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김은석 간사] 21세기 대한민국에 스스로를 독립운동가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다. "저는 제 아이덴티티를 통일을 위한 독립운동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양과학기술대학교(평양과기대) 설립 부총장이라는 수식어가 익숙한 한동대학교 정진호 교수(유라시아원이스트씨포럼 회장)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다.

서울대학교 재료공학과를 나온 그는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박사 후 연구원 과정을 밟던 중 처음 예수를 믿고 깊은 회심을 경험한다. 1990년 한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KOSTA에 참석했다가 김진경 총장(연변과학기술대학교)과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의 설교를 통해 남과 북, 그리고 흩어진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하나 되게 하는 일을 꿈꾸게 된다. 1994년 "독립운동가들의 후예를 가르치는 대학"이라는 비전 하나를 붙잡고, 탄탄대로가 놓여 있던 MIT 연구원 생활을 뒤로한 채 중국으로 떠나 연변과기대 교수가 된다. 2003년부터는 한국교회는 물론 한인 크리스천들에게 평양과기대 설립의 꿈을 설파하며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고, 마침내 2010년 북한 최초의 사립대학인 평양과기대가 설립됐다.

장편 역사소설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울독)을 쓴 정진호 교수(한동대학교)는 스스로를 "통일을 위한 독립운동가"로 소개한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장편 역사소설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울독)을 쓴 정진호 교수(한동대학교)는 스스로를 "통일을 위한 독립운동가"로 소개한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정진호 교수는 2017년 여름 영주권 갱신을 위해 평양에서 나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안식년을 보낸 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대신 한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단법인 유라시아원이스트씨포럼을 만들고, 남과 북이 공유하는 동해안을 따라 함께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 나가 화해와 상생, 평화 경제를 이뤄 가는 꿈을 키우고 있다.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울독)은 그가 토론토에서 머물던 2018년부터 3년 여간 집필한 역사소설이다. 이미 두 권의 소설을 비롯해 자신의 신앙과 비전을 담은 여러 책을 쓴 다작가이긴 하지만, 역사학자도 아닌 공학박사인 그가 사료 검증 등 전문성이 뒷받침돼야 할 역사소설까지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3월 31일 <뉴스앤조이> 강도현 대표가 정 교수를 만나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을 쓰게 된 계기와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 중구 희년평화빌딩에서 실시간 중계된 인터뷰 영상은 <뉴스앤조이>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공학자가 역사소설을 쓴 이유

"왜 공학자가 역사소설을 썼냐는 얘기를 하는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가 반문을 하죠. 코페르니쿠스가 무슨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 아느냐고요. 다들 당연히 '천문학 박사' 아니냐고 하는데, 코페르니쿠스는 법학 박사거든요. 당시 대학은 우주의 모든 것을 가르치는 곳이었어요. 코페르니쿠스는 수학·천문학·물리학·법학·경제학·의학까지 모든 학문을 섭렵했기 때문에 '박사'라고 불린 거예요.
 

박사의 박 자가 '넓을 박'이잖아요. 저는 학문이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역사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박사들은 자기 전문 분야 아니면 아무것도 몰라요. 박사가 아니라 '협사狹士'들이에요. 그러니까 '왜 공학박사는 역사소설을 쓰면 안 되느냐'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 책을 거의 3년에 걸쳐서 썼는데요. 정말 박사 학위논문 하나 더 쓴다는 각오로 자료 수백 건을 찾아 읽었어요. 그리고 이 책은 어떤 지식만으로 쓰인 게 아니에요. 책에 나오는 지역 대부분을 제가 실제로 다니고 살아 봤기 때문에, 저는 이 책이 살아 있는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은 구례선·리동휘·손정도의 삶과 행적을 중심으로, 가려진 독립운동·선교 역사를 그려 낸 역사소설이다. 상·하 2권으로 펴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은 구례선·리동휘·손정도의 삶과 행적을 중심으로, 가려진 독립운동·선교 역사를 그려 낸 역사소설이다. 상·하 2권으로 펴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국사 수업 시간에 한 번쯤 들어 봤을 숱한 역사 속 인물이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에 등장한다. 정 교수는 민족과 신앙을 위해 투신한 독립운동가와 선교사들이 남긴 흔적에 소설적 생기를 불어넣는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분단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 세력의 규합과 갈등, 치열하게 펼쳐지는 독립 전쟁의 순간들, 민족을 배반한 밀정들, 그 가운데서 민족의 독립 통일을 염원했던 이들의 궤적을 그려 내며 민족 분열의 원인을 추적한다.

