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내 교단은 크게 가톨릭, 로마정교회, 개신교 그리고 역사적 평화 교회 등으로 나누고, 그 안의 소종파를 포함하면 그 갈래와 숫자는 다양하고 많다. 그럼에도 신앙의 핵심 중 하나가 인간 삶의 목적으로서 '신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대부분 제도권 개신교회가 공통적으로 세례받는 이에게 묻는 여러 핵심 질문 중 하나가 이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신의 영광을 위함'이 여러 교리적 해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제사적(그리고 보수적) 전통은 인간의 자기-희생과 물질적인 소유의 금욕적 태도를 지니며, 이와 반대로 예언적(그리고 진보적) 전통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이상적 태도에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한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들어가기 전, '신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기본적인 동의에 기초해 좀 더 사색할 수 있는 이슈는 '신의 주권성'이다.

신의 영광을 위한 삶에서 초점이 되는 신의 주권성의 이해와 그 헌신은 여러 시대적 흐름을 타고 왔다. 복음서의 부름을 받은 사도성의 분별, 재림 예수에 대한 기대와 지연, 초대교회의 형성을 통한 신앙 공동체 형성과 디아스포라 교회의 건설과 확장, 그리고 이를 위한 선교, 더 나아가 교회의 확장으로서 이방 땅에 교회를 세워 신의 영광을 찬미하게 만드는 무신앙인과 타 신앙인의 개종 등은 기독교(Christianity)가 기독교 제국(Christendom)으로 가는 이데올로기적 신앙관을 주류화하는 흐름을 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자동차와 통신 수단, 그리고 비행기를 통한 세계 여행이 빈번해지면서, 지구 촌락화와 세계화라는 물결 속에서 1960년대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한다. 이른바 '신의 선교(Missio Dei)'라는 익명의 기독교인에 대한 개념과 신앙의 자유와 관용 정신이 생긴 것이다. 신의 주권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정복과 개종을 강조했던 선교 정책에 공공선과 사회복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연대와 협력 정신이 들어오게 되었다. 신의 영광은 직접적인 신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신앙적 타자와 손을 잡음으로 더욱 빛이 난다는 의미다. 이는 마치 프톨레미 우주관(모든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에서 코페르니쿠스 우주관(지구와 모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으로의 변화와 맞먹는 인식 변화다.

이러한 인식은 조직신학의 흐름에 있어 종교다원주의의 세상에 눈뜨게 만들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휩쓴 현대신학의 새 조류에, 예를 들어 한스 큉(가톨릭의 세계 윤리 재형성), 존 캅(과정철학의 실재 이해에 따른 신학의 재형성), 존 힉과 폴 니터(성육신과 기독론의 배타성 재해석), 파니카(에큐메니칼의 대화신학 형성) 등등 많은 신학자가 몰두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종교학적 접근), 야기 세이치(불교적 신학), 송천성(아시아 신학) 등등 종교학과 신학의 만남으로 신앙적 타자를 이해하고 연결하려는 노력들도 있었다. 이처럼 1980년대는 조직신학의 화려한 부흥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의 선교라는 새로운 이해가 촉발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이러한 현상들은, 신은 선교사의 등에 업혀서 이방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방 땅에서도 신의 이름이 다양하게 불려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미 그들의 역사와 세상, 그 시작부터 함께하시는 초월자이신 신에 대한 선이해가 있다는 믿음이 불러온 신학적 담론의 흐름들이다.

1980년대 내가 신학생 시절 한때 몰두했던 이러한 흐름을 다시 요약하자면, '신의 주권성(Lordship of God 혹은 God's Initiative-ness)'은 기독교의 정원과 다른 종교의 정원들 사이에, 서로 다른 꽃이지만 서로 꽃향기를 맡고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리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각자 정원에 문을 개방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두가 신의 정원이라고 이야기하자는 시도는 매우 중요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지치고 고단한 인생살이에 있어서 꽃은 위로와 쉼이 되고 생생한 감흥을 불러오며, 그동안 봐 왔던 몇 개의 고정된 꽃을 넘어 다른 꽃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생생하고 지속적인 감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신의 주권성 추구가 조금씩 서서히 같은 시기를 공유하며 흘러왔다. 이는 아쉽게도 아카데미아 영역에서는 관찰되지 않고 실천가와 활동가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꽃의 향기가 아니라, 손상과 파괴, 갈등과 폭력, 그리고 전쟁에 대한 기독교 신앙인들의 성찰 – 주로 역사적 평화 교회들(퀘이커·메노나이트·형제교단)로부터 시작함 - 이 그것이다. 손상된 인간성과 관계의 분열로 오는 상처와 파괴 그리고 범죄에 대해 신의 진정성과 자비로움을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이는 국가 폭력에 대한 평화 훈련, 손상과 범죄에 대한 회복적 정의, 생태적 약자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지속 가능성(지구 정의 운동)에 대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평화신학과 생태신학은 이들의 움직임에 대한 학문적 접근으로서 나중에 태동된다).

