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피고인의 성기에 특이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정말 피고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면 이를 기억해야 한다.' 쓰면서도 어이없는 이 주장은 실제 재판에서 나왔던 것이다. 강원도 춘천에서 교회와 지역 아동 센터를 운영하던 전직 목사 소두생('소영생'으로 활동) 씨는 약 15년 전 교회와 센터를 다니던 미성년자들을 상습적으로 추행한 죄가 인정돼 2022년 3월 징역 7년을 확정받았다. 

1심에서 소 씨는 범행 사실을 부인할 뿐 별다른 주장을 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고 그는 법정 구속됐다. 곧바로 항소한 소 씨는 '법무법인 YK'와 '법무법인 로고스'라는 대형 로펌 두 곳을 선임했다. YK는 성폭력으로 고소당한 가해자들의 형량을 줄여 준다는 식으로 광고하는 일명 '성범죄 전담 법인'이다. 로고스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며 교회와 관련한 소송에 많이 선임되는 로펌이다. '목사+성폭력' 사건에 '로고스+YK'라니, 가히 교회 성폭력 가해자를 위한 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항소심에서 소두생 씨와 변호인단의 주장은 선을 넘기 시작했다. 소 씨의 성기에 특이한 점이 있다며 피해자들이 이를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위해 병원에서 신체 감정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논리'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이 주장으로 소 씨와 변호인단은 공판을 질질 끌었다. 결국 구속 기간이 만료될 시점이 오자 재판부는 신체 감정을 이유로 보석을 허락했다. 소 씨는 2심 판결이 날 때까지 약 3개월간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법무법인 YK는 이를 자신들의 '성공 사례' 중 하나로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피해자들에게 가해자의 성기 모양을 묻겠다는 S 목사 측 요구에 시민단체들도 반발했다. 사진은 6월 23일 공판 전 기독교반성폭력센터와 강원여성연대가 연 기자회견. 뉴스앤조이 구권효
피해자들에게 성기 모양을 묻겠다는 소두생 씨와 변호인단의 주장에 시민단체들이 반발했다. 사진은 2021년 6월 23일 공판 전 기독교반성폭력센터와 강원여성연대가 연 기자회견. 뉴스앤조이 구권효

소 씨와 변호인단의 주장은 그 자체로 심각한 2차 가해였다. 피해자들은 항소심이 진행된 약 1년간 가해자 측의 주장 때문에 상처받았고, 혹시나 그 주장이 받아들여질까 봐 가슴 졸였다. 가해자가 보석으로 풀려났을 때는 길에서 마주치지 않을지 두려워했다. 어쨌든 소 씨는 징역형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됐지만, 소 씨와 함께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준 변호인단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로부터 선임 비용을 벌었고 '성공 사례' 하나를 축적했다. 

소 씨는 항소심에서도 징역 7년이 선고됐고, 대법원에서도 판결은 그대로였다. 가해자가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웠지만, 로펌은 거리낌 없이 2차 가해성 주장을 남발하고도 책임은커녕 이익만 얻어 가는 상황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건가? 기자로서 지켜본 나도 괘씸한데 피해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안 그래도 힘든 성폭력 피해자를 이토록 괴롭히고도 '가해자도 변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 이 상황이 맞는 걸까. 대체 어떻게 이런 괴물 같은 집단이 나타났을까….

'소비자'가 된 가해자들
<시장으로 간 성폭력 - 성범죄 가해자는 어떻게 감형을 구매하는가> / 김보화 지음 / Humanist 펴냄 / 392쪽 / 2만 1000원
<시장으로 간 성폭력 - 성범죄 가해자는 어떻게 감형을 구매하는가> / 김보화 지음 / Humanist 펴냄 / 392쪽 / 2만 1000원

<시장으로 간 성폭력 - 성범죄 가해자는 어떻게 감형을 구매하는가>(Humanist)는 일명 '성범죄 전담 법인'의 생성 배경과 전략을 분석하고, 성폭력 사건이 법원에 종속되는 문제를 지적하며, 반성폭력 운동이 나아가야 할 이론적·실천적 제안을 담고 있는 책이다. 김보화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가 2021년 발표한 박사 학위논문 '성폭력 사건 해결의 '법 시장화' 비판과 '성폭력 정치'의 재구성에 관한 연구'를 수정·보완해 올해 2월 6일 출판됐다. 저자는 성폭력 피해자 17명을 비롯해 여성운동 단체 활동가 6명, 변호사 8명 등을 인터뷰하고, 성폭력 사건 판결문 및 법적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를 통해 논지를 이끌어 간다.

포털 사이트에 '성폭력'이라고만 쳐도 '성범죄 전담 법무법인'의 광고가 줄짓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피해자를 위한 로펌이어야겠지만, 비상식적으로 모두 가해자를 위한 곳이다. 그 배경에는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에 휩쓸린 한국의 법률 서비스 시장이 있다. 책에 나오는 한 변호사 인터뷰이는 "변호사 업계 쪽에서 보면 굉장히 시장 개척이 잘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업으로 내몰린 변호사들이 성폭력 가해자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범죄 전담 법인 중에는 성폭력 가해자들을 위한 '온라인 카페'를 운영하며 더 적극적·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곳도 있다.  

