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나는 '신사도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평양 대부흥의 역사를 재현하고자 했던 'Again 1907' 운동이 한창이던 때 기독 청년으로 대학 시절을 보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는지 모른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함께 모여 부흥과 회개를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자리에 나도 함께했다. 물론 평양 대부흥과 같은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더 큰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고, 처절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부흥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평양 대부흥과 같은 부흥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 듯한 현장에도 있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치유·예언·방언·통변 등이 일어났다. 하지만 무언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 충분치 않음의 정체에 대해, 더 나아가 기독교와 성경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신학의 길로 들어섰다.

내가 처음 배운 신학은 나를 신학교로 이끌었던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던 내 눈에 들어온 책은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출간한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학자들의 책이었다. 존 도미닉 크로산, 마커스 보그, 존 쉘비 스퐁과 같은 이들이 제시한 예수상과 그리스도교의 모습은, 합리적이고 세상의 상식에 부합했으며 명쾌했다. 그건 또 다른 느낌의 신선한 바람처럼 느껴졌다. 한때 '성령의 역사'를 소망했던 내 열정은 '합리적 신학'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열정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들의 언어는 애초에 신학의 길로 접어들게 했던 내 경험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성경의 깊고도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어딘지 모르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얕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흐릿하게나마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나는 한 학자의 글을 접했다. 그 또한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였고, 그의 책 역시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왔지만, 그가 한 말은 다른 예수 세미나 구성원들 혹은 다른 '진보' 기독교 신학자들과 사뭇 달랐다.

"천사들, 영들, 정사들, 권세들, 신들, 사탄은 모두 다른 영적 실재들과 함께 우리 사회에서는 결코 말해서 안 되는 것이 되었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에서는 이런 것들을 위한 자리는 전혀 없다. (중략) 하지만 영적인 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것에 바로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영성의 우물들은 고갈되었으며, 이제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값비싼 시행착오 끝에 배웠던 것을 우리가 몇 세대 사이에 다시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한국기독교연구소), 38쪽]

다른 어떤 그룹보다 합리적인 기독교를 내세우던,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탐독하던 예수 세미나 소속 학자가 '영적 세계'를 말하다니! 물론 그가 말하는 영적 세계는 이른바 '보수' 개신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늘', 혹은 '천국'이 아니었다. 그는 (찰스 맨슨,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내면의 문제를 다룸과 동시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베트남전쟁과 같은)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를 연결하고 있었다. 이 신학자의 이름 '월터 윙크(Walter Wink, 1935~2012)'는 내 머리 깊이 각인됐고, 그처럼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신비와 경험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논리적인 언어로 설득력 있게 신학을 하는 이가 되어야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하지만 이 결심도 오래가지 않았다. 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적어도 의식 속에서 '월터 윙크'라는 이름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다시금 역사 비평의 후예가 되어, 성경을 공부하고 또 가르쳤다.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만이 성경의 참메시지를 '지금, 여기에' 되새기는 길이라 여겼다. 고등부 아이들을 상대로 창세기 원역사 강의를 하기도 했고, 마가복음의 기적 전승과 가르침 전승을 구분해 설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어느 날 내 설교를 들은 한 권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전도사님은 목사님보다는 교수님이 더 어울려요."

친절한 말투였지만, 내게는 그 말이 날카로운 예언자의 음성처럼 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전문가와 대중을 분리한 뒤 '무지한' 대중에게 '지식'을 알려 줘야 한다는 계몽주의 지식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성경 본문을 쪼개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재미가 들린 나머지, 그걸 '왜' 분석하고 연구하는지 잊고 있었다. 내 이야기는 '성경에 관한 지식' 혹은 '성경 본문에 관한 지식'으로서는 괜찮았을지 모르나, '말씀'으로 신자들의 삶에 닿지는 못했다. 예수 세미나 구성원들의 저서들이 그런 것 같다고, 내 삶·체험과 공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또 다른 예수 세미나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내 고민에 방점을 찍어 준 것은 세 명의 은퇴 권사님과 함께한 성경 공부였다. 성경 공부 시간마다 '성경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던 내게, 권사님들은 '말씀'을 내놓으라며 아우성쳤다. 성경 공부가 끝나면 권사님들은 자신의 굴곡진 삶을 형성했던 말씀의 역사를 증언했다. 그 사건은 내게 '성경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해 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삶과 마주하는 '말씀'이 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는, 오래지만 새로운 진리를 일깨워 줬다. 역사 비평의 유산을 익히면서도, 끝내 역사 비평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이정표를 다시 발견한 것이다.

