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략)" (창세기 22장 11~12절)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의 이야기 중 한 대목입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그가 100살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신의 음성을 따라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신께서 지정하신 산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마침내 신께서 지정하신 산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한 후 칼을 들어 그의 숨통을 끊으려 할 때, 하늘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삭을 죽이지 말라는 음성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에 정신을 차려 보니 수풀에 걸린 양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그 양을 잡아 제물로 바쳤고 이삭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해석이 공존합니다. 신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제 아들조차 제물로 바칠 준비가 돼 있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는 해석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신의 음성을 오해한 아브라함의 종교적 '광기'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 풍습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 아들마저 제물로 바치는 것은 신에 대한 가장 고귀한 신앙적 행위로서 인정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인간을 죽여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삶의 안전과 풍요였습니다. 제 삶의 안전과 풍요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불안·폭력·위험·빈곤, 더 나아가 '죽음'까지 전가할 수 있다는 생각의 극단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과 종교적 광기는 한 끗 차이입니다. 이 둘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은 '남의 희생까지도 짊어지는가', '남에게 희생을 전가하는가'에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삶의 안전과 풍요를 확보해 보려는 강박과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힌 한 아비가 빚어낸 참혹한 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늘에서 들려온 신의 음성,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이 참극을 막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계몽되지 못한 고대인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오늘날 문명사회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일까요?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경제적 풍요를 확보할 수 있다면 사람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현대인들의 경제적 믿음이 고대인들의 종교적 광기와는 다른,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청년 노동자의 죽음이 끓이지 않고 있습니다. 당진의 어느 철강공장 쇳물에 사그라진 노동자, 서울 어느 지하철역 안전문에 갇혀 마주 달려오는 전동차에 부서져 버린 노동자, 태안 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으깨진 노동자, 평택항 컨테이너에 짓눌려 버린 노동자 모두 이삭과 같은 '청년' 노동자였습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전하는 뉴스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 서울시 구로구 한 아파트 외벽을 청소하던 청년이 20m 높이에서 추락했습니다. 바로 다음 날 서울의 한 지하철역 환풍구에서 일하던 청년은 9m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청년 노동자의 죽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죽음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죽음이 구조적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우리 모두의 안전과 풍요를 위해 그들에게 위험과 죽음을 전가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 삶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생명마저 제물로 삼을 수 있다고 믿었던 고대인의 종교적 광기와, 청년 노동자에게 전가되는 '위험·죽음의 외주화'라는 사악한 구조에 눈감고 오로지 경제적 이득만을 좇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 사이에는 과연 어떤 질적 차이가 있을까요?

삶의 안전과 풍요를 보장받기 위한 제물로 지목된 이삭을 아브라함의 칼로부터 구해 낸 것이 하늘의 음성이었다면, 오늘날 경제적 풍요를 위한 제물로 끊임없이 위험과 죽음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청년 노동자들을 위해서도 하늘의 음성이 들려와야 합니다. '경제보다 사람을 살려라!' '위험과 죽음을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하지 말라!' '더 이상 청년을 죽이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청년의 목숨을 제물 삼는 우리 시대의 참극을 멈출 수 있습니다. 시대의 참극을 멈추는 하늘의 음성은 어떻게 들려올까요?

끊이지 않는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을 멈출 법적·제도적 대안을 마련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경제 만능주의의 제물로 바쳐진 죽음이라는 것, 곧 제 삶의 안전과 풍요를 위해 타인을 제물로 삼았던 고대 인신 제사의 종교적 광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인식을 지닐 때에 비로소 우리는 "청년 노동자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다급히 외치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이 사회에 반복되고 있는 비극적인 죽음을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김희룡 / 성문밖교회 목사,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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