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슬픔, 당신의 것이겠죠?"
"비웃음의 혐오는 고난의 사랑을 이길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살게 하소서. 망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살아 있는 우리에게 위로하고 눈물 흘리고 분노하는 마음을."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강남역 10번 출구 앞, 각자의 생각을 적은 포스트잇 수십 개가 검은색 판에 빼곡하게 붙었다. 그 옆 길가에는 기독교인 100여 명이 자리를 펴고 앉았다. 사람들 시선이 모인 곳에는 '살아남아 다시 붙인다', '강남역 여성 혐오 범죄 희생자 1주기 추모 예배'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수막을 붙인 테이블에는 보라, 분홍색 초들이 줄지어 놓였다.

믿는페미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는 5월 11일, 2016년 5월 17일 발생한 강남역 살인 사건 희생자를 기억하는 1주기 예배를 열었다. 기독교계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을 주제로 예배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참가자들은 "기억하고 싶어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불의에 침묵하고 싶지 않아서" 등 저마다의 이유로 거리로 나왔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예배 모습이 신기한 듯, 발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부터 머리 희끗한 중년 남성, 지하철을 타러 가는 커플 등이 몇 분간 서서 예배에 함께했다.

믿는페미,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가 함께 모여 강남역 여성 혐오 범죄 희생자 1주기 추모 예배를 열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세 단체가 준비한 추모 예배는 여성주의 예배였다. 기도·설교·성찬 집례 모두 여성이 맡았다. 믿는페미 유은(오스칼네고양이) 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된 희생자, 세계 곳곳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탄식했다. '하나님의 애통함'을 촉구하는 기도였다.

"애통하는 자들의 소리를 들어 주소서. 이 땅에 태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억압받고, 죽임당한 이들을 기억합니다. 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바로 작년 이곳에서,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내가 걸었던 길을 걸었을 한 여성이 여자라는 이유로 죽었습니다. 돌아보면 여자라는 이유로 죽음으로 내몰린, 생명을 강탈당한 이들이 이렇게도 많습니다. 하나님 애통해하십시오. 하나님, 당신이 아파야 마땅합니다.

나는 당신께 고발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나는 명예라는 이름으로 가족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몸을 가리지 않아,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고자 해, 아버지 명령을 따르지 않아 죽었습니다. 여성은 성욕을 가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나의 생식기가 잘렸습니다. 나는 전쟁 중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이에게 강간당하고 죽임당했습니다. 내가 여성인 이상, 나는 생명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이며 한국 군인들에게 강간당하고 죽임당한 베트남 여성이자, 기지촌에서 일하다 미군에게 살해당하고 생식기에 우산이 꽂힌 채로 발견된 '윤금이' 입니다. 내가 여성이기에 이것은 모두 나의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애통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저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참가자들은 기도 중간중간 "명예 살해와 여성 할례로 죽임당하고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고 다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임당하는 이들이 없게 하소서"라고 응답했다.

설교를 맡은 김신애 목사(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는 기독교인들에게 강남역 살인 사건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기를, 행동하기를 당부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나만 잘하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던 많은 여성의 일상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여성들은 희생자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은 어느 곳에서도 안전할 수 없겠구나'라는 소름 끼치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각이 오늘 우리를 이곳에 불러냈습니다.

군중 앞에 선 빌라도 총독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예수의 죽음은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녀의 죽음은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여기며 손을 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약자가 사회적 타살을 당했을 때,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할 때 이미 세계가 절망을 딛고 조금씩 더 나은 세상으로 전진해 나갔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성주의 예배로 꾸려진 추모 예배에는 기도, 설교, 성찬식 집전을 모두 여성이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평화산책이 예배를 위한 특송을 준비했다. 지나가던 고등학생 둘이 발걸음을 멈추고 특송을 듣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참가자들은 "우리가 마주한 어두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살겠다"고 다짐하며 예배를 마쳤다. 추모 예배에 온 20대 여성은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만 하더라도 그게 나의 일이 아니고 한 여성의 일이라고만 여겼어요. 그날 이후로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고, 타자와 나를 분리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차별과 혐오에 침묵하고 싶지 않아 (오늘 이곳에) 왔습니다. 예배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자의) 아픔을 기억하고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라고 소회를 밝혔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