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보다는 답이 좋았다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고향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A가 내일 B국 선교사로 나간대. 오늘 우리 교회에 인사하러 왔어." 이 소식은 오래전 성경과 진리에 대한 '안전한' 질문법을 익히고 흥분했던 21살 풋내기 리더 시절로 나를 잠시 데려다 놓았다.

캠퍼스 선교 단체에서 갓 배운 '귀납적 성경 연구'에 매료됐던 때였다. 여름 수련회를 마치자마자 고향 집에 온 나는 모교회 친구들에게 성경 연구법을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소문을 듣고 동참한 대학부 선배들까지 어림잡아 20명 가까이 됐으니, 자발적인 사조직 치고는 꽤 흥한 모임이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잊고 있었고, 젊을 적 치기로 느껴져 살짝 부끄러운 기억인데, A가 그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A는 그때 이후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모임이 아니었다면 교회를 떠났을 것이라고 말했단다. 그런 A가 선교사가 됐다(맙소사! 내가 그 친구 인생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성경 연구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만용은 어디서 나왔을까. 나는 귀납적 성경 연구가 왜 그렇게 재미있고 좋았을까. '관찰-해석-적용'으로 이뤄지는 귀납적 성경 연구의 핵심은 관찰을 통해 질문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원칙은 '성경(text)에 반드시 답이 있다'는 것. 그러니 우리가 찾아내는 질문은 의심이라기보다는, 해석을 전제로 한 안전한 '문제'들이었고 차라리 확신이었다. 그래도 마음껏 질문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던 것 같다.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표현에 따르면, 태어나 보니 "우주의 추첨에 의해" 아버지가 목사였고 주변에서 가장 흔한 직군이 목회자·선교사였던 환경에서 자란 내게,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그다지 고분고분하지 않았지만, 성경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너무 잘 '믿어지는' 아이였다. 질문보다는 답이 쉬웠던 것 같기도 하다.

교회학교와 성경 교육에 진심인 좋은 교회를 (태어나자마자) 만난 덕에, 나와 친구들은 전담 교역자의 보호 아래 방학이면 매일 모여 함께 공부하고, 그보다 자주 뛰어놀고 쉼 없이 먹으며 '전국 성경 고사 대회'를 준비했다. 성경 구절을 외우고 요점을 정리하고 예상 문제를 푸는 우리에게, 질문이란 예상 문제를 뽑아 서로에게 묻는 퀴즈 이상이 되기는 어려웠다. 총회 주관 전국 대회에 나가려면 본교회 교회학교와 노회 대회를 차례로 통과해야 했으므로 해마다 약간씩 멤버 변동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목사님·집사님·장로님 아들딸이었던 그 친구들 중 몇몇은 목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선생이 됐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나'가 됐겠지.

하지만 모든 질문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수년 전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다시, 성경으로>(바람이불어오는곳)를 읽으며 그의 유년기와 교회 경험에 깊이 공감했던 나는, 그의 회고록이자 첫 저작인 <헤아려 본 믿음>(바람이불어오는곳)을 받아들고 이번에도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목차를 열어 본 순간부터 그랬다. 1장 '최우수 기독교인 상'이라니. 어라, 이거 '성경 고사 대회 최우수상'같은 건가?

레이첼 헬드 에반스는 13살 때부터 미국 테네시주 데이턴에서 살았다. 근본주의자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서식지'인 데이턴은, 1925년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친 교사 존 스콥스에게 벌금 100달러를 선고한 '스콥스 원숭이 재판'이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2004년에는 동성애 불법화를 위한 투표 운동이 진행됐고, '믿는다는 것'은 곧 '공화당에 투표하고, 혼전 순결을 서약하고, 낙태를 반대하며, 세속적 인본주의와 타 종교를 배척하는 것'이라는 등식이 당연한 곳이기도 했다. 기독교 대학을 졸업할 무렵 레이첼은 당대 유행했던 기독교 세계관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모든 예상 질문과 공격에 맞서 세상을 바꿀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그는 썼다.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의심이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에 대한 질문이었다. 누가 어디서 태어나는지 정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인데, 그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 무슬림이나 타 종교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영원한 형벌에서 고통받도록 한다면, 대다수가 선택의 여지없이 지옥 형벌을 받는 중에 소수의 복음주의자들에게만 구원이 허락된다면, 그 구원은 과연 기쁨이고 좋은 소식인가. 그 하나님은 여전히 좋으신 하나님인가.

<헤아려 본 믿음 - 의심과 질문을 통해 새로운 믿음에 이르게 된 이야기> / 레이첼 헬드 에반스 지음 / 김경아 옮김 / 바람이불어오는곳 펴냄 / 288쪽 / 1만 6500원
<헤아려 본 믿음 - 의심과 질문을 통해 새로운 믿음에 이르게 된 이야기> / 레이첼 헬드 에반스 지음 / 김경아 옮김 / 바람이불어오는곳 펴냄 / 288쪽 / 1만 6500원

책 중반 즈음 "자, 이제 내가 예수님에게로 돌아서게 된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하지만, 레이첼은 모든 질문에 대해 답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복음서를 읽기 시작했을 때, 쓰나미에 휩쓸려 간 수십만의 생명에 슬퍼하며 새벽 2시 변기에 쪼그려 앉아 요한계시록을 펼쳐 들었을 때, HIV에 감염된 모녀를 인도에서 만났을 때, 엄마의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소년과 동성애자 친구와 페미니스트 직장 동료와 대화하는 동안, 이전과는 다른 예수님을 만났다고 그는 고백한다. 아울러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변증이나 지적인 동의가 아닌 '순종'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는 것도.

