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이 주기도문을 암송하던 때를 우리는 다 기억한다." (10쪽)

'주기도문' 하면 항상 두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제가 참 좋아하고 동경하던 중고등부 전도사님이 드디어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으로 '축도'하던 날입니다. 늘 반듯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던 저는 그날만큼은 눈을 뜨고 전도사님을, 아니 목사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드디어 주기도문으로 안 마치시고 축도를 하시는구나' 하고 말이지요. 돌아보면, 제게 주기도문은 '계급 낮은 성직자가 예배를 마무리하는 형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날의 축도 순서는, 제가 사랑하던 전도사님이 드디어 '승진'하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뜻 깊은 순간이어서 제 눈에 담고 싶었던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십수 년 전 비샬 망갈와디라는 인도인의 책에서 본 내용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는 9세기 즈음 중국 사원들에 있었던 '회전 책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당시 중국 승려들은 수많은 책을 회전 책장에 넣어 보관했다고 합니다. 사원에서는 밤낮으로 회전 책장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는데요. 애석하게도 그 소리는 승려들이 열심히 책을 찾아 읽는 것과는 무관했고, 그저 회전 책장 바퀴 돌아가는 소리를 일종의 '명상' 도구로 썼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책과 근사한 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정작 책 내용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물론 제게는 이 말의 역사적 진위를 따져 볼 실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기도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이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의 주기도문이 꼭 이와 비슷한 듯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인데도 사실상 '축도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요. 혹은 수십 년을 외워 왔지만 정작 내용에는 관심 없이 회전 책장만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물론 저는 이 두 가지 경우에 빠진 이들에게 악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전자는 예배의 구조적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후자는 '익숙한 것들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주기도문뿐만 아니라 우리는 가령 익숙한 가족, 익숙한 친구에 대해 사실은 잘 모르곤 합니다. 알지만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초기 교회에서 배우는 주기도문 - 과거와 오늘의 교회가 함께 드리는 주님의 기도> /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 오현미 옮김 / 이레서원 펴냄 / 248쪽 / 1만 4000원
<초기 교회에서 배우는 주기도문 - 과거와 오늘의 교회가 함께 드리는 주님의 기도> /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 오현미 옮김 / 이레서원 펴냄 / 248쪽 / 1만 4000원

고맙게도 후스토 곤잘레스는 이런 구조적 문제나 익숙한 것들의 운명에 빠진 주기도문을 구출해 내기 위한 아름다운 작업을 해 냈습니다. 바로 <초기 교회에서 배우는 주기도문>(이레서원)을 집필한 것입니다. 이 책을 구해 읽는 분들은,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는 전도사를 더 이상 '승진이 덜 된 성직자'로 바라보기 어려우실 겁니다. 오히려 '아, 저 전도사님이 정말 위대한 기도로 예배를 매듭짓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실 겁니다. 또한,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몰랐던 주기도문의 문구와 속뜻을 새롭게 만나게 되실 겁니다.

사실 주기도문에 관한 책은 이미 많습니다만, 이 책의 특별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저자가 역사신학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문 자체에 대한 해설을 넘어, 초기 기독교 선조들이 주기도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끝없이 인용하고 설명합니다. 그분들의 이야기 중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인지까지 나아갑니다. 아울러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주기도문이 어떤 용도였는지도 밝혀 줍니다. 예를 들면, 당시 신자들은 하루 세 번씩 주기도문으로 기도했다는 등의 사실을 알려 주지요(17쪽). 지금 우리 모습과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저자가 역사신학자이기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큰 틀에서 이런 점이 이 책의 매력입니다.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약해 보여 주는 역할을 했고, 한 사람의 모든 행동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구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 역할을 했다." (29쪽)

후스토 곤잘레스는 역사신학자이면서도 성서를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목회자답게, 주기도문 한 구절 한 구절을 치밀하게 해설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도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말을 지속적으로 비교·분석하지요.

