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야호, 프랑켄슈타인, 계시록

한때 사람들이 너나없이 "무야~호~"를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무야호'라는 말이 지닌 발음 자체의 경쾌함과 찰떡 같은 손짓, 미쳐 버린 활용도와 응용력 등 덕택에 사람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웃긴다'는 이유로 이 '밈(meme)'에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무야호'는 많은 사람이 사용할수록 더 다양하고 '똘끼' 넘치는 베리에이션으로 진화했고, 그 영향력은 밈의 무덤이자 유행의 종말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에까지 이르러 아주 널리 번성했다.

그런데 아마도 '무야호'를 외칠 때 사람마다 떠올리는 이미지는 제각각일 것이다. 누군가는 정확하게 '무야호'의 원본인 MBC '무한도전'을 떠올리겠지만, 누군가는 축구 감독 무리뉴의 인터뷰 합성 편집본이 생각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유튜버 '소련여자'나, 소위 '볶음밥'이라고 부르는 편집 영상 형태의 밈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 '무야호'의 근원을 찾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이 감탄사의 원본이 무엇이며 어떤 맥락에서 왜 등장하게 됐는지에 딱히 관심이 없다. 밈에서 원본의 맥락과 의도는 철저히 무시되기 일쑤다. 그것이 밈의 생산·유통·작동 방식이다.

무야~호~. MBCentertainment 유튜브 채널 갈무리
무야~호~. MBCentertainment 유튜브 채널 갈무리

'요한의 묵시록', '요한계시록'으로 불리는 계시록 생애사를 탐색한 티머시 빌의 <계시록과 만나다>(비아)는 계시록에도 이런 원리가 작동한다고 말한다. 저자인 티머시 빌은 이를 '프랑켄슈타인 현상'이라고 명명한다(35쪽). 빌은 계시록과 <프랑켄슈타인>은 텍스트로 출판된 책 이상의 '문화 현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 내 나이 또래는 애니메이션 '두치와 뿌꾸'의 멍청한 초록색 나사 괴물을 떠올릴 것이다. 아마 '두치와 뿌꾸'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프랑켄슈타인은 비슷한 이미지로 기억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이라는 콘텐츠를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몇 가지 파편적 이미지로 공감대를 만든다. '666'이나 '적그리스도', '용(뱀)', '휴거' 같은 것들 말이다. 심지어 거리와 광장에서 시뻘건 글씨의 팻말을 들고 계신 선생님들 덕에 비기독교인들도 '계시록이라면 응당 저런 것들이 등장하겠거니' 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은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작품 내내 실존적 고민에 빠져 있는 지적 존재로 그려진다. 괴물의 피부는 초록색도 아니고 머리에 나사가 박혀 있지도 않다. 애초에 이 괴물의 이름은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릴 때, 이 모든 사실에는 그닥 관심이 없고 문화적으로 '유통된' 이미지를 소비한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에는 적그리스도가 나오지 않는다. 휴거 장면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내 말이 거짓말인 것 같다면, 계시록을 꼼꼼히 읽어 봤으면 좋겠다.

저자는 바로 이 점을 꼬집는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성서 내용 그 자체에 딱히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특별히 계시록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계시록은 강력한 생명력을 갖고 계시록과 결합된 어떤 이미지로써 사람들에게 널리 유통되고 번성했다. '무야호' 같은 밈처럼 말이다.

<계시록과 만나다 - 천상과 지상을 비추는 괴물> / 티머시 빌 지음 / 강성윤 옮김 / 비아 펴냄 / 300쪽 / 1만 7000원
<계시록과 만나다 - 천상과 지상을 비추는 괴물> / 티머시 빌 지음 / 강성윤 옮김 / 비아 펴냄 / 300쪽 / 1만 7000원
공포와 불안을 먹고 자라는 괴물,
분열을 부추기는 괴물

'밈'이라 부를 수 있는 문화 현상에는 작동 방식이 있다. 먼저 밈은 원본의 전체 맥락과는 무관하게 파편화한 이미지로 쪼개진다. 이 과정에서 밈은 맥락을 잃고 독자적인 이미지를 획득한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이 원맥락에서 벗어나 초록 피부의 무지성 '힘캐' 이미지를 얻었듯이, '무야호'가 알래스카 현지 교민들과 인터뷰하며 교민 '김상덕' 씨를 찾아간다는 '무한도전'의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웃겨 죽겠는 '티키타카'로 파편화했듯이, 사람들 대다수가 계시록에 '적그리스도'나 '휴거'가 등장한다고 착각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작동하기 시작한 밈은 사람의 감정을 에너지 삼아 확산·유통되기 시작한다. 물론 나는 문화 연구자도 아니고 밈의 유통 구조를 정확히 논할 만한 사람도 아니지만, 적어도 밈을 즐기는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밈은 사람의 감정과 공감대를 먹고 더욱 강력하게 뻗어 나가는 것 같다. 이를테면 계시록은 사람들의 '불안'을 먹고 자란다. 사람들이 '무야호'의 손동작 혹은 소리의 액센트를 인식하자마자 너나없이 낄낄대듯이, 계시록의 충격적인 심상들을 보고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그들이 계시록을 통해 공포심을 느낄수록 계시록이 발현하는 '이미지'는 더욱 번성한다.

