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 가면, 2021년 12월부터 출근길 시위를 이어 오고 있는 장애인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예산 없이 권리 없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기획재정부에 '장애인 이동권 예산'을 확보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국어사전에 '이동권'을 검색하면 '이동할 수 있는 권리'라고 나온다. 조금 더 풀어쓰자면 '누구든지 방해물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당연해 보이는 이 단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 이면에는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거리에서 벌인 치열한 '투쟁'이 있었고, 켜켜이 쌓인 그들의 '죽음'의 역사가 있었다.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은 2001년에 일어난 '서울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건'으로 시작됐다. 설 명절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애인 노부부가 탄 수직형 리프트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이다. 이에 분노한 장애인들은 장애인이동권연대를 만드는 등 투쟁 조직을 구성했다. 2001년 당시에는 저상 버스가 없었고, 지하철에도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며, 특별 교통수단인 장애인 콜택시도 없었다. 이동권에 제약을 받아 온 지난 시간 동안 집에만 있었던 장애인들은 "우리도 이동할 권리가 있다!"고 외치며 거리에 나와 지하철을 막아서고, 시내버스를 막아섰다. '막아섰다'라는 표현보다는 본인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역사는 '성서' 이야기에 투영해 읽을 수 있다. 성서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이스라엘 지역에 계속 일어나는 전쟁과 죽음, 근본적으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스라엘이 겪은 전쟁과 죽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장애인들의 투쟁과 죽음에 투영하고, 예수의 부활을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이스라엘 백성이 치른 전쟁의 공통점은 그들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장애인들이 주체적으로 거리에 나와 투쟁하는 이유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감행하고 제국으로부터 자신의 성벽을 지켜 가며 싸운 이유도, 모두 보장돼야 마땅하지만 침해받은 '권리'를 회복하고 지키기 위해서였다.

성서에서 예수는 로마제국과 종교 지도자들의 압제에 맞서 투쟁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당대 사회적 부조리·차별·폭력을 보며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예수는, 그만의 투쟁을 이어 가다가 결국 죽었다. 나는 예수의 모습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기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고 투쟁하다 죽음을 맞은 숱한 장애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겪는 구조적 부조리·차별·폭력에 대한 저항의 결과다. 소외된 사람을 찾아가 빼앗긴 권리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함께 투쟁했던 예수의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을 이겨 내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 차원에서 바라본 '부활'은 단순한 육체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활은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며, 또한 새로운 투쟁의 판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1년 연말 장애계에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12월 31일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은 개정안에서 크게 두 가지가 달라졌다. 노선버스 운송 사업자가 시내버스·마을버스를 대폐차할 경우 반드시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저상 버스'를 도입하도록 의무화했으며, 특별 교통수단이 시·군 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번 개정안은 지난 20년간 이동권을 외쳐 온 장애인들의 '투쟁'의 성과이자, 투쟁 중에 죽음을 맞이한 장애인들의 '부활'이었다. 동시에 이제는 새로운 세상과 함께 '새로운 투쟁의 판'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새로운 투쟁의 판은 기획재정부의 '장애인 이동권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다. 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돼도 정작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을 내주지 않으면 저상 버스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특별 교통수단이 시·군 간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예산 없이는 권리도 없으니 말이다. 장애계에서는 꾸준히 이동권 투쟁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정책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투쟁하고 있다. 비록 그 속도가 느리고 시행착오가 있을지라도, 꾸준히 투쟁해 나가며 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예수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투쟁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오히려 '누구든', 특별히 '장애인'을 배제하고 있다. 단적으로 교회는 '무장애(barrier free)' 시설을 통한 장애 접근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이 교회에 가려고 해도 휠체어가 접근할 수 없는 구조가 대다수고, 접근이 가능하다고 해도 맨 앞자리 아니면 맨 뒷자리에 휠체어석을 따로 만들어 장애인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어떤 교회는 별도의 부서를 만들고 발달장애인을 한 곳에 따로 모아 예배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장애인을 돌봄을 빙자한 통제 대상으로 여기고 '시설'을 운영하면서 이를 '복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명백히 자유를 침해하고 선택권과 이동권을 빼앗는 일이다. 많은 장애인이 '탈시설'을 외치는 이유다. 불행히도 한국교회는 장애인을 향한 지극히 시혜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혜적 복지는 명백한 장애인 차별로 이어지며,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예수의 바람과도 상반되는 결과를 낳는다.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가 원했던 세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누구나 환대했던 예수, 소외된 사람을 찾아가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함께 '투쟁'하는 예수의 모습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기독교인들이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동참해 주기 바란다. 더 이상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장애인이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교회를 만들고, 장애인 차별 설교를 지양하여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가면 좋겠다.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의 투쟁과 그가 꿈꾸던 세상에 동참하는 많은 길 중 하나일 것이다.

유진우 /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해방의 길을 향해 찾아 헤매다가 '장판(장애인 운동판)'에 정착했다. 장애인 당사자로서 겪은 차별과 억압을 장판에서 마음껏 털어 내고 있다. 앞으로도 해방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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