먼저 1장에서 '우리'의 의미를 다루는데, 핵심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우리' 아버지시라면 "우리 사회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가혹한 개인주의"(46쪽)는 옳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는 "개별적 존재의 응집체"(46쪽)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2장에서는 '아버지'의 의미를 다루는데, 이는 하나님이 '남자'라는 말과 전혀 무관합니다. 일종의 은유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임을 가리킬 뿐입니다(64쪽). 은유는 은유일 뿐이고, 거기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63쪽).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의 핵심은 우리가 서로 형제요, 자매라는 것입니다(59쪽). 세상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용인할 수 없는 기독교의 윤리적 토대가 주기도문에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3장에서는 '하늘'의 의미를 다루는데요. 이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디작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시작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신비"(84쪽)라는 뜻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문자적으로 하늘(천국)에 계신 분으로 이해한 나머지, 이 땅의 불의한 현실과 무관한 '영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분이 적지 않은 현실을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4장부터는 드디어 '간구'의 내용을 다룹니다. 6장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뜻에 관한 해설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간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목적과 속성을 확언하는 말입니다(92쪽). 다시 말해 우리가 굳이 간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이름은 이미 거룩하십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일의 주도권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이 세 가지는 "표현상으로는"(129쪽) 간구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의와 공평"(102쪽)이 깨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불의와 착취"(123쪽)가 자행되는 세상에 "새로운 질서"(122쪽)인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수천 명이 기아로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는 곳"(142쪽)에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를 안 하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계시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곤잘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는 그런 기도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슬픈 세상의 변혁을 하나님께 떠넘기기 위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변혁을 완성하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나라가 임하기를,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잠언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곤궁한 사람의 희생으로 풍요를 누리는 일이 없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157쪽)

혹시라도 주기도문을 추상적 관념으로 이해할까 봐, 혹은 부자들이 자신이 누리는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오해할까 봐, 예수님은 친절하게 다음의 문장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부분을 다룬 7장이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에 가장 중요한 챕터라고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저자는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꼭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주어지지 않기를"(154쪽) 구하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가요? 아니, 얼마나 가슴 아픈 표현인가요? "궁핍한 사람들이 많은데 혼자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은 기괴하다"(156쪽)는 초기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세계관으로부터 한국교회는 다시 출발해야만 할 겁니다. 곤잘레스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는 예배 때만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를 체계화하는 방식과도 관련된 일이다."(154쪽) 그러므로 우리를 단지 '예배 잘 드리는 사람'으로 머무르게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목회자들과는 부디 이별을 고합시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 있다." (164쪽)

예전에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말이 앞 문장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곤잘레스는 8장을 통해 설명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 앞부분을 아무리 진심으로 고백한들 우리는 결코 그 고백대로 살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죄의 문제가 있다고 말입니다(164쪽).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말은 문맥에 아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하늘이 뭔지, 왜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인지, 거룩함은 무엇이고 하나님나라는 또 무엇인지,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잘 알지만 그대로 살아 내지도 못하면서 누군가를 형편없이 바라보거나 미워하던 순간들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니 말입니다. 이 간구는 괜히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설 수가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9장과 10장은 우리의 연약한 현실에 대한 인정과 고백을 다룹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기도하며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부정합니다(190쪽).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우리는 악의 권세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합니다(203쪽). 예수님은 이런 후반부의 간구들을 왜 일러주셨을까요? 우리가 스스로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시려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우리의 실상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진정함 도움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은 언제나 "효험"(215쪽)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소망합니다(221쪽). 그 마음으로 엄중하게 기도를 마칩니다. '아멘!'

저는 이 글을 교회 간판을 교체한 날 쓰고 있습니다. 부임한지 두 달 반 만에 교회 이름도 바꾸고, 간판도 새로 한 것이지요. 새로운 간판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고, 책임감도 더 생기는 것 같습니다. 새 단장을 마친 지금, 저는 무엇을 꿈꿔야 할까요. 교인이 두 분에 불과한 개척교회니까, 교회가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곤잘레스가 소개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일화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중략) 결과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지배자 계급과 그 외의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있는 현실은 복음 자체와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해서 이에 적의를 품은 다수의 권세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결국 그는 이 때문에 유배당했다가 끝내는 죽었다." (39~40쪽)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그가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니라 "모두가 공동의 아버지께 기도하므로 모두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대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음이 확실"(40쪽)합니다. 그는 주기도문이 과연 무엇인지 핵심을 꿰뚫고 있었던 셈입니다.

교회 간판도 새로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주기도문을 살아 낸 크리소스토무스를 흉내라도 낼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이 고민을 안겨 준 후스토 곤잘레스에게 고맙습니다. 가능하다면 그가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목회자들에게 부담을 주면 좋겠습니다.

이현우/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유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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