이후 나는 내게 잊힌 학자가 쓴, 오래됐지만 새로운 저작을 만났다. 무려 50년 전에 출간된 <성서는 변혁이다>(비아)였다. 내가 신학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 만난 월터 윙크의 책보다 더 이른 시기에 쓰인 이 책은, 흥미롭게도 내가 성경을 학문적으로 읽기 시작하면서 마주한 문제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성서는 변혁이다 - 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 / 월터 윙크 지음 / 강성윤 옮김 / 비아 펴냄 / 180쪽 / 1만 2000원 
<성서는 변혁이다 - 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 / 월터 윙크 지음 / 강성윤 옮김 / 비아 펴냄 / 180쪽 / 1만 2000원 

<성서는 변혁이다>에 따르면, 역사 비평은 성경 본문의 원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과거 대다수 사람은 교회 전통에 근거해 성경을 읽어 왔다. 달리 말하면 교회 '전통'이라는 눈을 통해, 교회 '경전'이라는 틀 아래서 성경을 읽은 것이다. 그 결과 성경 본문을 기록한 저자의 본래 의도와 본문이 기록됐을 당시의 맥락은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 비평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탐구하면서 원의미를 밝혀내려고 애썼다. 그를 통해 우리는 여러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됐고 지금도 알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부작용과 왜곡을 낳았다. 본문의 역사적 의미에 너무 무게를 둔 나머지, 성경을 읽는 본래 이유와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월터 윙크는 역사 비평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역사 비평은 진리(truth)를 한낱 사실(fact)로 격하하고 본문을 알기 쉽게 풀거나 설명한 것을 본문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21쪽)

애초에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고 읽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컨대 누가복음에 기록된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눅 18:9-14)'는 왜 그토록 인상적일까?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본문을 읽었을 때, 세리의 기도를 인정한 예수의 행동은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하늘을 우러러보기조차 부끄러운 세리의 입장에서 읽더라도, 자신의 기도를 받아 준 예수의 행동은 또 다른 의미에서 충격적이다. 이처럼 성경 본문은 우리 삶 가운데로 뚫고 들어와, 우리의 현실을 폭로하고 우리를 변혁한다. 그러한 면에서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학자들은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가 담고 있는 혹은 일으키는 진리(truth)를, 몇 가지의 사실(fact)로 바꿔 고착시켜 버린다. 학자들은 1세기 당시 바리새인과 세리의 평판에 대해 해설하고, 대다수 청중이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비유를 듣다가 깜짝 놀랐을 것이라고 논평하는 것에 그친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보다는 겸손하게 자비를 구했던 세리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됐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와 세상을 변혁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혹은 이를 주문하는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는, 성서학자들의 세련된 해설과 함께 몇 가지 신학적 개념으로 축소된다. 성경 본문의 곡해를 가로막기 위해 등장했던 역사 비평이, 이제는 성경의 본래 목적인 '변혁'을 방해하게 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월터 윙크는 심리학자 바칸의 말을 인용하며, 성서학자들이 방법론에 대한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방법론을 바탕으로, 그 방법론이 지향하는 대상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 그 자체를 숭배할 때 학문은 우상숭배로 변질된다." (65쪽)

<성서는 변혁이다>에 부록으로 실린 그의 자전적 회고록은, 그가 단순히 역사 비평을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 본문이 담고 있는 진리(truth)가 일으키는 변혁에 동참하려 애썼다. 동료 교수들은 월터 윙크의 문제의식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성서는 변혁이다> 출간으로 인해 그는 뉴욕 유니온신학교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도 탈락했다.