성범죄 전담 법인에서는 가해자의 무죄판결과 감형을 위한 온갖 전략을 개발한다. 위 사건처럼 2차 가해적 주장으로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를 무고나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는 일도 빈번하다. 범죄 사실을 시인해야 할 경우에는 반성문 제출부터 가족과 지인의 탄원서 제출, 봉사 단체 혹은 여성 단체 후원, 진술 분석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감형 사유를 노리고 전략적으로 움직인다. 이는 법원이 실제로 이런 것들을 양형에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형 사유들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성범죄 전담 법인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재판부의 태도가 '법 시장화'를 유도하는 꼴이다. 

"특히 성폭력과 함께 강력 범죄로 언급되는 살인, 강도, 방화의 가해자에 대한 법률 자문이나 이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는 매우 드물지만, 성폭력의 경우 주로 가해자를 위한 법률 자문과 홍보가 유독 많은 것은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범죄의 법적 위치를 대변해 준다. 성폭력의 경우 법적 해결 과정에서 현실과 괴리된 최협의설(강간·추행죄가 성립되려면 피해자에게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한다며, 폭행·협박을 최대한 협소하게 해석하는 것 - 기자 주)과 관행화된 감형,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를 신뢰하지 않는 통념, 무고에 대한 의심, 재판부에 따라 결과에 큰 차이가 나타나는 특징 등을 보인다. 이에 따라 성폭력 신고율은 다른 범죄에 비해 꾸준히 높아지는 데 반해 구속률과 기소율은 낮다. 이는 다른 범죄들과 달리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 변호사의 개입 여지를 확장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으로서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변호는 변호사 업계의 틈새시장으로서 위치를 점하고 있다." (75쪽)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성폭력'을 검색한 결과(2023년 3월 17일 기준).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성폭력'을 검색한 결과(2023년 3월 17일 기준). 

책을 읽어 내려 가면서 소두생 사건 같은 가해자의 악랄한 주장이 법정에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그 배경과 생리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가해자는 '소비자'가 되어 성범죄 전담 법인이 만들어 낸 최신의 전략들을 구매할 수 있는 데 비해, 피해자를 지원하는 국선변호인 제도나 무료 법률 지원 시스템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서 핵심은, 저자가 지적하듯 정치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으로 대체되는 현상이다. 

"성범죄 전담 법인이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와 법적 정보의 상품화 및 산업화되는 전문가 조력을 통해 성폭력 가해자들은 법 시장에서의 합리적 소비자로 이동함으로써 성폭력은 경제적인 것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성폭력의 법적 해결 과정은 성폭력이 발생하는 기반인 성별 권력과 성폭력을 용인하고 사소화하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한 투쟁의 과정이다. 그러나 수사·재판 과정에서 가해자에게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한 법적 정보의 판매와 전문성의 상품화는 성폭력이라는 정치 투쟁의 장 자체를 자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문제로 전환시킨다. 이는 '기존의 정치적인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대체하면서 제도와 인간을 재구성하는 신자유주의 통치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법적 주체로서 가해자에게 각종 상품의 구입은 가해자로서의 위치를 이탈시키고, 값싸고 합리적인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로서 위치할 수 있게 한다. 신자유주의 통치는 시장 원리를 통해 쉽게 조작 가능하고 통치 가능한 주체, 즉 시장 원리를 내면화한 주체를 만들어 내면서, 공공성, 윤리, 책임의 가치를 삭제하고 있다. 이처럼 소비자로서의 가해자와 시장화된 성범죄 전담 법인, 그리고 산업화되는 전문가 그룹 들이 가해자 카르텔을 구성하면서 성폭력은 점차 정치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으로 이동하고 있다." (138~139쪽)

성폭력 사건 '해결'이란 무엇인가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저자가 성폭력 사건 해결이 사법에 종속되는 현상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를 법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가해자를 고소하지만, 경찰·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재판도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형사재판 시스템은 검사와 피고인의 싸움이다. 피해자는 '증인'일 뿐 더 이상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게 된다. 피해자는 소외된다. 가해자의 역고소도 문제다. 재판은 3심까지 가면 기본적으로 2~3년이 흐른다. 가해자가 민형사상 역고소를 시작하고 진흙탕이 되면, 법적인 해결은 몇 년이 지나야 끝날지 알 수 없게 된다. 

