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요즘 뉴스 보기가 너무 힘들어. 세상이 악하고 부정부패투성이야. 차라리 안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아."

요즘 주변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다. 미디어에 재현된 사회 모습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문제로 가득한 세상이다. 매일 새로운 사건들이 뉴스를 장식하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따라가기조차 벅차게 느껴진다. 아무리 큰 사건도 영향력이 오래가지 않고 쉽게 잊히곤 한다. "사건으로 사건을 덮는다"는 말이 쉽게 사용되고 수용된다. 음모론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만큼 미디어를 소비하는 수용자들이 공통적으로 체감하고 공감하는 현상이라는 뜻이다.

언론의 보도 경쟁은 점차 자극적인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낚였던(?) 경험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에서는 깊이 있는 분석과 대안으로 독자를 확보하려고 하기보다 선정적인 기사 제목으로 조회 수를 높이려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언론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는 언론이 수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 채 구독률과 시청률을 높이려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언론의 선정주의 현상은 보도의 화제성을 강조한 나머지, 윤리적 측면들을 간과할 때 나타난다. 물론 어느 것이 선정적인지 분명한 기준을 정하는 일은 어렵다. 언론은 화제성과 동시에 언론 보도의 윤리적 책임을 균형 있게 다뤄야 한다.

그 중요성에도 선정주의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해 독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문제는 언론사의 경쟁적 보도 문화는 그것을 소비하는 일반 시민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강도'(intensity)와 '빈도'(frequency),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언론이 재현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경우, 보도를 접하는 독자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에 반복 노출되면, 독자들은 장기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사진은 충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매체 중 하나일 것이다.

사진의 폭력적 재현과
수용자가 느끼는 '공감 피로'

사진에 관한 가장 대중적인 비평서 중 하나인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사진에 관하여>(이후)에는 사진 매체와 독자 사이에 일어나는 재현과 수용 방식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손택은 어린 시절 산타모니카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접한 사진을 통해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고 말한다.1) 자신이 이제까지 알지 못하던 세상에 눈을 뜬 것이며, 그 세상은 어린 소녀가 알기에는 너무도 끔찍하고 잔인했다. 그는 이를 '부정적 현현'(negative epiphany)이라고 불렀다.

손택의 표현을 빌리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우리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현대의 계시이자 예언인 셈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지구 반대편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현실들을 간접적으로 목격한다. 예를 들어, 제이콥 리스(Jacob Riis)는 19세기 말 미국 경기 침체기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증거했다. 그는 사진집 제목을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 How the Other Half Lives?>(교유서가)로 정하기도 했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세상에 대해 외치는 현대판 예언자적 소리와 같았다.

손택은 부정적 사건의 사진 재현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일종의 충격을 주는 행위이며 지나치게 폭력적인 이미지에 노출된 독자들에게 강력한 각인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최근 뇌 연구 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이러한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부정적인 일이나 사건이 좋은 일보다 더 오래 선명하게 기억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생존 본능과 관련해 공포스러운 순간을 더 잘 기억해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 반응이다.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 보면, 부모가 평소 긍정적 피드백을 많이 주더라도 한 번 부정적 언행을 보이면 자녀 입장에서는 부정적 기억이 더 오래 남을 것이다.2) 이러한 현상은 성인이 돼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며, 집단적으로도 그 경향이 일치한다.3) 결국 부정적 사건 보도가 긍정적 보도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둘째로, 충격적이고 부정적인 현현의 경험이 도덕적으로 긍정적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손택은 고통스러운 사진을 보는 것과 고통을 겪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고 구분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절반이 겪는 고통의 현실을 미디어를 통해 목격하고 있다. 손택은 그렇다고 이렇게 현실을 보고 있는 행위가 우리를 좀 더 도덕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미디어 재현의 충격은 점차 반복 과정을 거치면서 그 강도가 약화하기 마련이다. 충격은 점차 익숙해지고, 타인의 고통에 관한 감각 또한 무뎌지는 것이다. 그 결과 더 강력한 충격이 필요하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데, 손택은 이를 포르노그래피에 비유했다. 손택의 날카로운 비판은 오늘날 '폭력과 빈곤의 포르노그래피' 개념과 같이 일부 현실이 됐다. 동시에 경계의 필요성이 공유되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미디어의 방대한 정보들, 특히 부정적인 사건 보도가 반복되고 교차되는 것을 목격하는 독자들은 상당한 피로감을 느낄 것이다.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들마저 무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를 가리켜 '공감 피로'(Compassion Fatigue)라고 한다.

