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이OO은 피해자가 생리 중이라는 이유로 성관계 요구를 거부하자 '자위행위만 하겠다'고 속여 피해자의 몸에 올라탄 후 피해자를 '강간'했다."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한국성폭력상담소가 3월 8일 여성의 날에 발표한 게임 '이상한 나라의 강간죄 - 당신의 선택과 판결은?'에 등장하는 사례 중 하나다. 실제 국내 판례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판사가 돼 각 사례별로 위력·폭행·협박, 범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고 유무죄를 판결한다. 위 사례는 명백한 '강간' 사건처럼 보이지만, 플레이어의 판단과 별개로 대한민국 사법부가 사건 가해자에게 내린 판결은 '무죄'. 플레이어로서는 어처구니없을 만한 상황이다. 게임은 이내 "이상한 나라의 법은 동의가 없었어도 폭행·협박이 없었다면 강간이 아니래요"라는 문구를 띄워 강간에 대한 일반적인 감수성과 현행법 사이의 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한국 현행법상 '강간'은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범죄다. 성범죄를 규정하는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는 1953년 '정조에 관한 죄'라는 이름으로 제정돼 한 차례 이름 변경을 제외하고는 지난 68년간 내용 변경 없이 그대로 유지돼 온 낡은 법이다. 성범죄 관련 현행법은 강간·유사강간·강제추행 등 대부분 조항에 폭력·협박을 구성요건으로 두고 있어 시대착오적이며 법 적용 범위도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현실에서 성범죄는 폭행·협박 없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2019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상담 사례 1030건을 분석한 결과, 전체 강간 사례 중 71.4%가 '폭행·협박 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법이 이렇다 보니, 성범죄(폭행·협박) 여부를 입증해야 할 책임이 오롯이 피해자에게 지워지고, 피해자가 이를 증명하지 못할 경우 재판까지 가기도 전에 불기소되거나 오히려 가해자에게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하는 상황도 빈번하다. 가해자 처벌 가능성 자체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위축된 피해자들이 결국 음지로 숨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소장은 "실제 상담을 해 보면 (경찰이나 사법기관에서) 피해자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신고를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현행법상 강간죄는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있어야만 성립한다. 피해자가 직접 해당 사실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강간죄 사건 불기소율은 절반에 달한다. 사진 제공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여성 단체 200여 곳이 참여하는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가 21대 국회 강간죄 개정 발의 1주년을 맞아 강간죄 개정의 필요성 및 향후 과제에 대해 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8월 24일 온라인으로 열린 '강간죄, 우리가 바꾸자! 지금 여기에서!' 토크 콘서트에는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소장,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 서혜진 변호사(더라이트하우스법률사무소), 정의당 류호정 의원, 활동가 D가 참석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변호해 온 서혜진 변호사는 "2018~2019년 대검찰청 통계 자료에 따르면, 강간죄 사건의 불기소 비율은 47.85%다. 강간 피해를 입어 형사 고소를 하더라도 폭행·협박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면 현행법상 강간죄로 처벌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피해자에게 증명을 요구하는 식으로 이뤄지는 수사와 재판은, 수많은 2차 피해의 원인이다. 또한 피해자가 자기 의지에 따라 재판받을 수 있는 자유조차 막는다"고 지적했다.

강간죄 성립 요건을 '동의' 여부로 확대하라는 법 개정 요구는 계속돼 왔지만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대 국회에서는 미투(me too) 국면을 맞아 비동의 강간 처벌 관련 법안이 10개나 발의됐으나 회기 만료로 모두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는 류호정 의원이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하는 형법 제32장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성 혐오적 표현인 '강간'을 '성적 침해'로 바꿔 명명한 이 개정안에 따르면 △상대방의 동의가 없을 때 △폭행·협박·위계·위력을 사용했을 때 △심신상실 또는 항거 불능의 상태를 이용했을 때 처벌하도록 한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은 2020년 8월 자신의 '1호 법안'으로 비동의 강간죄를 포함한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현재 1년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유튜브 채널 갈무리
정의당 류호정 의원은 2020년 8월 자신의 '1호 법안'으로 비동의 강간죄를 포함한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현재 1년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유튜브 채널 갈무리

류호정 의원은 국회의원들에게 친전을 발송하고 국회 내에 대자보를 부착하는 등 강간죄 개정을 위해 활동해 왔지만 의원들 대부분이 응답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류 의원은 "다들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한다. '백래시(backlash)'를 부담스러워 하기도 한다. 쟁점도 많고 형법 자체도 쉬운 내용이 아니다 보니 '당장 우리 당 보좌관부터 반대한다'는 반응이 많다"고 했다. 그는 "강간죄 개정에 대한 긍정적 여론이 정치인들을 바꿀 수 있다"며 더 많은 공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트위터에서 '마녀'라는 계정으로 활동하며 성범죄 재판 방청 기록을 작성해 온 활동가 D는 강간죄가 개정되면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피해자다움'과 2차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D는 "동의 여부에 따라 강간죄를 판단하게 된다면 피해자가 불필요한 피해 상황을 증언하지 않게 돼 수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가해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동의 여부'로 강간죄 성립 여부를 결정하게 되면, 무고가 늘어날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성관계를 할 때마다 일일이 동의를 구하고 증거를 남겨야 하느냐는 식이다. 이에 대해 D는 "억측이거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성범죄 무고를 저지른 사람의 기소율·유죄율은 1%밖에 되지 않는다. 동의를 기준으로 할 때 무고가 늘어나기보다 오히려 사각지대에 묻혀 있던 성폭력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날 행사는 패널들이 각자 '강간죄 개정은 OO다!"라는 문장을 만드는 퍼포먼스로 마무리됐다. 김 소장은 "강간죄 개정은 성평등한 변화다!", 서 변호사는 "강간죄 개정은 지금이다!", 류 의원은 "강간죄 개정은 우리가 해낸다!", D는 "강간죄 개정은 변화의 시작이다!"라고 외치며 강간죄 개정을 향한 의지를 드러냈다.

토크 콘서트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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