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크나이트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언니, 잘 지내죠? 얼마 전 <뉴스앤조이>에 기고된 두크나이트 님의 연재 글에 대한 비평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어요. 그분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설익은 상황 인식, 미끄러지는 해석, 빈곤한 상상력'이라는 표현들이 떠올랐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그분의 인식에 동의하는 점도 있었답니다. 그중 압권은 '아저씨 복음주의'라는 말이었어요. 이 말은 마치 심상 언어 같아요. 언니 머리 위로도 선명한 어떤 그림이 떠오르지요? 언니가 궁금해하겠지만 그분의 주장을 자세히 다루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다만 그분이 마지막 글에서 제시한 대안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두크나이트 님은 사회참여적 복음주의가 "고유의 신학적인 학술 작업을 생산하고 이 흐름을 대표할 수 있는 종교인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했어요. 이 대안이 앞선 연재글에서 그분이 맹렬히 비판한 '진보적이지 않은 진보적 복음주의', '민주당 아저씨 복음주의' 문제와 어떤 관계인지 의아했답니다. 간판급 학자와 스타 목회자의 배출에 복음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고풍스러워 당황했고요.

나는 그분이 제시한 방식의 해결책이 그 조직을 더욱 위계적이고 손댈 수 없을 정도로 구태의연하고 진부하게 만들 거라 생각해요. 위계화하고 비대해진 조직에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작은 집단은 더 희미해지고 침묵을 강요당하겠지요. 2030 청년의 상상력이 아저씨 중심의 발전론을 넘어서지 못한 채, 아저씨 복음주의 비판으로 시작해 다시 복음주의를 아저씨의 품에 돌려주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분의 글을 통해 나 같은 사람이 복음주의 진영에 대한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 보게 되니, 그 글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될지 누가 알겠어요?

2. 사회참여적 복음주의는 과연,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우파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언니,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사회학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를 '액체 현대'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더라구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액체화한 자본이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지며 최대 수익을 구가하는 동안, 노동은 액화해 임시직·계약직으로 흘러내려요.1) 사회의 핵심 제도 장치들도 함께 액화하고, 느슨해진 사회적 안전망 사이로 흘러내리는 존재들은 일상적으로 위험·위기·불안을 경험하지요.2) 우리가 심히 우려하고 있는 기독교 우파와 근본주의의 발흥도 이러한 액체 사회의 현실과 깊이 연관돼 있답니다.

내가 존경하는 페미니스트 성서학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지구적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일상적 불확실성, 불안, 위기, 위험을 수반하고, 이로 인해 창출되는 '확실성'에 대한 열망을 종교적 근본주의가 충족시킨다. 전능자에 대한 의존과 복종을 강조하는 근본주의는 그 뜻에 복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확신/확실성'을, 그렇지 않은 자에게 '처벌'을 약속함으로써 외부인,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평화주의자,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고 말해요.3) 대다수 인류의 삶과 꿈과 미래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정치적 극우화, 근본주의의 공모는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인권, 복지, 생태 환경, 사회적 정의, 평등을 축소하고 퇴행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발흥한 근본주의와 그 사회적 파괴력 또한 이러한 거시적 맥락에 놓여 있지요.

2016~2017년 촛불 정국,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수립, 그리고 2020년 민주당의 21대 총선 승리를 거치며 우리는 개신교 근본주의가 뚜렷하게 대중 정치 세력화하는 것을 봤어요. '태극기 부대'라 불리는 이 집단이 코로나 시국과 맞물린 총선 과정에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됐고 모두 걱정이 많았지요. 그런데 이 상황이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진영에게는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였던 것 같아요. 문제적 집단으로 규정된 개신교 근본주의에 대한 진단과 의견을 듣기 위해 많은 매체가 앞다퉈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인사들을 초대했던 것 기억나지요? 덕분에 개신교 근본주의나 복음주의 우파와는 다른, 건전한 복음주의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릴 수 있었어요.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의 존재적 대의가 입증되는 순간이었지요.

개신교 근본주의의 비상식적 행보와 언론의 총공세는 복음주의 우파마저 서둘러 근본주의 세력과 선 긋기에 나서게 했고, 현재로서 개신교 근본주의는 '대의'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아 보여요. 그러나 근본주의 세력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보수 정치와 깊게 얽혀 있으니 영향력이 쉽게 사그라들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보수 신학이 전국 방방곡곡 주류를 이루는 한국교회이니만큼, 근본주의를 저지하는 일은 앞으로도 기독교 진보 진영의 지속적인 과제로 남을 것 같아요. 

