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제목은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김영사)에서 차용했다. 글의 첫 문장은 이성복 산문 <고백의 형식들 -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열화당)에서 가져왔다. - 필자 주

"사람은 X 없이 살 수 있는가." 시인 이성복은 X 자리에 놀랍게도 '시'라고 썼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X 자리에 '예수'라고 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앞의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예수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에 들어갈 만한 다른 수많은 X만이 떠올랐다. 이 X들은 내 마음의 우주를 형성하는 항성들일 터. 나는 수많은 X들을 중심으로 핑핑 돌고 있는데, 그래서 피로하고 탈진하기 직전인데, 만일 그 X가 나사렛 예수가 된다면 어떨까. 내 깊은 마음의 생태계에도 비로소 평화가 찾아올까. 리치 빌로다스의 <예수님께 뿌리내린 삶>(IVP)은 예수가 평화를 심어 준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평화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X가 있다고 말한다.

화해의 여정을 걷는 교회

나는 이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책 소개받았을 때는 '뉴욕에서 꽤 유망한 젊은 목사가 쓴 책이니 무난하고 듣기 좋은 말씀이겠지' 정도로 생각했지만 금세 마음이 바뀌었다. 책에서 저자가 길게 인용한 메일을 읽었기 때문이다. 영화 '미나리'의 감독 정이삭이 저자에게 보낸 메일이었다. 이 메일을 읽고 '세상에, 이런 교회도 있구나' 싶어 놀랍고 고마웠다.

정 감독의 메일은 영화 '문유랑가보'를 만들면서 깨달은 것을 이야기한다. 문유랑가보는 르완다 인종 학살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은 투치족 청년의 이름이다. 영화는 복수심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 문유랑가보가 정글도를 들고 아버지를 살해한 후투족 사람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한다. 정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화해의 과정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정 감독은 르완다에 갈 때만 해도, 아칸소주의 농장에서 자란 한국계 미국인인 자신이 두 문화를 잇는 일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뿌리 깊은 편견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화해의 여정은 서로를 동등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좋은 친구가 되어 가는 사귐이라고 쓴다.

"르완다 문화를 받아들이고 거기서 교훈을 얻게 만드는 깨달음의 순간 같은 것이 따로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대화와 방문은 하나의 과정으로 보였습니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평생에 걸쳐 풀어 나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15~116쪽)

편지의 행간에서 내가 본 것은 '교회'였다. 리치 빌로다스 목사와 정이삭 감독이 속한 공동체는 진정 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나사렛 예수의 길을 세상 속에서 걸어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었다.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화해의 여정을 걷는 교회라니, 저런 웅숭깊은 대화를 나누는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 것일까. 충분히 기다릴만한 책이었다.

<예수님께 뿌리내린 삶 -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다섯 가지 일상 제자도> / 리치 빌로다스 지음 / 홍종락 옮김 / IVP 펴냄 / 288쪽 / 1만 5000원
<예수님께 뿌리내린 삶 -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다섯 가지 일상 제자도> / 리치 빌로다스 지음 / 홍종락 옮김 / IVP 펴냄 / 288쪽 / 1만 5000원
관상적인 리듬을 배워야 할 때

나는 영성에 관한 책을 고를 때, 저자가 젊은 사람이면 일단 살 마음을 접는다. 영성이란 경험과 비슷한 것인데, 겪어 본 일이 적은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싶어서다. 그래서 <예수님께 뿌리내린 삶>이 리치 빌로다스 목사의 첫 번째 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설레는 마음이 수그러든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보란 듯이 자신을 입증하려는 젊은 목사의 패기 어린 산물이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문을 읽으면서 실망감은 사라졌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책이 저자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 이야기라는 점이고, 둘째는 그 교회가 30년 전부터 일관성 있게 건강한 영성을 추구해 온 지역 교회라는 점이다. 특별한 실험을 해 온 뉴라이프펠로십교회의 경험과 영성을 계승한 저자가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역 공동체 제자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몰락해 가는 북미 교회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지역 교회가 자신만의 영적 유산을 공유하기 위해 내놓는 책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뉴라이프펠로십교회를 설립한 피터 스카지로 목사는 이 책의 특징을 '지역적'이라고 했을 것이다.

피터 스카지로 목사는 <정서적으로 온전한 교회>·<정서적으로 온전한 영성>(두란노)의 저자고, 지금도 '정서적으로 온전한 제자도' 운동을 이끌고 있다. 그는 교회의 로고에 빙산 이미지를 넣었다. 빙산은 깊은 마음의 은유다. 북미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생활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빙산의 몸통에 해당되는 병폐이기 때문에 고쳐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저마다 깊은 마음의 뿌리부터 회복해야 한다는 진단에서 뉴라이프펠로십교회는 설립됐고, 기독교 영성 전통의 대가들의 가르침을 따라 다양한 실험을 하는 특별한 매뉴얼을 만들어 왔다. 이 책의 내용도 실전에 투입된 젊은 교관의 야전 수칙에 가깝다.

