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Restorative Justice'는 '회복적 정의' 혹은 '회복적 사법'으로 번역된다. 가해 상황과 처벌 수위에 집중하는 응보적 사법과 달리, 회복적 사법은 피해 상황과 회복에 집중한다. 회복적 사법과 응보적 사법은 우열 관계가 아니다. 다만, 응보적 사법만을 추구할 경우 사건 해결 과정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간 각 나라의 사법 체계가 응보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경향이 강하다 보니,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도 늘어났다.

응보적 사법의 한계를 인지하고 회복적 사법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일고 있다. 유엔(UN)은 2002년 채택한 '형사사건에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 적용에 관한 기본 원칙' 제6조에서 "회복적 사법은 형사 절차의 모든 단계에서 일반적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정했다.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도 2018년 채택한 '형사사건에 대한 회복적 사법에 관한 권고' 제6조에서 "회복적 사법은 형사 절차의 어느 단계에서든 활용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한국은 회복적 정의 운동이 활발한 유럽과 북미 나라들보다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기존 응보적 사법 체계의 한계를 절감하고 회복적 사법의 중요성을 인지한 경찰·검사·판사·교도관들의 노력으로 각 영역에서 여러 사례를 만들어 왔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경찰은 2019년부터 '회복적 경찰 활동'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법원 영역에서도 회복적 사법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공유하려 애쓰는 판사가 있다. 임수희 부장판사(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는 2013년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에 있을 때 진행된 '형사재판 회복적 사법 시범 실시 사업'에 자원해 사건 10개에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을 적용했다. 부천지원의 시범 사업은 전에도 없었고 지금까지도 없는 형사재판에 공식적인 회복적 사법 첫 시도였다. 법원이 회복적 정의 전문가 단체와 협력해 형사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사건에 관해 피해자-가해자 대화 모임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임수희 판사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회복적 사법의 가치를 보다 대중적으로 공유할 필요성을 느껴 2017년부터 <법률저널>에 칼럼을 썼고, 이를 모아 2019년 <처벌 뒤에 남는 것들 – 임수희 판사와 함께하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오월의봄)를 펴냈다. 책에는 도저히 합의에 이를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던 사람들이 회복적 사법 프로세스를 통해 이해와 사과, 구체적인 피해 회복 노력 등을 약속하게 된 모습들이 담겨 있다.

시범 사업 결과는 긍정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2013년 이후 회복적 사법을 재판에 제도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법원 차원의 노력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임 판사는 회복적 접근이 필요한 개개의 사건에서 회복적 사법을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개별 사건에 회복적 사법을 적용하는 것은 몇 배나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그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부채감을 느껴"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현직 판사가 언론에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는 이유도 회복적 사법의 가치를 확산하고자 하는 목적 하나다.

임수희 판사를 6월 7일 안산지원에서 만나 회복적 사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회복적 정의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속성과 닮았고 회복적 정의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도 개신교인이 많지만, 교회에서 회복적 정의를 실천하기 힘든 현실도 짚어 봤다. 임 판사는 회복적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당위를 기독교 정신에서 찾으며, 교회는 응보적 사법과 회복적 사법을 넘어서는 좀 더 고차원적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수희 판사. 뉴스앤조이 구권효
임수희 판사. 뉴스앤조이 구권효

- 회복적 사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재판을 하면서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특히 가사 사건이 그랬다. 이혼 소송은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 증거를 근거로 판단한다. 판사가 '이혼 사유가 없다', 즉 '이혼할 정도의 파탄이 아니'라거나 '귀책 사유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하더라도 부부간의 사이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과거 일이 어땠는지 판단하는 데 시간을 쏟는 동안에도 그들의 아이들은 자란다. 재판은 과거의 사실관계만 판단하는 것이지, 이들의 미래 관계를 형성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이게 무슨 의미지?'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던 중 2011년경 회복적 사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2013년 부천지원 시범 사업을 통해 형사재판 10개 사건에 직접 회복적 사법을 시도해 봤다. 경험해 보니 어떻던가.

