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좀 꺼려지는 감이 있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내가 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이미 10년도 더 지났다!) 신약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이 박 터지게 싸우던 주제였고, 사실 일선 목회자들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일 뿐이다. 장담컨대 한국교회 신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 이슈를 모른다. 모를 뿐만 아니라 굳이 알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장 삶이 팍팍하고 힘든데 신학자들끼리의 (정확히 누가 어떤 입장인지 이해하기도 힘든) 논쟁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게다가 내가 주요하게 만나며 섬기고 싶어 하는 대상인 회의론자들과 비신자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독교에 반감을 갖게 할 수도 있는 논쟁거리와 주제일 것이다. 그들이 "개신교도들 내부에서도 구원에 관한 입장에 이런 차이가 있단 말이야?"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을 요약해서 설명해 주겠는가? 아마 이 글을 읽는 압도적 다수는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단순히 성경이 말해 주는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해 주는 '그 대답'이, 더 좁혀 보자면 바울이 말해 주는 '그 대답'이 어떤 대답인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는 사람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이 주제와 이슈를 완전히 묻어 버리고 외면하기도 어렵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전도, 목회,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 새 관점(정확히는 새 관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더 맞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말이다.

입장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새 관점은 하나의 관점이 아니다. 대단히 다양한 학자들의 여러 관점'들'이다. 새 관점에 속하는 학자들끼리도 서로에게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이 대단히 많고, 비평하는 쪽 역시 (대개는 일치하지만) 의견이 꼭 같지는 않다. 따라서 전체를 개요하는 입문서가 (그것도 얇은 것이!) 꼭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입문서가 나와 있는데, 스티븐 웨스터홈의 <칭의를 다시 생각하다>(IVP)와 더불어 이 책은 가장 추천할 만하다. 솔직히 '입문'이라는 기능으로만 본다면 켄트 잉거의 이 책에 견줄 다른 책은 없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 개요> / 겐트 L. 잉거 지음 / 임충열 옮김 / 감은사 펴냄 / 208쪽 / 1만 6800원
<바울에 관한 새 관점 개요> / 겐트 L. 잉거 지음 / 임충열 옮김 / 감은사 펴냄 / 208쪽 / 1만 6800원

켄트 잉거는 이 책에서 새 관점 학자들의 주요 주장과 논지를 요약해서 명료하게 전달하고, 그에 관한 전통적 입장의 비평 역시 공정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존 바클레이 같은) 학자들의 응답 및 이 입장의 발전 역시 간략하게 다뤄 준다. 또한 새 관점 입장에서의 '적용점'들을 짚어 준다. 잉거는 새 관점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지만, 전통적 입장을 희화화하거나 비틀어서 제시하지 않는다.

(잉거가 아쉬워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입장이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전통적인 바울 해석의 강력한 지지자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잉거의 입장에 동의하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새 관점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데 입문서가 필요하다고 하면, 제일 먼저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여러 참고 문헌을 지혜롭게 선별하여 제시하기 때문에, 사려 깊은 독자라면 이 책 한 권으로도 이후에 자신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바로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의 출간은 반갑다. 

이 책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유익

이 책은 얇은 두께 덕분에 빠르게 읽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책을 통해 새 관점 학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몇 가지 오해들은 빠르게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양한 새 관점의 지지자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뒤엎거나 개신교를 가톨릭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 물론 칭의에 대한 '종교개혁적' 또는 '루터적' 이해에 대해 새 관점주의자들은 대체로 비판적이지만, 그것을 정면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대다수의 새 관점주의자들은 이신칭의를 "중심적 위치에서 이동시키"(135쪽)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둘째, 세부 사항은 그렇게 결정적이지 않다. 예를 들면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번역할 것인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번역할 것인지는 새 관점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130쪽). 즉, 세부적인 차이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

셋째, 새 관점이 주장하는 내용들 중 어떤 것들은 개신교 내 특정 교파들의 교리와 상충하는 것이지, 개신교 모두의 전통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비판자들은 새 관점이 '신인 협동설'을 부추긴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개신교 전통이 '신 단독주의'를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150~152쪽).

넷째, 새 관점 주장자들의 신학을 모두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예컨대 당신은 바울과 칭의에 대한 N. T. 라이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고, 그를 멀리 할 수 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한 라이트의 저술 <하나님 아들의 부활>(CH북스)을 읽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 책은 부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종류의 변증인 동시에, 목회적으로 풍부하게 적용할 수 있는 지혜가 담겨 있다.

두 가지 질문들

어쨌든 논쟁의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꽤 복잡해지고, 나는 전통적 입장을 옹호하지만 지금 이 글에서 내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새 관점을 논박할 생각은 없다. 이미 탁월한 신학자들이 많은 글을 쏟아 냈다. 하지만 목회자로서, 새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실천적·목회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질문들을 좀 던져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첫째, 목회자로서 나는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물론 켄트 잉거는 새 관점이 확신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고,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보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확신이 더 중요하다고 강변한다(143~144쪽). 물론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평생 엉망진창으로 살았고,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하며 상처를 줬으나, 죽을병에 걸려서 살 시간이 며칠 남지 않은 누군가가 "이제 내가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데, 나도 과연 구원받을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만일 내가 새 관점에 충실하다면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지금 당장 조건 없는 사랑으로 구원받으며 그 사실을 확신하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게 될 것 같다. 이는 꽤나 괴로운 일이다.

둘째, 과연 '의의 전가'는 주변부로 밀려나도 좋은 교리인가? '전가된 의'에 대한 새 관점 학자들의 입장은 '일부는 부정하고, 일부는 인정한다'이다(138쪽). 하지만 모든 새 관점 학자들은 '전가된 의'를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목회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을 대신 사셨고(의의 전가), 당신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형벌적 대리 속죄)"라는 문장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때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가장 선명하게 제시된다. 켄트 잉거는 이 문제를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는 듯하다. 하지만 신학자에게 중요하지 않은 주변부 교리가 목회자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면,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학자들은 이 질문들이 지나치게 실용적인 질문이며, 진리는 실용에 의해 좌우지되면 안 된다고 대답할지 모르겠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진리는 실용에 있어서도 진리가 아닌 것보다 더 강하게 작용한다. 즉, 실용이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는 실용적이다. 나로서는 새 관점에 속한 학자들이 위의 질문에 더 섬세하고 사려 깊게 대답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내가 속한 전통적 입장의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더 신사적인 비평과 대화를 지속해 가기를 기대한다. 나는 이 논의를 계속 지켜보면서, 내 신학이 더 정교해지고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정규 / 시광교회 담임목사.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야근하는 당신에게>(좋은씨앗), <새 가족반>(복있는사람), <예수님의 기도 학교>(IVP)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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