'관상적 리듬'을 다루는 1장은, 뉴라이프펠로십교회 영적 생활의 기본기에 해당한다. '관상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관상적인 것'은 '관념적·가식적인 것'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한다. 유진 피터슨은 관상적인 것을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실천이라고 보았고, 마르틴 루터는 관상적인 것의 정수를 시련이라고 정의했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적 경건 생활의 리듬에 충실하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생길수록 더 기도하고 더 행동하려고 한다. 그러다 뿌리부터 잘못됐다는 회의감에 빠진다. 피상적 관계는 상처와 환멸 속에 끝나고, 가식적 종교 생활의 에너지는 고갈되며, 시험과 시련의 시기를 맞는다. 바로 여기가 뉴라이프펠로십교회가 실천하는 '관상적 리듬', 마음의 침묵과 안식일이 필요한 지점이다. 온갖 발버둥이 다 끝나고 막다른 벽에 머리를 찧는 상태, 어찌할 도리가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관상적 리듬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관상적인 리듬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형성되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은 영적 성숙의 절정에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첫걸음을 떼면서 갖춰야 할 기본기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오늘 우리에게 기독교란 정말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정말 누구인가' 물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현존하기 위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고심한 것이다. 저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고 묻는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나사렛 예수가 현존한다면, 오늘 우리는 그의 모습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나사렛 예수와 같이 깊은 차원에서 새롭게 빚어져야 하고, 그와 함께 걸어야 한다.

깊이의 심리학에서 너비의 생태학으로

저자가 말하는 '예수님께 뿌리내린 삶'은 관상적 리듬에 몸을 맡기면서 화해의 길을 가는 공동체다. 저자는 화해의 여정을 이야기하면서 빙산 이미지에 더해 '삼나무 근계'라는 은유를 끌어온다. 서로 얽히면서 지탱하는 삼나무 근계는 깊이와 너비를 동시에 아우르는 깊은 마음의 은유다. 깊은 마음의 생태계는 빙산 하나처럼 개별적인 세계가 아니라 삼나무 뿌리처럼 서로 얽혀 있는 공동체다. 삼나무 뿌리들이 통합, 교차, 뒤얽힘, 엮임을 통해 거대한 숲을 이루듯, 하나님나라 공동체도 깊은 마음의 생태계가 서로 엮이며 회복되지 않으면 평화에 이를 수 없다. 깊이는 곧 너비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스카지로 목사의 '깊이의 제자도'가 이 책에서는 '너비의 공동체'로 전환된다. 깊이를 회복하는 여정은 너비를 회복하는 화해의 여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북미 교회 현실적 병폐인 피상성과 구획화된 삶은 화해의 여정에서도 장애물로 드러난다. 뉴라이프펠로십교회는 76개국 출신의 교인들이 모인다고 한다. 언어적·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만큼 여러 문제가 있었다. 피상성과 구획화로 발생하는 문제들은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리치 빌로다스조차 깊이 들여다보고 경청하지 않을 때는 이를 알 수 없었다. 다양한 교인이 제기하는 차별·배제의 문제가 드러났을 때, 뉴라이프펠로십교회는 관상적 리듬을 따라서 화해의 여정을 시작한다.

화해의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저자가 소개하는 일곱 가지 습관은 하도 낯설어서 지나칠 뻔했다. 기억 - 성육신적 경청 - 탄식 - 화해의 기도 - 인종 문제에 대한 자기 점검 - 백인성의 거부 - 정기적인 고백·회개·용서. 깊은 마음에서 시작된 이 일곱 가지 습관은 차별과 배제의 경계를 허무는 길로 이끈다. 이데올로기에 찌든 역사적 기억과 서사를 성찰하면서,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탄식하면서, 기도하고 행동하면서, 우리가 혐오하는 타인의 모습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성찰하면서. 깊이 형성되는 화해의 길은 공동체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구체적인 과정이다. 부서지고 탈진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지고, 상처받은 마음을 열고, 깊은 마음의 생태계를 회복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만하면 좋지 않을까.

이 책이 제시하는 화해와 선교의 여정을 비평가의 안목으로 본다면, 이 작은 나무가 과연 숲으로 갈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살아 있는 목소리이자 행동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길이 막히면 다른 방식으로 넘어설 것이라고 믿는다. 깊은 마음을 생각하는 화해의 여정은 우리를 다그치지 않는다. '화해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고, 화해가 일어나는 공간을 만들고 스스로 화해와 평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앞서 소개한 정이삭 감독의 이메일은 화해의 과정을 가겠다는 다짐으로 끝난다. "저는 르완다 친구들에게 화해의 과정을 이어 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과정 자체가 거룩한 사역이라고 깊이 믿으면서 말입니다." 사려 깊은 마음에서 우러난 이 고백에 내가 항복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광하 / 일산은혜교회에서 하나님나라 이야기가 생겨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목사. <뉴스앤조이>와 <복음과상황>에서 일했다. 시를 읽고 자전거를 타는 삶을 동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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