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옥합교회에서는 매달 셋째 주 토요일마다 '호남 지역 성소수자 부모 모임'이 열린다. 4월 15일에 진행된 두 번째 모임에는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참석자들이 모였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광주 옥합교회에서는 매달 셋째 주 토요일마다 '호남 지역 성소수자 부모 모임'이 열린다. 4월 15일에 진행된 두 번째 모임에는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참석자들이 모였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모임 시작 시간을 한 시간쯤 앞뒀을까. 성소수자 자녀를 둔 나비(활동명)와 국화향기(활동명)가 교회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엄기봉 목사(옥합교회·45)와 눈이 마주치자 이들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참석자들도 하나둘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임 시각 30분 전부터 참석자 대부분이 모였다. 공식 모임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떡, 대추야자, 커피, 물 등이 펼쳐진 간식 테이블 주변에서는 이미 한바탕 수다가 벌어졌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참석자들은 여섯 빛깔 매듭 목걸이를 건 나비와 국화향기를 중심으로 자그마한 예배당에 둥그렇게 앉았다. 진행을 맡은 나비와 국화향기가 시작을 알린 뒤 안내문을 읽었다.

"성별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서로 정체성을 본인이 밝히지 않는 한 먼저 묻지 않고, 알게 되는 경우 있는 그대로 존중합니다. 나이와 지위에 관계없이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고, 농담으로라도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출신 지역, 성 정체성, 성적 지향 등이 다양한 참석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나비는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 아이는 바이젠더 팬로맨틱 에이섹슈얼로서, '트랜지션'이라는 성 확정 수술을 마치고 성별 정정을 마쳐서 현재 FTM 남성(Female-To-Male,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사람 - 기자 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4월 15일 광주광역시 문화전당역 인근 옥합교회에서 '호남 지역 성소수자 부모 모임'이 열렸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은 2014년 성소수자 부모인 하늘·지인(활동명)의 자조 모임으로 서울에서 시작했다. 2021년 부산을 거점으로 영남 지역 모임이 생겨났고, 올해는 호남 지역에서도 모임이 만들어졌다. 지난 3월 첫 모임을 한 호남 지역 성소수자 부모 모임은,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3시 옥합교회에서 정기 모임을 열고 있다. 두 번째 모임이 열린 이날도 서울·광주·군산 등지에서 성소수자 당사자, 부모, 앨라이 등 12명이 모였다.

이들의 대화는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성소수자 자녀·부모의 관계, 지역 내 혐오·차별 등 서로의 고충과 고민이 진지하게 오갔다. 나비는 모임을 마무리하며 "이 모임이 안전하고, 언제든지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신뢰가 생기면 좋겠다. 우리가 항상 이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성소수자 자긍심을 상징하는 서체 길벗체로 쓰인 교회 간판이 참석자들을 먼저 맞는다. 옥합교회 엄기봉 목사는 교회 건물 곳곳에 길벗체를 배치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성소수자 자긍심을 상징하는 서체 길벗체로 쓰인 교회 간판이 참석자들을 먼저 맞는다. 옥합교회 엄기봉 목사는 교회 건물 곳곳에 길벗체를 배치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무조건 연대', '차별 없이 환대' 하는 교회

보수 교회는 성소수자와 부모를 가장 힘들게 하는 집단 중 하나다.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한 개신교인들이 퍼붓는 혐오 발언이나 조직적인 성소수자 반대 운동은 큰 상처가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독교인 성소수자·부모마저도 교회를 떠난다. 이들에게 교회는 소통과 연대가 가능하기보다 '언제 어디서 혐오 발언이 터져 나올지 모르는' 차별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에서 성소수자 부모 모임이 열린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엄기봉 목사는 어떻게 교회를 모임 장소로 제안하게 됐을까. 그는 40살에 목회를 시작한 늦깎이 목사다.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한 뒤 부교역자로 사역해 왔다. 개척을 고민하던 2018년 무렵, 평소 알고 지내던 광주 옥합교회 김태완 목사가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여성 목회자인 김태완 목사는 1997년 옥합교회를 개척했다. 김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여교역자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광주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한 사역을 해 왔다.

이 당시는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생들이 '무지개 행동'을 벌인 뒤 징계를 받는 등 논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신학생 시절 퀴어신학 등을 접한 적이 있었던 엄기봉 목사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 그리고 김태완 목사에게 자신이 옥합교회의 후임을 맡고 싶다고 제안했다.

"만약 교회에 부임한다면 성소수자들을 환대하고 인정하는 교회, 그들과 연대하는 교회를 해도 괜찮을까요?"

엄 목사의 말을 들은 김 목사는, 자신도 2년간 성소수자들을 만나 본 적이 있다고 얘기하며 제안을 수락했다. 2021년 1월, 엄 목사는 옥합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교회 간판을 성소수자 자긍심을 나타내는 서체인 '길벗체'로 바꿔 달았다.