언니, 사회참여적 복음주의가 복음주의 우파와 근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쉽지 않을 거라고 봐요. 우선, 사회참여적 복음주의는 그 규모나 영향력의 면에서 너무 제한적이니까요. 두크나이트 님이 지적한 것처럼 '시골' 교회에서는 하나님나라신학을 만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 현실이 앞으로 개선되리라는 전망도 밝지 않아요. 근본주의에 대항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선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기독교 진보 세력이 함께 힘을 모아 공동 작업을 진행하는 일이 필요해 보여요. 서로의 신학을 존중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진보 진영 신학계의 활동과 내용이 더 풍부해지고 영향력도 커지지 않을까요?

복음주의 우파와 사회참여적 복음주의가 보수적인 신학을 공유하고 있는 점도 마음에 걸려요. 보수 개신교 진영이 근본주의에 선을 그었을 때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이제 사람들은 보수 개신교와 사회참여적 복음주의를 어떻게 구분하지? 두크나이트 님 말처럼 복음주의 우파는 국민의힘 지지, 복음주의 좌파는 민주당 지지로 구분해야 하나?'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우파를 신학적인 면에서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데, 특히 페미니즘과 동성애 이슈에서 두 집단의 공통점이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3. '동성애'와 '페미니즘'에 대한
복음주의 아저씨들의 침묵

보수 개신교단은 2017년부터 교단 차원에서 '동성애 금지'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그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해마다 그들은 그런 어리석은 짓을 어찌나 진지하고 엄숙하게 해내는지요). '동성애'를 낙인찍고 그 추문 위에 자신들의 정당성과 권위를 세워 보려는 수작이지요. 수년에 걸쳐 보수 개신교회는 반동성애 입장을 점점 더 강화하고 입지를 확장해 가고 있어요. 그런데 '복음의 공공성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며 성장해 온 사회참여적 복음주의는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요.

<퀴어 아포칼립스>(현실문화)의 저자 시우는 보수 개신교 내 개혁 세력인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의 '깊은 침묵' 때문에 반퀴어 운동이 보수 개신교 전체의 대표성과 정당성을 부여받게 됐다고 지적해요.4)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의 침묵은 보수 개신교 교회와 완전히 척질 수 없고 에큐메니컬 진영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기독교 지형 안의 애매한 정치적 위치에 기인한다"는 저자의 분석은 꽤 정확해 보이지 않나요?5) 그는 같은 책에서 "복음주의 진영은 반동성애 운동 진영과 성소수자 운동 진영 양쪽에서 입장을 촉구받는 상황에 처해 있으며, 보수 개신교회가 신앙을 명분으로 사회적 소수자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지속적으로 침묵하고 방관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6)고 진단했지만, 2020년 초 출판된 김근주 교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NICS)를 제외하면 '복음주의 아저씨'들은 여전히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답니다.

언니, 아저씨 복음주의가 페미니즘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복음주의 아저씨들은 여성들에게 '건전'하고 '안전'한 페미니즘을 가르쳐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복음주의 아저씨들이 유독 양혜원 박사를 지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겠지요. 하지만 양혜원 박사는 2018년 출간된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비아토르)에서 기독교와 페미니즘은 공존할 수 없으니 자신은 페미니즘을 떠나기로 했다고 밝혔어요. 성서와 기독교는 본질상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다. 페미니즘이 가부장제를 비판할 때, 성서는 훼손되고 복음주의는 와해될 것이다. 그러니 복음주의 사수를 위해 교회 안에서는 여태까지의 역할과 위치에 만족하고 더 이상 페미니즘을 논하지 마라는 식이었지요.

양 박사가 이렇듯 분명하게 반페미니즘을 선언했는데, 어째서 사회참여적 복음주의는 유독 양 박사를 통해 페미니즘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걸까요? 2020년 한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단체가 개원 10주년으로 기획한 온라인 강연의 유일한 여성 연사가 양 박사였던 거 기억하지요? 온통 남성 연사, 남성 저자 판인 사회적 복음주의 담론장에 '그래도 여성이 한 명 있었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할까요?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에게만 마이크를 주는 복음주의 아저씨의 권력. 그 민낯을 마주한 권력 없는 자의 입맛은 씁쓸합니다.

페미니즘을 향한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의 태도는 성·젠더 이슈에서 스스로를 무력하게 합니다. 'N번방' 같은 성·젠더와 얽힌 불의·폭력 앞에서 나름의 '입장'을 가지지 못하니까요. 그들이 앞으로도 담론장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여성 구성원의 페미니즘적 비판을 무시한다면, 그들 조직에서조차 정의·평등·민주주의가 축소되는 문제를 겪게 될 겁니다. 이는 '복음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지향과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니만큼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의 대의와 입지가 지속적으로 약화·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해요.