시범 사업 후 설문 조사 등으로 참여자들의 만족도를 조사했는데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회복적 사법 프로세스는 피고인과 피해자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피고인 측은 양형상의 이익과 자발적 책임의 주체가 됐다는 만족감을 얻었다. 피해자 측은 금전적 이익과 피고인의 이해·사과 등을 통한 정서적·관계적 이익을 통해 높은 수준의 피해 회복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이는 곧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까지 이어졌다. 계량하기 어려운 다양한 측면에서 이익이 있었다.

나는 회복적 사법 프로세스를 '수술'에 비교하곤 한다. 수술 자체는 칼로 째고 상하게 하는 것이지만 그 후에는 더 건강해진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들이 전문가인 것처럼 회복적 사법도 전문성이 전제돼 있어야 한다. 의사가 어떤 병에 대해서는 수술을 권하는 것처럼 어떤 사건은 회복적 사법이 필요하고, 이 일은 숙련된 대화 모임 전문가의 지원 또는 개입하에 이뤄져야 한다. 회복적 정의는 진실한 이야기를 통해 상호 이해에 이르는 일이다. 하나 주고 하나 받는 식의 '전략적 대화'로 단순히 '합의'하는 게 아니다.

<처벌 뒤에 남는 것들> / 임수희 지음 / 오월의봄 펴냄 / 280쪽 / 1만 5000원
<처벌 뒤에 남는 것들> / 임수희 지음 / 오월의봄 펴냄 / 280쪽 / 1만 5000원

- 교회나 교인들 사이에도 법적 다툼이 많다. 회복적 사법을 다루는 법률가 입장에서, 교회나 교인들이 연루된 형사사건들을 어떻게 보는가.

인터뷰에 앞서 판결문 검색 시스템에서 찾아보니 교회나 목사, 교인들이 관여된 사건이 꽤 많더라. 익히 알려진 대로 성범죄나 횡령·배임 같은 사건뿐 아니라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이 다 있었다. 역시 사람 있는 곳에 범죄가 있고, 기독교인이라고 딱히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예수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 교회는 표면적으로 고린도전서 6장 말씀을 근거로 소위 '세상 법'에 송사하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교회 밖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교인이라고 해서 '세상 법'에 호소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세상의 법 역시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고 본다. 사회는 어찌 됐든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재판 제도라는 그릇이 그 발전을 담아 개선되어 왔다. 법은 계속해서 정교하게 발전해 왔고, 현대사회에서 재판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진행한다. 교인 간이라도 세상 속에서 민형사상 문제가 발생했다면 사회의 법 절차를 활용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만일 그러한 법과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그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주기도문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지 않나. 하늘과 땅,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소송을 권하는 건 아니다. 교회나 교인들은 사법적 결과 이상의 문제 해결과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 노력이 세상 법 절차를 회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 회복적 정의는 기독교 정신과도 연관이 깊은데, 정작 교회에서는 이런 논의가 전무한 것 같다.

'전무'하다고 볼 수는 없다. 교회 영역에서 회복적 정의의 적용을 위해 노력하는 기독교인들이나 단체가 있다고 들었다. 회복적 사법 프로세스의 툴(tool) 중 하나인 '회복적 서클'의 경우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들이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계열 단체다.

회복적 정의는 모든 영역에 필요한 것 같다. 학교에서 회복적 생활교육을 하는 것처럼 교회에도 회복적 정의가 필요하다. 교회라서 특별히 더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교회는 좀 더 잘할 수 있고 좀 더 잘해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회복적 정의의 뿌리는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회복적 정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워드 제어(Howard Zehr, 1944~) 교수도 메노나이트다. 그는 저서 <우리 시대의 회복적 정의 Changing Lenses>(대장간)에서 회복적 정의의 뿌리를 성서에서도 찾는다. 제어 교수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이 응보적이 아니라 회복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전략) 구약에서는 응보도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지만 하나님의 형벌은 샬롬의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형벌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처럼 정의를 이루는 사법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에 목적을 두고 있고, 억압자의 힘을 타파하는 데, 즉 억압받는 자를 '옹호'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샬롬의 맥락은 응보적 잠재성을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형벌은 보통 사랑과 공동체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형벌은 언약의 재확인을 수반했는데, 이것은 형벌이 공정하고 마땅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형벌은 영속적인 소외가 아니라 궁극적 화해와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었으므로, 회복적인 것이지 파괴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리 시대의 회복적 정의> 175쪽)