부끄러움에서 시작한 집필

'구례선과 리동휘 그리고 손정도'는 이 책의 부제이자 소설을 끌고 가는 중심인물들이다. 세 사람 모두 북간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족적을 남긴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대중에게는 생소한 이름들이다. 특히 구례선은 연변과기대 부임 후 20년이 넘게 만주와 북간도를 다닌 정 교수도 이 책을 쓰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인데요. 연변과기대에 있을 때 숱한 손님을 모시고 윤동주 시인이 나온 용정은진중학교를 다녔어요. 거기 가면, 학교를 설립한 분 이름이 구례선이라고 쓰여 있어요. 그런데 연변에서 20년가량 살면서도 이 분이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이었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나중에 책을 읽으며 알게 됐는데, 북간도 용정이 캐나다 선교사들의 주된 사역지였더라고요. 그만큼 무지했던 거죠. 이렇게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준 독립운동가나 선교사들을 이름도 제대로 모른 채 살아왔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 부끄러움에서 이 책 집필을 시작한 거예요."

1898년 한국 땅을 밟은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1868~1965)은 캐나다 장로교회 파송 선교사로 36년간 한국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병원(제동병원)과 학교(보신소년학교·용정은진중학교)를 세웠다. 그는 독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해 1968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 메달을 받았다.

"당시 선교지 분할 정책에 의해서 함경도와 북간도, 연해주까지가 캐나다 선교사 관할 구역이었어요. 놀랍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을 수여한 선교사들 중에 캐나다 출신이 가장 많아요. 선교사 숫자는 미국 선교사의 15분의 1밖에 안 되는데 말이지요."

3월 31일 <뉴스앤조이> 강도현 대표가 정진호 교수와 만나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을 쓰게 된 계기와 책이 담고 있는 내용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3월 31일 <뉴스앤조이> 강도현 대표가 정진호 교수와 만나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을 쓰게 된 계기와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정진호 교수는 미국 선교사 중심으로 알려진 한국 개신교 역사 탓에 한국교회가 캐나다 선교사들의 활동과 영향력에 대해서는 잘 가르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개인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구원을 위해 애썼던 이들의 역사가 감추어져 있는 현실을 아쉬워했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배우면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대해서는 많이 듣지만 상동교회를 세운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 선교사에 대해서는 잘 배우지 않아요. 1885년에 언더우드·아펜젤러와 함께 들어오신 분인데도요.

 

이분이 사회복음을 강조하는 성향이 강해서 당시 상동교회도 남대문시장 상인, 천민, 기생들 가까이에 세웠어요. 그 교회에 청년들이 몰려들어 상동청년회가 세워지고 신민회 활동으로 이어졌고요. 그런데 일제 후반기에 한국교회가 친일을 하면서 스크랜턴이나 전덕기 목사, 상동교회의 역사는 가려진 거죠."

구례선, 리동휘, 손정도
일제와 분단이 감춘 역사 속 인물들

리동휘는 1909년 구례선을 만나 권서인(전도 지·성경 등을 들고다니며 배부하거나 팔던 사람 - 편집자 주)과 조사(전도사)로 활동하며 복음을 전하고 서북 지역에 교회를 세운 인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와 동일인이다. '강화의 바울'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열심인 신앙인이었고, 이회영·전덕기·이동녕·안창호·양기탁·김구·김규식 등과 항일 단체 신민회를 조직한 항일 독립운동가였으며, 전국 곳곳에 보창학교를 세운 교육가이기도 했다. 1913년 북간도 망명 후에도 수많은 학교와 군사학교를 세웠고 이상설·이동녕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며 독립 전쟁을 준비했다.임시정부를 수립한 주요 인물이지만 이승만·안창호 등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다.