4. 희망 잃은 '프레카리아트'의 시대
신학과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언니, 작년 한 해에만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219만 6000여 명에 이른다고 해요. 계층 상승은 꿈도 꾸지 못하고 비정규 노동의 불안정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노동 무산계급을 일컫는 신조어 - 편집자 주)라는 새로운 계급이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고 합니다.7) 사회학자 김홍중에 따르면, 프레카리아트는 부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빼앗긴, 즉 단순한 무산자가 아니라 '미래 없는 인간' 혹은 '희망 없는 인간'8)이에요.

2020년 11월 13일자 <한겨례> 기사를 다시 들춰 보면서 김홍중의 말을 떠올렸어요. 기사는 '조용한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20대 여성들의 자살률이 급증한 문제를 다뤘는데, 2020년 실업률 조사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인 집단이 20대 여성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9) 사회 초년생으로 경험한 짧은 직장 생활을 통해 영민한 그들은 한국 사회 내 자신들의 위치와 전망을 간파했고, 거기서 어떤 믿음도, 희망도, 미래도 찾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회도, 교회도, 어떤 형태의 공동체도 그들에게 희망을 품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믿을 만한 언덕이 되지 못했습니다. 언니, 미래를 꿈꿀 권리마저 박탈된 프레카리아트의 걷잡을 수 없는 확산과, 죽음마저 차별하는 일이 일상화한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신학을 하고 어떤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까요?

모든 인간에겐 미래에 대한 믿음·희망·꿈이 필요해요. 꿈꾸는 자가 미래를 상상하고, 상상한 미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과 믿음이 오늘을 살아가게 하니까요. 신학생 나부랭이인 내가 무엇을 알겠어요? 다만 우리의 신학이, 우리의 다양한 교회 공동체가, 작고 연한 것들이 마음껏 꿈꾸고 상상하고 미래를 일굴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우리의 에클레시아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예배와 말씀과 공동체의 활동을 보고 듣고 참여하는 것만으로, 여성·남성·동성애자·이성애자·장애인·비장애인 누구든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길 바라요. 여성·동성애자·장애인은 이등 시민 취급받는, 남자 어른만 존경받고 그들의 말에만 권위가 있다고 배웠던 어린 시절 우리의 교회와는 달라야 합니다. 그 비극적 현실이 어떻게 우리의 꿈을 질식하고, 상상력을 가두고, 미래를 좌절시켰는지는 다음 기회에 나누도록 해요.

언니, 나는 두크나이트 님이 지적한 것처럼 '아저씨 복음주의'에 불만이 있지만,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도 여전하답니다. 밖에서는 잘 안 보이고 안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안에는 수군수군하고 때론 와글와글한 다양하고 건강한 목소리가 물결을 일으키고 있잖아요. 사회참여적 복음주의가 '아저씨 복음주의'를 고집하며 목소리의 물결을 계속 무시하고 침묵시키려 한다면 이 물결은 조만간 '아저씨 복음주의'의 둑을 허물고 스스로의 물길을 만들 겁니다. 꿈꿀 수 있기 위해서라도요. '정의와 공의'라는 하나님의 꿈을 품고 복음주의 우파의 품을 뛰쳐나와 스스로 길을 만들었던, 그 꿈과 희망으로 '사회참여적 복음주의'를 일구어 낸 1987년의 복음주의 청년들처럼 말이죠.

꿈이 질식당하는 세상에서 작고 연한 것들에게 희망이 될 신학·에클레시아를 상상하며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

언니, 다음 소식을 전할 때까지 안녕해요.

신나(가명) / 오랜 시간 아무런 의심 없이 복음주의 저자들의 책을 탐독하며 신앙생활했다. 뒤늦게 신학에 관심을 두고 기독연구원느헤미야에서 5학기를 공부했다. 그 후로도 해갈되지 않은 신학·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풀고자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공부를 이어 가고 있다. 졸지에 올해로 '신학생 나부랭이' 4년차에 접어든다.

1) Sarah Tomely, Mitchell Hobbs 외, The Sociology Book, (New York, DK Publishing:2015):140
2) 박명규, '꿈, 희망, 그리고 사회학’' <꿈의 사회학>, 서울, 다산출판사, 2018:4
3) 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 The Power of the Word: Scripture and the Rhetoric of Empir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39-40
4) 시우, <퀴어 아포칼립스: 사랑과 혐오의 정치학>, 서울, 현실문화, 2018:85
5) ibid: 87
6) ibid: 89-90
7) 박명규, '꿈, 희망, 그리고 사회학', <꿈의 사회학>, 서울, 다산출판사, 2018:11

8) 김홍중, '꿈의 사회학 서설', <꿈의 사회학>, 서울, 다산출판사, 2018: 33

9) "'조용한 학살', 20대 여성들은 왜 점점 더 많이 목숨을 끊나?" 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69898.html#csidx25686829f42504eae750b7e40ad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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