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공동번역, 마태복음 5장 23~24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마태복음 5장 38~39절)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3~44a절)

'손상이나 피해를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문제는 인류 역사 진보와 인간 의식 고양高揚의 진퇴에 영향을 미쳐 왔다. '종교'는 그 일의 바로미터 역할을 해 왔다.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이유 없이 혹은 부당하게 맞았을 때 가만있지 않고 상대방을 가만두지도 않는다. 이때 만일 완전한 복종 상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자율성이 있거나 힘이 평형한 상태라면 보복의 범위는 커진다. 내 가족 한 사람의 손상은 상대방의 죽음이나 가족 전체의 전멸을 가져오는 것이 수많은 드라마의 고전적 흐름이다. 즉 한 대 맞았다고 한 대만 때리는 일은 드물다. 그렇기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해복수법은 보복의 과대 충동을 제어하는 중요한 지침이 된다는 점에서 손상·피해를 다루는 그나마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대적인 '법'과 '규칙'이 들어오면서, 손상·피해에 대한 보상은 직접적인 '보복·앙갚음'이라는 잔혹한 방식이 아닌 보다 부드러운 방식의 사회적 제재로 이뤄졌다. 복잡한 도시 생활의 상호 의존적 질서 때문에 변화가 불가피한 면도 있었다. 보복·앙갚음에 대한 인류의 관점이 이렇게 변화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최근 '회복적 정의 운동'은 손상·보상의 문제를 다룰 때 동해복수법의 응보적 관점을 훨씬 지나, 일어난 손상 자체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관계와 공동체를 회복·연결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손상에는 자발적인 책임 이행"을 "대응에는 진정성의 연결"을 찾는다.

이는 단순히 '보복이 아닌 보상'이라는, 인간성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의 전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의식이 비약적으로 도약해 패러다임 전환을 이뤄 낸 것이다. 손상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회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한 (물질적·신체적·정신적) 손상 이해가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를 때는, 비교적 편하게 받아들이고 성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직접적으로 '원수'나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으로 구체화할 때 큰 장벽이 생긴다. 아무리 회복적 정의 운동에 신념적으로 동조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의 요청은 자연스럽게 이행하기 쉽지 않을 뿐더러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주석가·설교자들은 "율법의 완성", "율법학자들보다 나은 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등의 마태복음 구절을 다룰 때 당혹스러워했다. 여기서 말하는 '의', '완전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다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들은 단순한 윤리적 실천의 이슈로 해석돼 왔다. 그러나 유대교 문화 속에서 일종의 유대 갱신주의 운동으로 태동한 '마태 공동체'가 기존의 다른 신앙 공동체와 구별된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된 중요한 이유는 유대교의 형식성 및 지도자들의 비윤리성에 대한 비판·갱신에 있지 않았다.

마태 공동체가 독자적인 길을 걷게 한 것은 경직된 기존 신앙 체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예수 사건을 통해 발견한 거룩함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하느님에 대한 제사적 접근 방식, 삶에 거룩한 울타리를 치는 율법의 핵심에서 거룩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일상에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이 거룩의 핵심이라는 이해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저 하늘에 있으면서도 성소라는 특정 공간에 임재하는 신께 예물을 헌납하고 그분의 규율에 복종하는 것이 곧 거룩함이라는 기존 생각은 끝이 났다. 분쟁을 그쳐 화해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등 '무제약적 사랑의 실천'이 있는 곳에 신이 계시며, '화해가 곧 성소'라는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다. 마태 공동체는 화해를 예배보다 우선해 배치함으로써, 신에 대한 경외 방식은 제사가 아니라 화해이며 그 뜻과 일치된 삶이 바로 거룩함이라는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보복·앙갚음은 공격과 방어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떠한 방식으로 정당화하더라도 신의 완전성·전일성이 드러나는 '샬롬의 왕국'을 훼손·축소한다. 방어조차도 폭력이나 힘의 행사를 전제하므로 샬롬의 왕국 터전을 허문다. '공격-폭력-죽음'의 사이클은 '보복·앙갚음은 타당하고 유용한 것'이라는 구실에서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동안 선호된 '정당한 전쟁론'(모든 전쟁은 국가 방위라는 '정당한' 명목에서 시작한다)은 결코 약속에 미치지 못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수없이 가져왔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의 주문은, 인간이 지닌 자연스러운 보복 충동을 초월적인 인내로 극복하라는 윤리적 권고가 아니다. 오히려 '보복'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원수를 미워하고 박해자를 탄압·제거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보복은 유용하고 적절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동조하는 순간 보복을 실습하는 근원적 폭력 커리큘럼의 희생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된다. 우리 인식·의식이 이러한 공격 모드에 머무르고 그것에 에너지를 쏟을 때, 신의 완전성·전일성, 샬롬의 왕국은 마음에서 가려진다. 신의 완전함이 작동되는 공간에 다른 통치 공간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원수 사랑과 박해하는 이를 위한 기도를 요청하며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신의 뜻과 나의 뜻이 일치해 내적 죄책감·분노가 없는 단계이자, 신성한 빛 안에 머물러 두려움이 없는 기쁨·평화 상태를 뜻한다. 이는 '나의 온전함을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 하는 자기 한계 설정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마태 공동체는 이러한 화해·평화의 수행이 곧 아버지이신 신에 가는 직접적인 길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몸소 실천했다. 어찌 보면, 2000년 전 마태 공동체가 이룩한 새로운 거룩 이해와 수행에 비해 지금 우리는 한창 퇴보한 듯 보인다. 이제 시작한 회복적 정의 운동이 그러한 퇴보로부터 어느 정도 선회하는 길을 걷고 있지만, 과연 비폭력 대화 실천가나 회복적 정의 실천가들이 마태 공동체의 비전에 대해 얼마만큼 공통된 비전을 지니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되물어 볼 때다.

화해, 원수 사랑, 박해자를 위한 기도는 내게도 오랫동안 추상적인 개념에 머물러 있던 주제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서로 진정성을 나누고 미래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회복적 서클'을 여러 해 진행하면서, 이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살롬의 왕국'에 들어가는 인식·능력을 근본적으로 수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됐다. 화해, 원수 사랑, 박해자를 위한 기도는 단순히 타자에 대한 용서나 자기희생이 아니라, 내가 타자에게 투사·전이轉移한 것을 용해하는 '에고의 정화', 즉 나에게 행하는 '거울 작업(mirroring works)'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복·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니라, 타자에게 투사·전이한 내 안의 공격성과 그 원인인 수치심을 닦아 내는 과정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자기를 회복하고 내면의 존엄과 신성을 되찾아 가는 길이다.

박성용 /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기독교갈등전환&화해센터 대표, 평화서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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