신의 주권성 이슈는 타 신앙인과의 연결 지점 속에서 찾는 것과 더불어 더욱 실질적인 영역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나 신을 믿기에, 문제의 핵심은 '신의 무력성'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갈등·폭력·범죄 영역에는 신의 주권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옳고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 '좋고 혐오함'의 분리 방식이라는 악령의 지배가 공격과 방어, 비난과 분노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 훈련가로서 내가 명심하고 있는 것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격언이다. 악마는 신의 정원인 교회·수도원·명상원 등에서 신에 대한 찬미와 그 존재·영광에 몰입하는 것에 대단한 포용적 관용과 인내심을 갖고 있다. 거대 담론에서는 그러한 신의 영역과 그분의 주권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 담론의 손상·파괴·갈등·폭력 상황이라는 디테일의 세미한 영역에서, 즉 어둠의 영역에서는 기독교인 대부분이 신앙의 연륜이 어떠하든지 '법과 원칙', '응보와 정당한 몫'이라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은 교회에서는 통치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인 대부분이 학교, 법원, 이웃 관계에서는 진실과 자비가 아니라 논리와 정당성 그리고 권력과 힘의 행사라는 악마의 지배를 허용하고, 신의 통치력을 작동시키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혹은 정상적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분리된 영역 구분과 신의 주권성의 협소화는 신의 존재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신의 무력성에 대한 절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신앙과 일상이라는 통전적 일관성보다 두 세계를 무의식적으로 섬기는 정신 분열적인 생활인이 되어 간다. 영혼은 신에게, 그러나 육신에 고통과 벌을 주는 악마에게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을 찬양하지 않는 이방 땅에서 그분의 주권성을 세우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의 정원들의 연결만큼이나 심각하고도 중요한 부름은,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손상·갈등·파괴라는 불모지에서 어떻게 그분의 참되심과 자비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도전이다. 이것이 우선적인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곳이야말로 지구상에서 최후로 남은 이방 땅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의 주권성(통치력)을 손상·갈등·파괴라는 이방 땅에 가져오는 신의 선교에 대한 확장적 이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이해는 '성육신(God Incarnate)'이다. 우리는 신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곧 그분의 비유로 말씀하심과 그분의 행동에 구현되어 나타났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성육신 이해에 따른다. 문제는 2000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성육신을 고정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미숙아의 단계를 넘어 성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의 영원과 늘 함께하심이라는 그분의 주권성·통치권에 대한 미숙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나사렛 예수에게서 충분히 드러난 신의 현존은, 인간의 보편적 가능성으로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신의 진리와 자비의 원형(archetype)을 본다. 이를 참조(reference)로 하여 내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하느님의 형상, 내면의 신성한 그 무엇)이 일으켜져 스승과 제자 간 '존재와 존재의 전달'(키에르케고르의 용어)이 일어나는 것이다.

보편적 성육신이란, 예수 안에서 본 그 잠재적 가능성을 자기 내면 의식과 삶에 체화해 생활로 구체화하는 것을 말한다. 본성(헬, 우시아)의 유사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은총의 충만함(요1:14)을 보고 경험하며 이것을 삶에서 실현하는 증언자(witness)의 삶으로 성육신하는 것을 말한다.

평화 제자직은 스승을 모범으로 따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내면화·일상화하며 사회 속에 제도화하는 성육신 실천으로의 부름과 연결된다. 신의 주권성·통치권을 사회의 어둠 속에서 실현하고, 자신의 생으로 신의 진리와 자비를 구현하는 성육신을 이뤄 가는 것이 평화 영성의 중요한 핵심이기도 하다. 신의 주권성에 대한 철저한 그리고 예외 없는 영역으로의 전면적인 확장과 그분의 진리와 자비를 내면화하고 일상화하며 사회화하는 보편적 성육신의 새로운 이해야말로, 문제는 신의 부재가 아니라 제자들의 잘못으로 인한 신의 무력성과 신앙의 비효용성임을, 즉 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인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자각하게 해 줄 것이다.

박성용 /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기독교갈등전환&화해센터 대표, 평화서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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