"물려받은 신앙의 진흙탕에서 안전하게 네 발로 기어다니는 상태를 벗어나, 내 영적 경험의 진실 속에서 머리와 마음을 노출한 채 취약하게 서 있는 쪽으로 옮겨 갔다. 나는 진화했다." (31쪽)

나는(나도) 진화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가장 큰 모험과 진화는 나의 '원숭이 마을'에서 보호받고 자라느라 대중문화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영화를 공부하게 된 사건이다. 대학 시절 내내 기독교 세계관과 귀납적 성경 공부를 통해 질문의 중요성을 배웠는데, 내가 보기에 정작 심오한 질문들은 죄다 영화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의 욕망과, 악하고 선한 본성, 역사의 부조리함, 세계의 폭력과 불안과 공포, 구조적인 악과 불평등, 오염과 타락, 사랑과 우정, 소망 없음과 구원에 대한 갈망까지, 영화가 다루지 않는 문제는 없었다.

그렇다면 "모든 답을 갖고 있는" 성경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장 잘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영화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나마 관심 있는 이들도 진지하게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것을 이미 '사탄의 영역'으로 선포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거라면 더 적극적으로 묻고 답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그리스도가 이미 승리하신 세상에서 그 무슨 패배주의적이고 반역적인 생각인가? 혹시 답하기 어렵다면, 현대 영화라는 질문의 고수들로부터 질문하는 법부터 좀 배울 수는 없을까? 이것이 복음주의자로서 나의 첫 번째 질문들이었다.

두 번째는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만난 '성경적' 답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어쩌면 스스로 질문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한 까닭에 나에게는 신선하고 고마왔던 영화의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해 나가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점점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현대의 절박한 문제를 비롯한 모든 질문에 대해 길게는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이 정확한 답을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 따라서 성경에 모든 답이 있다는 명제는 의심받아 마땅했다.

혹시 그것이 '답'이 될 수 있으려면, 텍스트로서의 성경이 쓰인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고, 그 원리에 의해 재해석되어 오늘날 삶으로 살아 낼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은 마치 영화 텍스트의 질문들을 질문 자체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이 시대를 직시하고 보듬어 안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그렇게 하는 법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보다는 차라리 영화하는 동료들과 선배들에게서 배웠다. 그것은 아프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성경에 세상 모든 답이 있다는 명제를 더 이상 믿지 않을 만큼은 진화했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고, 진리를 비추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경의 힘을 믿는다. 다만 레이첼이 말한 것처럼, 인간이 이토록 마음대로 성경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에도, 즉 성경이 이렇게 모호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있음에도, 그 해석을 오롯이 인간에게 맡겨 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일에 더 관심을 두게 됐을 뿐이다. 감추어져 있어서 더 신비로운 그분의 은총 말이다.

케빈 벤후저가 지혜롭게 구분해 놓은 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윤리학(어떤 규범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다, '형이상학(존재론적 믿음)'과 '인식론(의미의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물론 윤리에는 합당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텍스트가 아닌 콘텍스트에서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도전

영화 '두 교황'(2019)에서, 보수적인 교황 라칭거(안소니 홉킨스 분)는 추기경 베르고글리오(조너선 프라이스 분)가 과거 공산주의자들의 책을 불태우고 동성 결혼을 악마의 계략이라고 몰아붙였던 것을 상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과거에는 나랑 같았죠", "변화는 타협이오. 주님은 변하지 않아요." 베르고글리오는 답한다. "아닙니다, 주님도 변해요. 우리 쪽으로 오시잖아요." 베르고글리오는 진화했다.

레이첼은 <헤아려 본 믿음> 서문 '나는 왜 진화론자인가'에 이렇게 썼다.

"진화는 우리의 잘못된 원칙들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그분이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그 어두운 곳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다. 틀려도 괜찮다는 뜻이다. 모든 답을 갖고 있지 않아도 괜찮고 끝을 맺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32쪽)

4년 전, 출발점과 경위야 다르지만 각자의 서식지를 떠나 진화 중이던 영화하는 그리스도인 몇 사람이 모여 '제1회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를 시작했을 때, 우리는 소위 영화에 대한 '기독교적' 규범과 정의를 넘어서 보자고 약속했다. 그것은 영화가 품고 있는 세상의 질문들을 정직하게 읽고 성실하게 답하되, 성경이라는 텍스트로 회귀하고 의미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과 함께 콘텍스트를 향해 한 걸음 발을 내딛기로 한 움직임이었다. 이 일은 귀중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힘에 부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매해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

요즘처럼 난해한 질문들이 빠르고 대차게 쏟아지는 시절은 더욱 그렇다. 세월호에 대해 어떤 속 시원한 답도 듣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이태원 참사를 맞았고, 이태원 참사 후 100일 즈음 임보라 목사의 부고를 접했으며, 연이어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의 한복판에 멈춰 서야 했다. 이처럼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악의 카르텔 앞에서 자주 절망하고 여전한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이 야속하기만 한데, 책의 마지막 즈음 레이첼이 쓴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게 하나 있다면, 절망을 초래하는 정도의 아주 심각한 의심은 하나님께 질문하기 시작할 때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질문하기를 멈출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 (262쪽)

이어서 그가 유작에 남겨 둔 다정한 목소리.

"계속 질문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워 가렴.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거든, 그땐 생각해 봐.
무엇이 너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주는지, 
무엇이 너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는지,
무엇이 너를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 주는지.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 거야." 
[레이첼 헬드 에반스·메튜 폴 터너,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바람이불어오는 곳) 중]

최은 / 영화 평론가.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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