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로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지만, 저는 TV 앞에도 수시로 앉아 있습니다. TV는 제 2가지 '일탈' 중 하나입니다(다른 하나는 '집 앞 작은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넷플릭스'를 가입한 뒤로, 전에 없던 스트레스 하나가 생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뭘 봐야 할지 몰라 받는 스트레스'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가끔 느낄 때가 있었지만, 넷플릭스 가입 이후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다 재미있어 보여서 말입니다. 계속 리모컨을 돌리며 전전긍긍하느라 어떤 때는 30~40분이 그냥 흐르기도 할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무언가를 잘 결정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졌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책은 그것을 '과잉'의 문제로 바라보게 해 줬습니다. 여기서 과잉이란 단순히 '너무 많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경계의 해체"(20쪽)를 뜻합니다.

"나는 이 시대를 '무경계 시대(no boundary age)'로 명명하고자 한다." [<과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CLC), 20쪽]

제 어린 시절인 1990년대를 돌아보면 TV는 방송을 하루 종일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애국가를 송출하는 것으로 그날 방송을 마쳤고,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려야 다시 방송을 볼 수 있었지요. 그것을 '경계'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공중파 방송은 지금도 그러겠습니다만,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어차피 다른 채널이나 넷플릭스에 넘치도록 올라오는 영상이 연중무휴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은 "무경계 시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맺고 끊음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잉'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문법이 우리 일상과 사회구조의 모습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이 TV 앞에서 뭘 봐야 할지 몰라 스트레스를 받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 우리가 풍요로운 시대 속에서도 왜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은지, 그리고 이 세상이 어째서 여전히 위태로운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입니다. TV와 넷플릭스 이야기는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복되게 하는 유일한 경계라고 할 수 있다." (25쪽)

저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과잉의 문제를 8가지 관점에서 짚어 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을 해법으로 제시합니다. 무경계 시대에 팔복의 말씀으로 다시 경계를 짓고 살자는 말입니다. 거기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단순해 보이는 해법입니다. 그래서 문제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충분한 대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훌륭한 공헌 중 하나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진 해법을 겸허히 주목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어 보입니다.

"돈이 없어도 아이폰을 사고, 무리해서 스타벅스에 가며" (29쪽)

먼저 1장은 '소비의 과잉'을 다룹니다. 현대인들은 "소비할수록 자신의 존재를 자각"(29쪽) 한다는 저자의 표현이 뼈아픕니다. 이런 소비주의는 "인간의 가치를 폄하"(30쪽)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비 행위가 "가짜 신"(35쪽) 노릇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가짜 신을 섬기면서 영적인 충만함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안은 "가난"(39쪽)에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그동안 예수의 이름으로 가짜 신을 섬기는 역설에 처할 때가 제법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면, 제 생각이 너무 과한 것일까요?

2장은 '자아의 과잉'을 다룹니다. 현대사회는 자아를 부풀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 '자존감이 높은 게 좋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저자는 놀랍게도 "자존감 교육"(54쪽)의 폐단을 말합니다. 자존감 교육이 자아를 부풀린다는 것입니다(56쪽). 차분히 생각해 볼 말입니다. 자아의 과잉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애통"(57쪽)입니다. 우리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전혀 소망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일 말입니다(59쪽).

3장은 '권력의 과잉'을 다룹니다. "서로 지배하고 주도권을 쥐기 위해"(69쪽) 다투느라 불행을 자초하는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저자의 대안은 명확합니다. "온유"(74쪽)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착하고 순하게 살라는 게 아니라, 오직 "주인을 위해"(77쪽) 힘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만 "길들여지는 것"(79쪽)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이 권력 과잉의 시대에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만 같은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녀석(?)에게 결국 주도권을 빼앗긴다 해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쓸 힘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녀석은 승자가 아닙니다. 작은 파이를 놓고 죽도록 싸워야 하는 이 세상 자체가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 복받은 사람일 겁니다.