하지만 이후 월터 윙크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더욱 밀어붙였다. '정사와 권세'에 대해 연구하면서 칠레로 가서 군사정권 독재를 직접 경험해 보기도 했고, 직접 연구한 결과물을 갖고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서 함께 공부하며 비폭력 저항운동을 모색하기도 했다. 짐 윌리스가 설립해 사회정의에 관심을 쏟은 복음주의 단체 소저너스(Sojourners)는 월터 윙크를 두고 "20세기 가장 중요한 정치신학자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성경 본문이 담고 있는 진리와 대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 분투했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애초에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계기, 성경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고등학교 2학년,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에 잠식돼 가던 때, 성경의 '말씀'을 만났기 때문이다. '말씀'은 나를 변혁했고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이후 지속적인 변혁을 위해 '말씀'의 원천인 성경을, 또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결국 본래 목적을 망각한 채 막다른 길에 들어서게 됐다. 역사 비평을 비롯한 몇 가지 신학적 가르침은 나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나의 삶을 변혁했던 성경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어느새 나는 율법 교사요, 논평가가 되어, 다른 사람의 옳음과 틀림을 구분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다양한 견해를 소개한 다음, 좀 더 있어 보이는 나만의 견해를 과시하는 데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월터 윙크(Walter Wink, 1935~2012). 사진 출처 요다위키
월터 윙크(Walter Wink, 1935~2012). 사진 출처 요다위키

<성서는 변혁이다>를 읽으면서, 처음 월터 윙크를 만났던 때가 다시 기억났다. 그를 잊은 채 살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월터 윙크가 걸어온 여정을 따라 걷고 있었다. 역사 비평이 주는 결과물의 수혜자이면서도, 역사 비평의 한계와 마주하고 씨름하며 고민했던 그의 기록은 곧 나의 기록과 같았다. 성서학계에서 학자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삶과 신앙을 재단하는 '율법교사', 성경 본문의 진리를 몇 가지의 말끔한 해석으로 축약해 버리는 '논평가', 학계에서 말하는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야심가'의 유혹을 거절하고 거친 광야로 떠나간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 광야로 다른 이들을 부르는 외침 속에서, 나는 그가 왜 다른 예수 세미나 구성원들과는 달리 내 마음을 뜨겁게 했는지를 알게 됐다.

그는 학계에서만 읽고 통용되는 글을 쓰는, 학계 안에 갇힌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권사님과 같이) 평범한 이들과 손을 맞잡고 성경의 '말씀'을 마주하는 여정을 담대하게 떠나는 사람이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이 아닌 '말씀'을 탐구하기 위해서라면, 평범한 이들에게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월터 윙크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성서학자는 "인간의 변혁에 성서가 미치는 모든 영향을 모든 이가 이해하도록 돕는 성서 해석자"(128쪽)가 돼야 한다는 자신의 선언을 스스로 현실에서 구현해 냈다.

안정적이고 평탄한 교수 커리어를 이어 가고 있던 상황, 탁월한 학자이자 전문가가 될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상황에서 그는 이런 말을 던진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전문성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이다. 우리는 우리 학문의 미래가 아닌 우리 삶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138쪽)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처럼, 나 또한 긴 세월을 돌아 이제서야 내 자리를 찾은 것 같다. 2012년 어간에 월터 윙크를 만난 이후, 돌고 돌아 이제서야 월터 윙크를 다시 만나게 됐다. 2006년 성경 본문이 담고 있는 인간을 변혁하는 진리에 감명 받은 이후, 오랜 시간 학문적 세계와의 외도 끝에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애초에 학자가 되기 위해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었다. 학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를 변혁해 인간으로 빚어 가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본분을 잃어버렸다.

우리 대다수는 더 나은 지식을 얻기 위해 악령에게 영혼을 팔아 버린 '파우스트'와 꼭 닮았다. 성경과 신학을 두루두루 공부하다가 어느덧 학문 세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성서는 변혁이다>는 성경의 '말씀' 자체를 읽지 못하고 성경에 '관하여' 논평만 하고 있는 우리 같은 이들에게 '악령'이 씌었다고 폭로하고, 끝내 축귀에 이르는 길을 알려 준다.

홍동우 / 설교도 잘하고 싶고 책도 잘 읽고 싶은 욕심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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