어찌 보면 헌법적 가치들 – 인권이나 자유·평등·정의 등은 모두 성경적인 것이라 생각이 든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존귀하다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나면서부터 존귀하다. 하나님이 정의를 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정의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무질서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어떻게 인권과 평등과 정의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겠나. 회복적 정의 역시 성경적 세계관이 아닌 곳에서 그 뿌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물론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도 회복적 정의가 필요하다는 연구들이 있지만, '왜 그것을 해야 하느냐'는 당위성을 고민할 때 성경을 빼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더 잘할 수 있고, 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임수희 판사는 회복적 사법은 성경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했다. 
임수희 판사는 회복적 사법은 성경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했다. 

- 교회나 교단에도 징계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응보적 사법 패러다임이다. 이마저도 규정이 오래됐고 허술하다. 그러다 보니 힘 있는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이현령비현령 꼴이 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회복적 사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느낌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교회나 교단의 규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에 대해 코멘트할 자격도 없다. 사회나 국가의 사법 시스템에 관해 말해 본다면, 응보적 사법이 잘 작동되지 않는다고 해서 응보적 사법 먼저 잘해 놓은 다음 회복적 사법을 하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응보적 사법, 회복적 사법 둘 다 잘해야 한다. 법률가 입장에서 봤을 때, 회복적 사법에 의해 응보적 사법이 완성되는 면이 있고, 응보적 사법이 단단한 기반이 돼 줘야 회복적 사법도 잘 실시할 수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교단 등의 징계 규정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그 부분은 잘 모른다.

교회 내에서의 분쟁 해결에 있어서는,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를 둘 다 잘한다는 정도를 넘어서 좀 더 고차원적이고 통합적인 레벨의 고려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교회 내 분쟁 해결을 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고려하에서 첫째, 응보적 접근에 있어서도 '정죄하지 말라'는 성경적 요구를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기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관점이어야 한다.

둘째,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도 '교회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교회(공동체)로 모으셨는가', '우리는 어떻게 교회 활동을 해야 하는가' 등 교회의 존재 근거와 목적을 고려해 분쟁이 성경적 가치하에서 해결돼야 한다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 회복적 정의 프로세스에 의해 회복될 공동체 모습은 공동체(가족·기업·학교 등)마다 다르다. 교회 공동체는 머리가 그리스도요, 각자는 기능적 지체로 상호 수용 및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직분 구조도 권위나 권력 관계로 설명되기보다 위로 올라갈수록 더 섬기는 자리라는 특징이 성경적 지표로 주어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 내 분쟁에 회복적 프로세스의 적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여러 갈등 해결 과정을 함께 경험하면서 같이 배워 가고 성장했으면 좋겠다. 단순히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을 교회에 도입하는 차원을 넘어서, 성경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 교회나 교단에서 회복적 사법을 시도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교회 정관이나 교회 헌법에 회복적 사법의 가능성을 명시하면 될까.

그러면 좋기는 하겠지만, 회복적 사법이라는 게 규정만 만든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다. 가끔 경찰이나 교도관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 매뉴얼 만들고 담당자 정해서 시행하는, 그렇게 관료적인 접근으로 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라고. 차라리 회복적 정의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 회복적 사법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실천을 독려하는 게 낫다. 그 실천을 독려하고 함께하기 위한 가치 함양, 공동체적으로 그 가치를 교육·공유하는 것을 권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향력 있는 사람 몇몇이 위에서 결정하고 앞으로 이렇게 하라고 내려보낸다고 해서 회복적 사법이 잘 시행되지는 않을 것 같다. 애초에 회복적 사법의 성격 자체가 대량으로 결과물을 뽑아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사건 한 사건 정성을 다해 잘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수술을 예로 들었듯이, 회복적 사법 프로세스는 전문성이 전제돼야 한다. 회복적 정의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중 기독교인이 많다. 그분들이 교회 내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이 있다면 교회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