빌은 이 책에서 계시록이라는 '밈'이 유통되는 문화사를 살피며, 이런 시대적 불안을 야기하는 혼란을 "종말의 각본"(272쪽)이라고 표현한다. 힐데가르트와 조아키노가 계시록의 풍부한 심상을 활용해 일종의 종합예술과도 같은 종말론신학을 전개하던 A. D. 1000년경 중세 유럽은 정치와 종교 전반에 갈등·부패·분열이 가득한 시기였다(116쪽). 종교개혁 시대, 루터는 사람들이 계시록만큼은 읽지 않기를 바라면서 신약성서를 번역했지만, 계시록의 파괴적이고 혼란스러운 이미지는 격변하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오히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189쪽, 192쪽).

유럽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마주한, 특별히 기독교 외의 고등 종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 서구 사회는 이슬람·불교와 같은 타 종교를 해석하는 도구로 계시록의 괴물 이미지를 활발히 채택했다(200쪽). 그 어느 때보다 계시록의 공포스러운 이미지에 환호하는 현대에 들어서는, 컴퓨터의 등장과 국제금융의 성장, 다원화한 사회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의 불안이 계시록의 이미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0쪽). 계시록은 시대적 혼란과 종말의 각본에 따라 조성되는 사람들의 불안감이라는 기름진 토양을 먹고 강력한 번성의 생애를 구가해 왔다.

빌은 '종말의 각본' 이면에 '종말의 흐름'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종말의 각본과 종말의 흐름은 언제나 짝을 이뤄 작동했다. 빌이 정의하는 '종말의 흐름'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세상을 극단적인 선악 이분법으로 해석하는 '인식론', 그리고 선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악을 상대에게 투영하여 이 이분법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정의감'이라고 할 수 있다(272쪽). 종말의 흐름은 무엇보다 저자가 제시한 계시록의 생애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계시록은 힐데가르트와 조아키노의 시대에 '선한 가톨릭교회는 십자군전쟁 등을 통해 악을 이겨 내야 한다는 사람들의 사명감'을 자양분 삼아 힘을 얻었다(133, 155쪽).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극에 달한 종교개혁 시대에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계시록의 괴물로 타자화·악마화했다(189쪽). 근현대는 말할 것도 없다. 외부의 적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며 스스로를 계시록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자임한 나치당의 히틀러는 전 세계를 공멸로 몰아갔다(196~197쪽).

나 또한 계시록의 심상에 압도되어

사람들의 공감을 많이 얻을수록 성공적인 밈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뉴스앤조이>에 글을 기고하며 나름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한 밈들은 어쩌면 약간 실패한 셈이다. 밈의 무덤이자 유행의 종말점인 교회 문화를 향유하고 있을 대부분의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키기 쉽지 않을 것 같았는데도 굳이 '매드몬스터' 같은 밈을 쓴 것은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모험이었다. 반면에 계시록은 이미 '올 타임 클래식' 반열에 올라서 있는 밈이다. 사람들은 '창조의 완성'과 '새로운 시작'을 노래하는 계시록의 원맥락보다는, 세상의 영원한 종말과 그 과정에서 발악하는 공포스런 존재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왔고, 이러한 불안과 공포는 계시록이 작성된 이래로 2000년 동안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러한 불안은 현대에도 계속된다. 뉴 밀레니엄을 앞두고 있던 시기, 사회의 급격한 발전상을 보며 불안에 떨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계시록의 온갖 종말론적 이미지를 통해 변화하는 세상 그 자체를 괴물로 여기고 최후 승리를 얻고자 갖은 기행을 벌였다. 요즘 사역하는 내 친구들은 현재 한국교회의 메시지가 "시대가 악하다"는 매우 단순한 한마디 명제로 쪼그라들어 버렸다고 평한다. 악한 시대 타령하며 교회가 하는 일이라곤, 바빌론·괴물·적그리스도와 맞서 싸운다는 미명아래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서발턴들을 흠씬 두들겨 패는 일 정도다. 엊그제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심지어 전면전이다. 이 믿기지 않은 끔찍한 비극 앞에서, 아마 이번주 한국교회 강단은 사람들의 절망과 불안을 잡아먹는 계시록의 이미지를 쏟아 낼 것이다. 뻔하다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뻔한 클리셰다.

사실 갈등·분쟁·분열 속에서 차별과 혐오가 자행되는 모든 시공간에는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 상대화·다원화 속에서 정답과 오답이 명확하면 좋겠다는 불안,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누구라도 알려 줬으면 좋겠다는 불안. 계시록의 강렬한 심상은 이러한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에 압도된 나머지, 타인을 향해 적의와 폭력을 발산한다. 그렇게 자행된 폭력은 또 다시 누군가의 불안과 공포를 야기한다. 불안에 휩싸인 그는 또다시 공포의 심상에 공감하게 된다. 너무나도 처참한 악순환이다.

나는 늘 책 속에서 '사목 지향적인 신학' 한 줄을 뽑아 나눈다는 원칙이 있지만, 나 또한 계시록의 강렬한 심상과 엉망진창으로 얽혀 있는 현실의 실타래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당최 어떤 신학이 이 악순환 속에서 희망을 품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어쩌면 저자의 말처럼, 선은 악보다 멀고 인간의 고난은 늘 희망보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들은 계시록이 품고 있는 희망보다는 불안과 공포에 공감하게 되지 않을까.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널리 퍼져 번성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한다(34쪽). 과연 나는 불안을 먹고 사는 이 괴물 같은 계시록을 두고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말하거나 말거나 그렇게 될 것이다." (283쪽)

권우진 / 틈을 내는 사유의 실천, '짓:다' 에디터. 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대학원에서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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