회가 겪기 쉬운 위험을 알고 있지만, 1970~1980년대 교회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교인 한 명 늘어나는 게 축복이었고,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니까요. 교회 규모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할 단계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충현교회도 교인이 급성장하면서 더 큰 예배당이 필요하게 됐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겼습니다. 새 예배당조차 자리가 부족해 강대상 앞 바닥에 앉고 그랬으니까요."

본당 전면 입구 계단. 양윤선 작가는 계단 옆 난간에서 아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사진 제공 양윤선.
본당 전면 입구 계단. 양윤선 작가는 계단 옆 난간에서 아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사진 제공 양윤선

— 지금은 대형 교회를 향한 우려와 비판적인 시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님께서는 교회의 규모, 예배당 크기만으로는 교회를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저는 교회 건축물을 보고 있으면 당대 종교 에너지가 위치에너지로 변환됐다고 생각해요. 거대한 예배당은 성장하는 공동체의 필요였어요. 교회는 그 필요에 반응했던 거고요."

양윤선 작가는 자기 안에 있는 적개심을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자, 교회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1997년 사건은 교회를 오랜 시간 힘들게 했고, 자신을 비롯한 많은 교인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그렇지만 자신과 가족들이 교회에서 누린 소중한 경험 역시 부정하기는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교회를 이상적인 공동체로만 여겼거든요. 교회 사역은 무조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1997년 그 사건은 교회라고 해서 늘 옳은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가르쳐 줬어요. 그렇지만 저는 교회를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좋다' 혹은 '나쁘다'로만 판단하는 태도도 피하고 싶습니다. 그건 너무… 단순한 것 같거든요."

— 교회는 어떤 한 가지 면으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잖아요. 사진은 명암이 있어야 입체감이 생깁니다. 밝은 면만 담으면 너무 평면적이고요. 어두운 면만 찍으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 두 가지가 잘 포착됐을 때, 사실에 가까운 입체적인 인물과 공간이 나옵니다.

저는 이 집, 충현교회를 한때 밝은 면만 봤습니다. 어두운 면만 응시했던 시절도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 명암을 나란히 놓고 보기 시작하니까, 내면에서 교회와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긴 대화가 끝난 뒤에야 첫 질문 '사진전을 연 이유'에 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양윤선 작가는 오랜만에 찾은 역삼동이 어릴 때 살던 주택가 모습을 거의 상실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살던 집들은 모두 없어지고 새 건물들이 들어섰으니까요. 마지막 '집' 충현교회라도 지키고 싶어서 사진전을 기획했다고 했습니다.

충현교회 본당. 강단 중앙에는 마이크가 놓여 있습니다. 양윤선 작가는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사진 제공 양윤선
충현교회 본당. 강단 중앙에는 마이크가 놓여 있습니다. 양윤선 작가는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사진 제공 양윤선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이뤘나

#4. "충현교회는 기본적인 영성이 서민적입니다. 동대문시장을 중심으로 장사하던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충현교회의 기본 영성을 만든 분 중 중요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강남으로 이사 온 후에도 교회 기저에는 삶이 녹록하지 않던 주변 분들이 모여 서민적인 열심으로 교회를 세워 갔습니다. 이것이 충현교회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는 아픔도 경험했습니다. 열심이 특심이었던 몇몇 분들의 지나친 주인 의식 때문에 원치 않았던 어려움을 상당 기간 겪었습니다. 지난주 말씀 본문이었던 에베소서 4장 15절을 보면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돼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성도님들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됐을 때 예수님이 머리라는 이 말씀이 엄중한 말씀이 아니라 그냥 흘러 지나치는 말씀으로 전락해 교회에 아픔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전체가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 시대는 지금 어떤 변화를 준비하며 바라봐야 할까요." (한규삼 담임목사, 2021년 9월 21일 설립 68주년 예배 설교에서)

— 이번 사진전 주제는 '이룬 잃은 일흔, 충현'입니다. 상반된 의미의 두 동사가 70주년을 뜻하는 '일흔'과 비슷한 발음으로 대구를 이룬 점이 인상 깊은데요. 충현교회가 지난 시간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이뤘다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그 제목은 제가 전시장을 찾으시는 분들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질문과 답을 동시에 드릴 수 없지요. 그 답을 제 사진 안에서 찾거나, 사진 너머 다른 맥락에서 찾는 것은 오로지 관객들의 몫입니다."

— 작가님은 교회를 '집'이라고 여러 차례 표현하십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여러 가지 해석을 열어 두고 싶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마을회관 같았고, 마을 공원 같았지만 일주일 중 하루는 정말 문자 그대로 종일 '거주'한 곳이기도 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부르셨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제가 알기로 그 성전은 이방인인 헤롯이 건축했고, 종교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제가 제도권 교회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 앞으로도 교회 모습을 사진에 담으실 건가요?

"교회라는 주제를 여러 방향으로 확장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지금은 여러 예배당의 전면들을 촬영해 한 곳에 펼쳐 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곳은 공간이 예배의 형식을 결정하고, 또 다른 곳은 거꾸로 예배 방식이 공간을 변화시키는 것 같더군요. 공간과 예배 방식이 서로 긴장 관계에 놓인 곳도 있었습니다. 저는 '전례'라고 할 수 있는 예배 방식이 공간 형태로 육체화 혹은 가시화될 때 이런 긴장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척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인데, 앞으로 이 지점을 다룰 것 같습니다."

※ '이룬 잃은 일흔 그 집, 충현' 사진전 정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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