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나님,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시는 분!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 가운데 하나님나라가 임하였으니,
당신의 뜻에 우리의 삶이 기억되고
우리의 삶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오늘날 당신의 은총이 깃든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빼앗기지 않게 지켜 주시고,
각자에게 필요한 양식을 욕심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기 위해
죄지은 자가 자신의 잘못을 바로 알아
진실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 원합니다.
힘 있는 자의 넘어짐을 작은 자의 탓으로 돌리지 않게 하시고,
여성을 시험에 들게 하는 존재, 유혹하는 존재라고 여기는
뿌리 깊은 혐오와 차별 속에서 우리를 속히 구하여 주십시오.
차별 없는 나라와 주변으로부터의 권세, 평화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흔히 외우던 주기도문과 다른 '주기-도문'이 5월 25일 서울 명동 향린교회 예배당에 울려 퍼졌다. 여성의 시선과 경험을 반영해 재해석한 '주기-도문'은 △이 기도문을 여성들에게 '주기'를 바라는 마음 △빼앗긴 것을 되찾아 돌려'주기'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는 영역에서 여성들에게 권한 '주기'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며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기'와 같은 여성주의적 역동·실천의 의미를 담아 작성됐다.

'강남역 여성 혐오 범죄 5주기 여성주의 연합 예배'는 교계 여성 단체 18곳이 마음을 모아 준비했다. 2016년 5월 17일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빼앗긴 여성 청년을 기억하고, 삶의 현장 곳곳에서 폭력과 차별을 경험해야 했던 여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예배였다.

'강남역 여성 혐오 범죄 5주기 여성주의 연합 예배'가 5월 25일 명동 향린교회 예배당에서 열렸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강남역 여성 혐오 범죄 5주기 여성주의 연합 예배'가 5월 25일 명동 향린교회 예배당에서 열렸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이날 예배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주제로 열렸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고려해 현장에는 예배 순서를 담당한 이들을 포함한 최소 인원 30명만 참석했다. 온라인 생중계로도 약 70명이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태초부터 여성에게도 주어졌으나 여성 혐오·차별·배제·폭력으로 빼앗긴 '양식'을 되찾고, 양식을 빼앗는 악이 허물어진 자리에 평등·기쁨·회복·치유가 임하기를 기원했다. 이들은 △코로나 시대 위기에 처한 여성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일터에서 차별받는 여성을 위해 △착취당하는 생명·생태계를 위해 △디지털 성폭력의 정의로운 해결과 회복을 위해 함께 기도했다.

대한성공회 강하니(루시아) 사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이 예수의 세상을 확장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대한성공회 강하니(루시아) 사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이 예수의 세상을 확장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대한성공회 강하니(루시아) 사제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은 마가복음 7장 24~30절로, 귀신 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에게 찾아와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며 은혜를 구하는 장면이다.

강하니 사제는 5년 전 강남역 사건 이후 폭력의 피해자였거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낸 것처럼, 본문에 나온 여인도 자신을 억압하는 권위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실어 목소리를 냈다고 했다. 강 사제는 "여인, 게다가 이방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예수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아픈 딸을 고치지 못할 이유가 될 수도 없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 구원의 역사는 자녀들에게나 식탁 아래 강아지들에게나 똑같이 내려지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가복음에 나온 여인의 믿음이 다른 사람의 믿음과 다른 점은, 기적이 나에게만 임하고 멈춘 게 아니라는 데 있다고 했다. 강하니 사제는 "자녀들에게 먹일 빵을 나누지 않겠다던 식탁 위의 예수님이 경계를 넘어 식탁 아내로 내려오게 됐다. 여인은 예수님의 세상을 확장한다. 섬기고 돌보고 함께 살아가야 할 이들이 식탁 아래에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는 함께 나누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모든 생명체가 창조주 하느님의 한 자녀임을 기억하며 빼앗겼던 양식, 우리의 일상을 회복할 것입니다. 우리의 양식은 증오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보복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일상화된 폭력에 맞서는 지난한 투쟁 가운데 지치지 않고 연대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 양식과 그 기도로 힘을 얻기 바랍니다.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기독여민회 연구실장 정혜진 목사(사진 위 왼쪽)와 여민교회 민아름 목사(사진 위 가운데)가 성찬을 집례했다. 예배에는 전문 수어 통역사가 함께했다. 일회용 성찬 용기를 나누는 모습(사진 아래). 뉴스앤조이 이은혜
기독여민회 연구실장 정혜진 목사(사진 위 왼쪽)와 여민교회 민아름 목사(사진 위 가운데)가 성찬을 집례했다. 예배에는 전문 수어 통역사가 함께했다. 일회용 성찬 용기를 나누는 모습(사진 아래). 뉴스앤조이 이은혜

예배 후 '우리들의 이야기 나눔'이라는 순서가 이어졌다. 믿는페미의 새말, 한국YWCA연합회의 이한빛 간사가 사회를 맡았다. 사전에 온라인을 통해 '잃어버린 혹은 빼앗긴 양식'에 관한 사연을 받았고, 그 사연을 소개한 후 주최 측에서 위로와 공감의 말을 전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사연은 다양했다. △여성 혐오적 발언을 일삼는 교회를 견디다 못해 떠난 후 새로운 공동체를 찾은 경우 △마음이 건강하지 못해 심리 상담을 신청한 경우 △여성 사역자라는 이유로 목회 현장에서 차별을 경험한 경우 등 여성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은 다양한 차별·배제 경험이 공유됐다.

진행자들은 이들의 사연에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발간한 <여성 시편> 중 한 편을 읽어 주기도 하고,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이 펴낸 <언니들의 뜰 밖 기도>에 나오는 기도문으로 위로하기도 했다. 현장·온라인 전체 참석자 100여 명 역시 이들의 사연 하나하나에 공감했다. 이들은 여성으로서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앞으로 겪을 수 있는 일에 댓글을 남기며 호응했다.

예배를 마친 후 믿는페미 새말(왼쪽 두 번째)과 한국YWCA연합회 이한빛 간사가 참가자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응답하는 순서를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예배를 마친 후 믿는페미 새말(왼쪽 두 번째)과 한국YWCA연합회 이한빛 간사가 참가자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응답하는 순서를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이날 예배는 참석자들에게 큰 위로를 줬다. "매주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싶었다", "준비된 모든 순서들에 정성과 은혜가 가득하다", "좋은 예배에 함께할 수 있어 감사했다", "평소 나만 유별나게 여성주의자였던 것 같았는데 여기 오니까 정말 좋다"는 등 다양한 반응이 이어졌다.

믿는페미 새말은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분들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자리여서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비록 한 줌도 안 되는 여성주의자 기독교인들이지만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빼앗긴 양식을 채우실 것이라는 힘을 얻게 되었다. 내년에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