4장은 '종교성의 과잉'을 다룹니다. 저는 사실 이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부터 읽어도 상관없는 책이니, 독자들도 그렇게 하시면 더욱 수월한 독서가 되겠습니다. 여기서 종교성이란 "종교적 형식과 행위에 몰두하는"(90쪽) 것을 뜻합니다. 교회 냄새가 풀풀 나던, 하지만 공감 능력이 영 꽝이던 어떤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예배 참석에 열성을 다하면서도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말을 함부로 하던 어떤 권사님도 생각납니다. 물론 제 삶도 부끄럽습니다. 저자는 부디 '종교인'으로 살지 말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신앙인'으로 살라고 촉구합니다(105쪽).

<과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 팔복으로 세워 가는 단순한 삶> / 조광운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펴냄 / 196쪽 / 1만 원 
<과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 팔복으로 세워 가는 단순한 삶> / 조광운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펴냄 / 196쪽 / 1만 원 

5장은 '기능의 과잉'을 다룹니다. 사람을 존재 자체로 보지 않고 기능으로만 대하는 태도가 우리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 꼬집는 것입니다. "전도사한테는 잘 해 줄 필요 없어. 좀 쓰다가 내보내면 돼"라고 말했다는, 다리 건너 아는 선배가 생각납니다. 기능 과잉의 대표적 사례가 되겠습니다. '거룩한 교회'도 이 지경이라면, 일반 회사에 다니는 분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사시는 건지 겸허히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교회 문화가 사회 수준보다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저자의 대안은 "긍휼"(119쪽)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래 다닌 이들에게 익숙한 이 표현을, 저자는 놀랍게 변주해서 다시 들려줍니다. "한 사람을 위한 디테일한 사랑"(124쪽)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일을 외면하거나 귀찮아하면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6장은 '투 머치(too much)'를 다룹니다. 너무 많은 선택지(132쪽)에 관한 것입니다. 수많은 선택지 앞에 서 있는 현대인의 삶은 너무나 지치고 피곤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이런 현실을 "우상 숭배"(135쪽) 문제로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지치고 피곤하게 만드는 선택지인 줄 알면서도, 결국에는 그것이 좋아 보여 신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뜻일 겁니다. 저자의 대안은 "청결"(146쪽)입니다. 샤워를 하라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상을 몰아내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심플 마인드"(148쪽)만이 우리를 '투 머치'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것입니다.

7장은 '거짓 평화의 과잉'을 다룹니다. 거짓 평화는 '예수님 없는 평화'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166쪽). 아무리 좋아 보여도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의 다음 행보입니다. 그는 분명 "화평케 하는", "평화를 만드는"(162쪽) 인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끝으로 저자는 '유사 복음의 과잉'을 다룹니다. 저자는 유사 복음의 특징으로 "세속적 자유"(178쪽)와 "세속적 실용성"(182쪽)을 꼽습니다. 전자는 소위 구원받은 사람은 '자유롭게(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 본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대사 하나가 생각납니다. "난 어제 회개하고 구원받았어. 근데 넌 천국 못 가." 그런데 이 은혜로운 대사의 주인공은 학교 폭력 가해자였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후자는 말 그대로 실용적이지 않으면 필요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에 다닙니까? 교회는 쓸모가 많습니다. '친교의 장'이라는 쓸모, '비즈니스의 장'이라는 쓸모를 쏠쏠히 줍니다(184쪽). 혹은 "수능 기도회"(184쪽)를 열어 주는 쓸모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실용성을 따지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교회는 변질된 복음을 '판매'하는 실정입니다(184쪽). 이런 유사 복음의 열매는 '박해를 받지 않는 기독교'의 출현입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따르며 박해를 받으라고 촉구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다르게 산다'는 말입니다(186쪽).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0)

신정을 지나, 구정을 앞두고 이 책을 읽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때마침 '복'에 관한 책입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고 싶은 분들은 꼭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사실 이 책은 '팔복'을 해법으로 내놓은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도대체 우리는 왜 늘 이 모양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따져볼 수 있도록 생각의 갈피를 잡아 줬다는 점도 아주 중요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고민하게 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현우 / 자유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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