"과거 '교회가 뭘까'라는 고민을 하는 중에 마태복음 25장을 보게 됐다. 목마르고, 주리고, 갈 곳 없는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음식을 주고, 거할 곳을 마련해 줬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런 일을 하는 게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교회를 개척하게 되면 '무조건 연대', '무차별 환대'를 하는 교회를 세워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옥합교회 엄기봉 목사. 인터뷰 내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옥합교회 엄기봉 목사. 인터뷰 내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엄 목사가 처음부터 성소수자 목회를 펼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옥합교회 부임 당시 고정적으로 출석하는 교인이 없었고, 예배당은 늘 텅 비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성소수자 부모 모임이 광주에서 모일 장소를 찾고 있다는 소식은 '계시'와도 같았다. 2022년 10월 무렵, 서울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참석한 한 광주 지역 참석자가 "광주에도 이런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프리다(오현선 목사)를 통해 엄 목사에게까지 전해졌다.

"사람들이 간증할 때 '계시를 받았다'는 느낌을 이야기하지 않나.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딱 그런 느낌이었다. '우리 교회에서 (모임) 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 목사는 곧장 서울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참석해 듣고 배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엄 목사는 학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성소수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접했다. 그는 "나는 내가 '앨라이'라는 사실을 친구 몇 명에게만 이야기했지, 신학교 동기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커밍아웃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한다'는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장 나만 해도 이런데, 성소수자들이 겪는 문제는 얼마나 더 심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살린다는 교회에서 성소수자들에게 혐오 발언을 하며 죄책감과 상처를 주고 있지 않나. 글로 봐서는 모르는 것들을 모임에 가서 많이 배웠다. 아직도 배울 게 더 많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지금도 엄 목사는 꾸준히 서울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나간다.

이후 그는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 운영위원인 나비는 엄 목사의 태도가 혹여 시혜적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를 만나 이야기 나누고 공간을 둘러본 뒤 신뢰가 생겼다. 오히려 교회에서 모임을 여는 것이 획기적이고 상징적일 수도 있다는 판단도 했다. 기독교인이자 광주에 거주하는 국화향기도 당사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지만 결국 찬성 의견을 냈다. 그렇게 장소가 확정됐고, 3월 열린 첫 모임에는 전국에서 약 30명이 찾아왔다.

엄기봉 목사는 "아직도 더 배울 게 많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엄기봉 목사는 "아직도 더 배울 게 많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엄 목사에게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시작하기까지 어려움은 없었냐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청소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는 자신은 장소를 제공한 것뿐이라며,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그는 "'교회가 뭘 해야 하나', '우리 교회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필요가 있었을 때 응답한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5수를 했다. 스무 살에 신학교에 입학해서 마흔 살에 목사가 됐다. 주변에서는 '기봉아, 그렇게 (어렵게) 목사가 됐는데 조심하라'며 염려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성소수자 관련 활동을 주변에 굳이 이야기하지 말고 몰래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어렵게 목사가 됐으니 더 가치 있는 목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옥합교회는 여전히 예장통합 소속이다. 혹시라도 모임을 진행한다는 이유로 교단이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까. 엄 목사는 "아직 교단에서는 (모임 소식을) 모르는 것 같다. 지난해 5월 교회 간판을 길벗체로 바꿨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몇몇 분들은 알고 있다. 오히려 나를 지지한다고 하더라. 예전에는 교단의 분위기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이 잠깐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옥합교회 소식이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지지자도 늘어나고 있다. 엄 목사는 "작년 반동성애 집회에 참석했던 장모님도 지난달 첫 모임에 간식을 후원해 주셨다. 신학을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에게도 '잘할 거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옥합교회는 얼마 전 건물 외벽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성소수자 다양성의 상징인 커다란 여섯 빛깔 무지개로 꾸몄다. 오후가 되면 창문에 걸린 무지개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온다. 한쪽 창문에는 커다란 고래가 그려져 있다. 모두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다. 엄 목사는 "저거 붙이느라 고생 좀 했다. 무지개는 창세기, 고래는 홍해가 갈라지는 출애굽기 장면이다"라며 웃었다. 또한 모임 참석자들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예배당 중앙에 작게 걸린 십자가 외에는 교회 공간을 연상시킬 수 있는 물건을 모두 가렸다. 대신 그 위에는 무지개 깃발과 성소수자 부모 모임 깃발이 걸렸다. 한쪽 벽에는 성소수자 부모 모임이 발간한 단행본과 소책자, 굿즈들도 진열돼 있다.

모임을 언제까지 하고 싶느냐고 묻자 엄기봉 목사는 "한 참석자가 '내년 첫눈이 올 때까지 이 모임이 지속됐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시작했으니 최대한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옥합교회는 기회가 된다면 성소수자 친화적인 예배를 열겠다는 계획도 품고 있다. 엄 목사는 "성소수자들을 목회 대상으로 정해 놓고 성소수자 부모 모임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잘 모르고, 배우는 입장"이라면서 "다른 교회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예배할 수 있도록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곳이 성소수자들의 안전한 안방, 사랑방이 되는 게 우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예배당 한쪽에 걸린 '성소수자 부모 모임' 깃발과 엄기봉 목사. 깃발 뒤에는 성경 말씀이 적혀 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예배당 한쪽에 걸린 '성소수자 부모 모임' 깃발과 엄기봉 목사. 깃발 뒤에는 성경 말씀이 적혀 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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