수전 몰러(Susan Moeller)는 우리가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재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우리 감정이 그 고통을 직시하기보다 회피한다고 주장한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더 이상 놀라거나 저항하지 않고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결과 부조리한 사회문제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거나 무기력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럼에도 미디어 산업이 더 자극적인 소재를 찾고 장사를 한다고 꼬집어 비판한다.4)

그렇다면 우리는 미디어의 부정적 재현을 금지하거나 독자들이 소비하는 것을 중지해야 하는가. 언론 및 미디어는 긍정적 사건 재현과 도덕심 고취 목적으로만 활용돼야 하는가. 혹자는 뉴스가 너무 부정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니까 사회가 불신과 위기감을 조장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맨날 똑같은 기사들을 보는 것이 지겹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미디어 속 한국 사회를 떠올리면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모습은, 그만큼 우리 사회 속 부정부패에 대한 보도가 반복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주변에서 경험하는 한국 사회 부패를 향한 집단적 피로감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위기라고 생각한다. 손택이나 몰러는 충격이 순간적 반응을 일으키지만 도덕성을 담보하지 않으며 점차 무감각해지고 무기력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 부정부패에 대한 언론의 충격적 보도는 일시적으로 반향과 저항을 일으킬 수 있으나,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는 시민사회 다수가 점차 무뎌지거나 그 현실을 그냥 납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잦은 분노와 반복되는 실망에 싸울 힘조차 상실하지는 않을지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뉴스는 우리를 피곤하게만 만드는가

한국교회를 향한 미디어 속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의 어두운 단면들이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주류 언론과 공중파 방송을 중심으로 종교 부패상을 보도하는 사례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 속 '반기독교 현상' 일부는 디지털 미디어 발전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위키피디아에서 '반기독교주의'을 검색해 보면, '개독'이나 '먹사'와 같은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표현이 인터넷 매체를 통해 공유되고 활성화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 자료는 부족해 보이지만, 인터넷 매체를 통해 개신교를 향한 부정적 주장과 사례를 공유하며 반기독교적 집단 정체성을 강화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합리적으로 가능하다.5)

그렇다면 문제는 미디어인가. 기독교가 잘하는 것이 훨씬 많은데도 굳이 어두운 면만 부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혹자는 '문화 전쟁론'이나 '기독교 핍박' 현상으로 이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각에는 '교회 vs 세상'이라는 이분법적 대결 구도가 자리하고 있다. '교회'를 선으로 상정하고 '악한 세력'이 교회에 흠집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향한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된 주된 이유가 언론이 교회의 부정적 면만 부각해 보도하기 때문인가.

상황은 10년 전에도 비슷했다. 김기태 교수(호남대 신문방송학과)는 언론과 방송에서 종교가 부정적으로 재현된 사례를 조사했다. 그는 개신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더 자주, 그리고 부정적으로 미디어에 노출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2005~2010년 방송 프로그램 중 종교를 부정적 관점에서 다룬 사례는 개신교가 73.9%다.6) 김 교수는 "교회가 문제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론과 미디어 속 개신교의 부정적 이미지는 현상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각으로는 선교적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한국교회의 부정적 이미지를 우려하는 심정은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고 좋은 면만 부각해서 보도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환부를 도려내지 않고 덮으려고만 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선교는 종교개혁과 같이 교회 스스로가 개혁하려는 모습을 보여 줄 때 가능하다.

뇌 연구에 따르면, 하나의 나쁜 기억을 상쇄하려면 적어도 다섯 배의 좋은 기억이 필요하다.7) 교회에 향한 부정적 보도를 줄이는 것은 답이 아니다. 교회가 좋은 일에 훨씬 더 많이 힘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다.

언론은 감시자 역할 지속해야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 및 미디어의 역할은 무엇일까. 다르게 표현하면, 한국 사회가 호소하는 이 집단적 피로감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단지 미디어의 부정적 재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언론이 부정적 사건을 보도하는 일을 멈추고 좋은 이야기만 보도하면 이 피로감은 나아지는 것인가.

손택과 몰러의 비판은 일리가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우려와 같은 것이다. 도덕적 감수성 약화와 공감 피로에 대한 비판은 개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나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무뎌지거나 피로감에 무기력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언론과 미디어는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을 모두 수행해 왔다. 이는 수용자 태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피로감과 패배감 대신 개혁과 저항을 선택하는 독자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진실을 드러내는 일을 멈추면 우리는 더 부패한 사회를 맞이할 것이다. 우리 눈과 귀가 피로하다는 이유로 보고 듣는 것을 멈춘다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언론이 눈과 귀 역할, 감시 기능을 포기한다면, 이 사회는 희망을 잃게 된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어두운 장면을 담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 언론의 숙명이다. 다만 그것이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저급한 선정주의나 상업주의가 아니라 어둠을 빛으로 밝히고 대안을 제시하는 진지한 노력이라면 더욱더 필요하다. 진실을 밝히는 언론이 더 귀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어두운 시기일수록 언론은 빛을 비추는 등대 역할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독자들은 더욱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1)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베르겐-벨젠과 다카우의 사진들을 말한다.
2) http://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105
3) https://www.nytimes.com/2012/03/24/your-money/why-people-remember-negative-events-more-than-positive-ones.html
4) Susan Moeller, Compassion Fatigue: How the Media Sell Disease, Famine, War and Death? (Taylor & Francis, 1999) 참조.
5) https://ko.wikipedia.org/wiki/반기독교주의 참조.
6) 개신교에 이어 불교(36.4%), 가톨릭(18.8%) 순으로 조사됐다. 참고: <뉴스파워>(2010. 7. 20.)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6026
7) 위의 <뉴욕타임스>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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