사안이 이렇게 되면 피해자는 수년간 사법 절차에만 매몰된다. 스스로를 수사기관과 법원이 상정한 피해자상에 위치하기 위해 "정신과적 고통"을 증명해야 한다. 검찰 처분과 법원 판결에만 목을 매게 되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성폭력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결할 수 없다고 느낀다. 사실 판결이 만족스럽게 나온다고 해도, 과연 그것으로 성폭력 사건이 '해결'되는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사회·경제·교육·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최종 판단 권한이 법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최근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성폭력 사건 해결이 사법화되는 현상은 '정치의 사법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정치의 사법화'는 문제 해결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법원에 주어짐으로써, 법원이 공동체 다수의 입장과 다른 판결을 내릴 경우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정치 영역과 민주적 공론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할 사안들이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 소수 엘리트 법관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사회 변화의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77쪽) 

이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운동에서도 많이 이야기되는 주제다. 회복적 정의 운동은 지나치게 응보적 정의 패러다임으로 사법 절차가 진행된다는 점을 우려해 왔다. 가해자의 처벌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피해의 회복일 텐데 현재 사법 시스템 안에서 피해자의 회복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다 보니 가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반성한다 해도, 그 반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형벌을 내릴 권한이 있는 재판부를 향하게 된다. 현재의 사법 정의로는 피해자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맹점은 <시장으로 간 성폭력>에 나오는 피해자들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은지(피해자) / 이 사람을 처벌하는 거, 이 사람을 처벌해서 감옥에 가게 하는 게 내가 회복되는 건지 좀 고민했던 거 같아요." (241쪽)

"은지(피해자) / 법은 남자들, 가해자들한테 유리한데 피해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법의 테두리 안으로 계속 끌려 들어가는 게 있고, 근데 그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해결해 보려고 하면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는 거예요. 피해자들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요. … 지금 내가 이 일을 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지? 나한테 회복은 뭐지? 이런 고민을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드는데 시간은 너무 빨리 가고 이 모든 것을 나 혼자 고민하고 나 혼자 해결해야 된다는 게 너무 힘든 일이더라구요." (267쪽)

"다정(피해자) / 저는 피해에만 집중하는 게 싫어요. 피해가 어떻게 일어났냐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저는 이 피해가 성희롱이든, 추행이든, 성폭행이든, 사이버 성범죄든 어떤 게 크고 어떤 게 작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거 같아요. 그 사람한테는 계속 트라우마로 남는 거기 때문에. 큰 사건이었든 작은 사건이었든 빨리 회복해서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저는 제가 회복한 방법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훨씬 더 커졌어요." (268~269쪽)

책에는 사법적인 방법뿐 아니라 비사법적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 피해자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그 방법은 사적 복수부터 조직 내 공론화, 온라인 국민 청원, 가해자의 반성을 동반한 금전적 합의, 여성운동 연대 활동까지 다양했다. 저자는 "피해자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해결의 방법과 과정이 단일할 수 없"고,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란 완성된 어떠한 상태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사법적 해결은 하나의 선택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발생 공간, 피해 유형, 2차 피해의 여부, 당사자의 자원과 역량 등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층적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특히 사법적 해결은 좀 더 피해자 중심적인 하나의 선택지가 되어야 하는 동시에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되고 개입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337쪽)

2년 전 나는 '교회 성폭력 생존자의 오늘'이라는 주제로, 교회 혹은 모임에서 목사·리더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피해자들에게 피해 회복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그 과정을 밟고 있는지 듣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들 중 3명은 가해자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걸어 모두 승소했다. 1명은 가해자를 고소했으나 경찰 단계에서 불송치됐다. 나머지 1명은 사법 절차를 밟지 않고, 가해자가 속한 교계에서의 공론화만 택했다. 

이들을 인터뷰하며 깨달은 점은 피해자마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과 회복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으며, 사법 절차에서 이기든 지든 혹은 사법으로 가지 않든, 피해 회복 과정은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한 피해자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위해 가해자를 고소했는데 경찰이 이를 불송치 처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유죄가 선고돼 얼마간 후련함을 느꼈지만, 그것만으로 피해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에게는 언론과 인터뷰하는 것 자체도 피해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피해 경험을 다시 끄집어내 이야기하는 것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던 일상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이들은 그럼에도 말하고 싶다는, 그리고 자신의 말하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피해자들의 말하기는 치유의 과정이자 연대와 투쟁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장으로 간 성폭력>을 읽으며 가늠할 수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소나 피해 경험의 공론화 같은 문제 제기를 하는 이유는 가해자의 처벌과 반성, 치유와 회복, 공동체의 성찰과 변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분절적이지 않아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원과 이들의 관계, 피해의 유형과 해결 방법 등에 따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피해와 가해의 의미를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해의 경험이 조직 내에서, 혹은 법적 해결의 과정에서 미끄러지고, 왜곡되고, 공격당할 때, 피해자는 패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이러한 위기들을 경험하면서 사건 해결의 의미가 결과에만 정박되지 않도록 해결의 장을 확장하고 이동시키면서 자신의 상황과 조건에 맞는 투쟁의 시공간을 재창조한다. 그러므로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종언될 수 있는, 완성된 상태로 인식하기보다 해결과 치유의 의미를 연대와 투쟁의 언어로서 전유할 수 있는 '성폭력 정치'의 장이 구성되는 하나의 경로로서 의미화해야 한다." (310~311쪽)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