"리동휘 장군은 군인인 동시에 교육자였어요. 우리는 그 당시 교육자라고 하면 도산 안창호를 떠올리는데, 저는 교육자로서 단연코 리동휘 장군이 최고였다고 생각해요. 무려 170개의 보창학교를 전국에 세웠어요. 리동휘는 자신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오전에 일반 학과 공부도 하고 성경도 가르쳤지만, 오후에는 꼭 군사훈련을 시켰어요. 일제가 봤을 때는 독립군 키워 내는 학교였던 거죠. 그래서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한 이후에 완전히 다 폐쇄해요. 그래서 (당시 세워진) 다른 학교들은 살아남았지만 보창학교는 남아 있지 않은 거예요.

 

리동휘의 유명한 설교·강연 내용이 뭐냐면 '1동 1학교, 1동 1교회'예요. 가는 곳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 설교를 했어요. 삼천리 방방곡곡 교회 하나 학교 하나 세우면 우리가 독립할 수 있다고 외쳤어요. 리동휘가 다녀가면 그곳에 교회가 하나, 학교가 하나 세워질 정도로 대부흥사이자 대교육자였어요. 그런 인물을 우리 사회가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나중에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가 됐기 때문이에요. 분단의 역사가 가린 거죠. 훗날 사회주의 성향을 갖게 된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손정도 목사(1881~1931)는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 6대 담임목사로, 교회를 당대 국내 최대 교회로 성장시킨 목회자였고, 임시정부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였다. 정진호 교수는 그를 "남과 북에서 공히 존경받는 유일한 목사"라고 표현했다. 그의 큰아들 손원일(1909~1980)은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인물로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반면 그의 둘째 아들 손원태는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말년에 북한 김일성을 찾아가 깊은 해후를 하고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김일성은 자신의 항일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에 한 장을 할애해 손 목사를 은인으로 소개할 정도로 존경을 표했다. 김일성은 어린 시절 부친과 사별 후 부친의 숭실중학교 선배인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 교회에 출석하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정진호 교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념 갈등과 분단의 역사가 가린 역사적 인물·이야기들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정진호 교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념 갈등과 분단의 역사가 가린 역사적 인물·이야기들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손정도 목사님은 우리가 북한을 이해하고 북한으로 건너가기 위해 감추어진 비밀 병기 같은,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이에요. 북한에는 손정도 목사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의 두 아들이 한 명은 국립묘지에 한 명은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는 게 우리 분단의 비극이죠.
 

저는 손정도 목사님을 3·1운동의 숨은 기획자로 보고 있어요. 유관순이라는 사람이 저절로 나온 게 아니에요. 정동제일교회에서 손정도 목사에게 배웠기 때문에 유관순이 나올 수 있었던 거죠. 그 큰 교회 담임목사 자리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평양으로, 상해로 건너갔어요. 기호파와 서북인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고요.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도 손정도 목사라고 봅니다. 북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김일성과의 관계 때문에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거죠."

정 교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사회가 잘 가르치지 않는 역사적 인물, 이념 갈등과 분단의 역사가 가린 이야기들을 더욱 잘 알아야 하고, 그 역사를 자녀 세대에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책을 읽으면 독자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근현대사를 자신 있게 가르칠 수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자녀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게 왜 중요하냐면, 그게 바로 성경의 스토리이거든요.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예요.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살아 냈는지 보여 주는 게 성경이죠.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를 보세요. 부끄럽다고 여길 수 있는 네 명의 여인들이 나오죠. 그중 밧세바는 다윗의 살인죄와 간음죄를 동시에 드러내기 위해 이름이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라고 표현해요. 인간의 모든 죄악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책이 성경이에요.

역사를 바로 깨우치지 않으면 미래로 가는 방향을 잡을 수 없어요. 독일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자녀 세대에게 정확히 가르쳤기 때문에 변화하고 성장했어요. 반면에 일본은 그렇지 않았죠. 이 책을 읽고 '우리에게 이런 부끄러운 역사가 있었구나'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걸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부끄러운 과거를 알아야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통일 시대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사단법인 하나누리, 희년함께와 공동으로 4월 15일부터 2개월간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 완독 모임을 진행한다. 4월 15일 저녁 오리엔테이션 모임을 시작으로, 5월 28일 정진호 교수의 해설과 함께 상동교회 등 서울 중구 내 독립운동 발자취를 둘러보는 행사로 마무리한다.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 완독 모임 참가 신청 바로 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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